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인들은 또래들 속에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리스인들이란 도시국가 폴리스를 형성하여 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을 말한다. 그들에게 또래들은 어디 가면 있었을까? 광장에 가면 있었다. 좋았던 옛 시절 아이들에게 또래들은 골목이나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에서 신나고 진지하게 놀고 있었듯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또래들은 광장에 가면 못지않게 신나고 진지하게 정치적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향유했던 것을 아렌트는 ‘공적인 행복’ 내지는 ‘정치적 행복’이라고 부른다.
한국인은 광장에 나가 정치적 토론을 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인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국인은 광장에서 데모를 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정치적 토론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왜일까? 아니면 이렇게 돌려서 물어보자. 그렇다면 한국인은 정치적 토론을 하지 않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정치 이야기만큼 재미난 것도 없기 때문에 한국인도 그런 비슷한 것을 한다. 다만 광장 같은 곳에서 하지 않으며, 술집 같은 곳에서 한다. 어떤 때는 술집의 연장 같기도 한 SNS에서도 한다.
왜 SNS는 꼭 술집의 연장 같기만 한 것일까? 왜냐하면, 역시 그렇지 않은 술 모임도 있겠지만, 술을 마시면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잘 들어보면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이나 일방적 주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또 왜 독백이나 일방적 주장에 가깝다는 것일까? 왜냐하면 서로가 들어주기만 바랄 뿐, 설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줄 사람이 있기는 있어야 한다.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삶은 급격하게 허무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그 들어줄 사람이 사실은 매우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래서 또 끈끈한 우정이나 집착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한 번 말을 시작하면 나의 주장은 종종 나의 이성을 잡아먹기 마련이며, 바로 그때 청자의 빛깔은 서로에게 개성을 잃고 잿빛이 되어버린다.
술을 마시면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잘 들어보면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이나 일방적 주장에 가깝다. 서로가 들어주기만 바랄 뿐, 설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진짜 토론의 경험이 거의 없는 가운데, 술자리에서의 뜨겁고 공허한 주고받음도 세월이 흘러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지치게 하면,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바로 고독이라는 손님이. 요즘은 나이를 가리지도 않고 찾아온다. 곧잘 우울이 동행하는 손님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 해방된 손으로 턱이라도 괴고 한 번 생각해보자. 광장이란 무엇일까?
ㅣ2
골목이나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가 아이들이 놀기 좋았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면,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기 좋았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광장 하면 떠오르는―현실적 이미지가 아니라―이념적 이미지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광장의 기원을 조사할 때 발견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광장은 자유롭고 평등한 또래들 간의 토론 장소였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오래된 과거에, 그것도 서양 문명의 저 기원에서 광장과 토론이 맺고 있었던 이 관계가 역사적으로 우연적이었다는 사실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우연에만 기대어 “광장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답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광장과 토론의 본래적 연관을 광장의 기원에 기대지 않는 방식으로 추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광장과 토론의 관계를 좀 더 본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제 나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광장과 토론 사이에 한 가지 매개물을 끼워 넣으려고 한다. 역사적 우연의 매개물(고대 그리스)이 아닌 그것의 이름은 바로 이성이다. 영어로는 ‘reason’이라고 하는 것.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물론 그 이성이라는 것도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니고, 그에 대한 잠재성이 주어진 가운데 현실적으로 길러져야 한다. 인간 문화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분명 인간을 이성을 갖춘 합리적 존재로 길러내는 것이며, 그러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문화는 분명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문화다.
인간 같은 이성적 존재가 이성의 능력을 사용할 때 이를 추리 내지는 추론이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reasoning’이라고 한다. 그런데 장 피아제는 추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일곱 살부터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서 관찰했다. 자아 중심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 이전의 아이들한테서는 아직 추리에 대한 욕구를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일곱 살부터는 그러한 욕구가 뚜렷해진다. 그러한 욕구를 피아제는 ‘자기 생각을 사회화하려는 욕구’라고 부른다. 즉 그것은 ‘듣는 사람을 설득하거나 자신의 논점을 증명하려는 ‘욕구’다.
이 시기부터 아이는 자아 중심성을 버리고 자기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왜일까? 그리고 자기 생각을 사회화하려는 욕구와 자기의식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피아제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과의 마찰을 통해서만, 교환과 대립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의 목적과 경향성을 의식하게 된다. 즉 ‘자기의식은 타인과의 충돌을 통해서 태어난다.’ 이렇듯 자기의식을 획득한 아이는 또한 이성의 능력을 획득한 존재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이제 그 아이는 자신의 관점만을 고수하면서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관점을 고려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제 자기 생각을 사회화하려는 자기 의식적 욕구를 갖게 되었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닌 이상, 아이는 타인을 설득해야 하며, 그렇기에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즉 이제부터 아이는 자기의 입장이건 타인의 입장이건 우선은 그것을 하나의 논리적 전제로 놓고 추론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추론을 통해 이런저런 판단을 입증하려고 해야 한다.
