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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쿠스 : 광장, 그 열광의 공간

1966년과 1989년의 천안문 광장

박문국

201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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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광장, 그 열광의 공간


ㅣ1966년과 1989년의 천안문 광장간

 

1933년 독일의 전권을 거머쥔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듬해 뉘른베르크 광장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재능 있는 영화감독이자 히틀러와 친분이 있던 레니 리펜슈탈은 이 전당대회 촬영 영상을 편집하여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제작하니, 그 이름하여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 되시겠다. 나치즘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상이 덧대어져 있다는 사실만 빼고 본다면 <의지의 승리>는 훌륭한 영화였다. 그 연출기법은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 같은 수십 년 뒤의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이 영화를 통해 독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강림한 위대한 메시아로 윤색되었다.


레니 리펜슈탈은 영화에 등장하는 군중을 하이앵글로, 히틀러를 로우앵글로 잡아 추종자와 지도자의 상하 관계를 극대화했다.

 

▲ 레니 리펜슈탈은 영화에 등장하는 군중을 하이앵글로,

히틀러를 로우앵글로 잡아 추종자와 지도자의 상하 관계를 극대화했다.

 

 

운집한 수천수만의 군중을 내려다보는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은 이후 독재자의 클리셰처럼 자리 잡고 광장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포했던 무솔리니, 김일성 광장에서 군대를 사열하는 북한의 세습독재정권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독재정권은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 광장을 통해 대중의 열광을 끌어냈다.

마오쩌둥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경제를 대륙 스케일로 망쳐버린 대약진 운동으로 한때 그는 국가주석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대약진 운동은 서방 경제를 단기간에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농촌 인력을 공업에 과도하게 착출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을 급격히 저하시키며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낳았다. 그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오른 류사오치는 덩샤오핑과 손을 잡고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마오쩌둥의 경제정책을 뒤집어버리고, 그를 뒷방 늙은이로 만들려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류사오치가 장악한 공산당 수뇌부가 마오쩌둥을 신격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마오쩌둥을 일본 덴노(천왕)와 같은 상징적 존재로 만들어 그 권위 아래 자신들이 전권을 휘두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오쩌둥 신격화는 그의 발언권을 더욱 강화했고, 노회한 정치가인 마오쩌둥은 이를 능수능란하게 이용할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마오쩌둥 신앙으로 불타는 중국 청년들은 자체적으로 홍위병을 조직하고, 당대 중국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가 구시대의 악습과 부패한 관료들의 탓이라는 극단적 성향을 보였다.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및 자본주의 세력이 사회로 침투하고 있으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나서야 한다고 발언하며, 이들의 광기를 부추겼다. 그리고 1966년 8월 8일, ‘사령부를 폭격하라 - 나의 대자보’란 제목의 논평을 발표하며 홍위병 봉기의 방아쇠를 당겼으니 이것이 중국의 역량을 10년 이상 퇴보시켰다 평가받는 문화대혁명이다.

8월 18일에는 문화대혁명의 상징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전국 수백만의 홍위병은 자신들의 유일한 지도자인 마오쩌둥을 만나기 위해 천안문 광장으로 몰려들었는데, 마오쩌둥은 18일 아침 그날의 첫 햇살과 함께 광장에 등장했다. 이 종교적인 연출에 홍위병은 열광했고, 천안문 광장은 혁명의 성지가 되었다. 이후로도 마오쩌둥은 광장에 수시로 모습을 보이며 홍위병을 선동했고, 3년에 걸친 이들의 활약으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1966년의 천안문 광장은 상술한 예와 마찬가지로 독재자의 의도에 충실히 영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천안문 광장에 모인 홍위병들, 손에 들고 있는 건 마오쩌둥의 어록집인 『모주석 어록』이다.

▲ 천안문 광장에 모인 홍위병들.
손에 들고 있는 건 마오쩌둥의 어록집인 『모주석 어록』이다.