일곱 살 아이의 말이 성인의 말에 비해 아무리 허술해 보여도, 피아제는 그곳에서 이제 막 깨어난 이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ㅣ3
이제 우리는 질문에 답할 차례가 되었다. 즉 광장이란 무엇일까?
아렌트는 집을 떠나 공적인 정치적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용기를 ‘탁월한 정치적 덕목’이라고 부른다. 용기는 다만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는 데만 필요한 것, 전사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의 경우 용기는 부모의 보살핌이 있는 안락한 집을 떠나 더 큰 아이들도 있는 골목이나 놀이터로 나갈 때 필요하다.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어 더 작은 아이들도 있는 놀이의 세계를 떠나야 할 때면, 이제 공동체의 이런저런 현안을 한 명의 당사자로서 동료들과 토론하려는 욕망이 생겨날 때면, ‘놀이’가 아니라 ‘현실’이 나의 욕망을 끌어당길 때면, 바로 그 욕망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다. 왜냐하면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제 막 완성된 이성을 장착하고 만만치 않은 타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말이다. 나는 바로 그 타인들이 있는 곳을 이제 ‘광장’이라고 부르겠다.
광장은 독백의 공간도 아니며, 무력(武力)의 공간도 아니다. 광장은 홀로 있는 공간이 아니며, 홀로 있지 않더라도 결국은 서로 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공간도 아니다. 광장은 또한 여럿이 싸우더라도 무력이나 힘을 사용해서 싸우는 공간이 아니다. 이성을 통해 싸우는, 아니 싸운다기보다는 토론을 하는 공간이다. 광장의 주인은 전사가 아니라 시민이다.
광장은 이성을 통해 싸우는, 아니 싸운다기보다는 토론을 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광장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았다. 광장은 자기들만의 은신처가 아니며, 또한 전쟁터도 아니다. 공동체의 문제들이 불거질 때 우리는 실제로 무력을 사용해 전쟁하지는 않더라도 늘 전쟁 비유를 즐겨 사용해왔다. 그럴 때면 할 말이 많아지기도 한다. 전쟁은 바로 그 비유의 언어를 통해 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왔으며, 우리 앞에 있는 타인의 존재를 가려왔다. 하지만 광장에서의 토론은 분명 타협과 협력의 기쁨을 알게 할 것이고, 상호존중의 중요성을 알게 할 것이다. 전쟁에서는 원리상 타인의 입장을 고려할 수 없다. 하지만 타인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는 광장이란 정의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토론에서 타인의 입장을 언제나 고려해야 하는 한, 그러면서 서로 대화를 이끌고 가는 능력이 바로 이성인 한, 광장은 이성의 공간이다.
그 이성의 공간이 말 그대로 넓은 장일 필요는 없다. 술자리여도 상관은 없다.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하는 곳이면 어디든 광장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곳 어디든 전쟁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는 “광장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그 답이 주는 한 가지 선물은 저 유구한 전쟁과 전쟁 언어의 유혹에서 이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행복, 즉 아렌트가 말한 정치적 행복을 누릴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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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생각 : 이성의 공간, 광장
이성민
2016-10-04
ㅣ이성의 공간, 광장
ㅣ1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인들은 또래들 속에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리스인들이란 도시국가 폴리스를 형성하여 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을 말한다. 그들에게 또래들은 어디 가면 있었을까? 광장에 가면 있었다. 좋았던 옛 시절 아이들에게 또래들은 골목이나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에서 신나고 진지하게 놀고 있었듯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또래들은 광장에 가면 못지않게 신나고 진지하게 정치적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향유했던 것을 아렌트는 ‘공적인 행복’ 내지는 ‘정치적 행복’이라고 부른다. 한국인은 광장에 나가 정치적 토론을 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인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국인은 광장에서 데모를 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정치적 토론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왜일까? 아니면 이렇게 돌려서 물어보자. 그렇다면 한국인은 정치적 토론을 하지 않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정치 이야기만큼 재미난 것도 없기 때문에 한국인도 그런 비슷한 것을 한다. 다만 광장 같은 곳에서 하지 않으며, 술집 같은 곳에서 한다. 어떤 때는 술집의 연장 같기도 한 SNS에서도 한다.
왜 SNS는 꼭 술집의 연장 같기만 한 것일까? 왜냐하면, 역시 그렇지 않은 술 모임도 있겠지만, 술을 마시면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잘 들어보면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이나 일방적 주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또 왜 독백이나 일방적 주장에 가깝다는 것일까? 왜냐하면 서로가 들어주기만 바랄 뿐, 설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줄 사람이 있기는 있어야 한다.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삶은 급격하게 허무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그 들어줄 사람이 사실은 매우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래서 또 끈끈한 우정이나 집착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한 번 말을 시작하면 나의 주장은 종종 나의 이성을 잡아먹기 마련이며, 바로 그때 청자의 빛깔은 서로에게 개성을 잃고 잿빛이 되어버린다.