그런데 약 20여 년 뒤인 1989년, 천안문 광장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움직임이 표출된 바 있다. 당시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는 덩샤오핑이었다. 마오쩌둥의 직계 후계자인 화궈펑을 몰아내고 전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고양이가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을 내세우며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폐쇄적이었던 중국 사회에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도입되었고, 침체된 중국 경제는 점차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완전무결했던 것은 아니었다. 급격한 시장경제의 도입은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실업자의 존재가 사회를 동요케 했다. 빈부격차와 범죄율의 폭발적인 증가 역시 개혁개방의 부작용이었다. 물론 오랜 시간 폐쇄적인 사회를 유지했던 중국인 만큼 이런 진통은 시장경제를 소화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정치였다. 강력한 개혁개방 경제정책과는 달리 덩샤오핑의 정치는 정체되어 있었다. 그는 모든 당직의 10년 임기제를 확립하여 일인독재의 가능성을 일축했으나,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는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었다. 부패한 관료는 여전히 도처에 산재해 있었고 이들은 자본가와 결탁하며 과거와 다를 바 없는, 혹은 그 이상의 전횡을 일삼았다. 1년 사이 2만 명의 범죄자가 사형당했다는 설이 나올 정도로 법의 집행은 엄정했지만, 이때 죽은 이들은 단순 잡범이었을 뿐 경제사범이나 비리 정치인에 대한 처벌은 거의 없었다. 10여 년의 개혁개방 정책이 중국에 남긴 것은 전형적인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였다.
사회에 만연한 불만은 중국 인민들의 각성을 끌어냈고, 개혁개방에 따른 국외 정보의 유입은 그 역동성을 가속화했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부정부패 척결을 가능케 할 전면적인 민주화 조치를 원했다. 이를 위해 한국의 사례와 같은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민주화에 우호적이었던 후야오방 전(前) 당총서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중국의 400개 도시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물결이 이어졌고, 베이징에서는 대학생들의 단식투쟁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자극받은 100만 이상의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천안문 6.4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89년의 천안문 광장은 분명 ‘민의의 전당’이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든지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었다. 아홉 살의 어린아이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한족은 물론 위구르족과 같은 중국 내 소수민족까지 예외는 없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예술대학의 학생 및 교수들이 설치한 민주주의의 여신상이 자리했다. 시민들은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은 채 축제와 같은 열정을 발산했다.


민주주의의 여신상은 공산당 독재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아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설치되었다.

▲ 주주의의 여신상은 공산당 독재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아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설치되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단호했다. 그의 개혁개방 정책은 어디까지나 경제체제에 국한된 것일 뿐 중국의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했던 덩샤오핑은 “20만 명의 목숨으로 20년간의 평화를 얻겠다”는 발언을 하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에 의한 강경한 진압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6월 4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천안문 광장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사격을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차를 앞세운 군대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고 수천 단위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만 하는 인민해방군은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했고, 민주화의 열기는 무력 앞에 사그라졌다. 그리고 당시 고르바초프의 내중 취재를 위해 체류 중이던 외신 기자들은 이 참상을 똑똑히 기록했다.

문화대혁명과 6.4항쟁이 천안문 광장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발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광장이란 공간에는 사회의 요구를 분출할 힘이 내재해 있다. 이때 광장의 위력은 대중의 열광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 대중이 누군가의 기획에 따라 객체로서 움직이든, 혹은 대중 스스로 의지를 갖고 주체로서 움직이든 이 명제만큼은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주류적 시민사회는 광장에서 후자의 움직임이 표출될 것을 요구한다.
물론 중국은 현재까지 ‘폭도들의 폭거를 진압하며 나타난 불가피한 희생’ 정도로 6.4항쟁을 규정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뜻을 번복하지 않았으며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인 장쩌민과 후진타오도 덩샤오핑의 입장을 충실히 따랐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에는 지금 이 시각에도 문화대혁명의 기획자였던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물론 이것이 영원히 지속될 거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또한 오랫동안 5월의 광주를 폭동으로 규정했으나 역사는 이런 평가를 뒤집어버린 바 있다. 진실이 영원히 감춰지지 않을 거란 믿음에서 역사는 그 가치를 증명하기 마련이다.

 한국전통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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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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