술을 마시면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잘 들어보면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이나 일방적 주장에 가깝다. 서로가 들어주기만 바랄 뿐, 설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진짜 토론의 경험이 거의 없는 가운데, 술자리에서의 뜨겁고 공허한 주고받음도 세월이 흘러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지치게 하면,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바로 고독이라는 손님이. 요즘은 나이를 가리지도 않고 찾아온다. 곧잘 우울이 동행하는 손님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 해방된 손으로 턱이라도 괴고 한 번 생각해보자. 광장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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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나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가 아이들이 놀기 좋았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면,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기 좋았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광장 하면 떠오르는―현실적 이미지가 아니라―이념적 이미지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광장의 기원을 조사할 때 발견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광장은 자유롭고 평등한 또래들 간의 토론 장소였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오래된 과거에, 그것도 서양 문명의 저 기원에서 광장과 토론이 맺고 있었던 이 관계가 역사적으로 우연적이었다는 사실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우연에만 기대어 “광장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답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광장과 토론의 본래적 연관을 광장의 기원에 기대지 않는 방식으로 추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광장과 토론의 관계를 좀 더 본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제 나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광장과 토론 사이에 한 가지 매개물을 끼워 넣으려고 한다. 역사적 우연의 매개물(고대 그리스)이 아닌 그것의 이름은 바로 이성이다. 영어로는 ‘reason’이라고 하는 것.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물론 그 이성이라는 것도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니고, 그에 대한 잠재성이 주어진 가운데 현실적으로 길러져야 한다. 인간 문화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분명 인간을 이성을 갖춘 합리적 존재로 길러내는 것이며, 그러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문화는 분명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문화다.
인간 같은 이성적 존재가 이성의 능력을 사용할 때 이를 추리 내지는 추론이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reasoning’이라고 한다. 그런데 장 피아제는 추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일곱 살부터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서 관찰했다. 자아 중심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 이전의 아이들한테서는 아직 추리에 대한 욕구를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일곱 살부터는 그러한 욕구가 뚜렷해진다. 그러한 욕구를 피아제는 ‘자기 생각을 사회화하려는 욕구’라고 부른다. 즉 그것은 ‘듣는 사람을 설득하거나 자신의 논점을 증명하려는 ‘욕구’다.
이 시기부터 아이는 자아 중심성을 버리고 자기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왜일까? 그리고 자기 생각을 사회화하려는 욕구와 자기의식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피아제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과의 마찰을 통해서만, 교환과 대립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의 목적과 경향성을 의식하게 된다. 즉 ‘자기의식은 타인과의 충돌을 통해서 태어난다.’ 이렇듯 자기의식을 획득한 아이는 또한 이성의 능력을 획득한 존재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이제 그 아이는 자신의 관점만을 고수하면서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관점을 고려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제 자기 생각을 사회화하려는 자기 의식적 욕구를 갖게 되었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닌 이상, 아이는 타인을 설득해야 하며, 그렇기에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즉 이제부터 아이는 자기의 입장이건 타인의 입장이건 우선은 그것을 하나의 논리적 전제로 놓고 추론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추론을 통해 이런저런 판단을 입증하려고 해야 한다.
일곱 살 아이의 말이 성인의 말에 비해 아무리 허술해 보여도, 피아제는 그곳에서 이제 막 깨어난 이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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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질문에 답할 차례가 되었다. 즉 광장이란 무엇일까?
아렌트는 집을 떠나 공적인 정치적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용기를 ‘탁월한 정치적 덕목’이라고 부른다. 용기는 다만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는 데만 필요한 것, 전사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의 경우 용기는 부모의 보살핌이 있는 안락한 집을 떠나 더 큰 아이들도 있는 골목이나 놀이터로 나갈 때 필요하다.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어 더 작은 아이들도 있는 놀이의 세계를 떠나야 할 때면, 이제 공동체의 이런저런 현안을 한 명의 당사자로서 동료들과 토론하려는 욕망이 생겨날 때면, ‘놀이’가 아니라 ‘현실’이 나의 욕망을 끌어당길 때면, 바로 그 욕망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다. 왜냐하면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제 막 완성된 이성을 장착하고 만만치 않은 타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말이다. 나는 바로 그 타인들이 있는 곳을 이제 ‘광장’이라고 부르겠다.
광장은 독백의 공간도 아니며, 무력(武力)의 공간도 아니다. 광장은 홀로 있는 공간이 아니며, 홀로 있지 않더라도 결국은 서로 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공간도 아니다. 광장은 또한 여럿이 싸우더라도 무력이나 힘을 사용해서 싸우는 공간이 아니다. 이성을 통해 싸우는, 아니 싸운다기보다는 토론을 하는 공간이다. 광장의 주인은 전사가 아니라 시민이다.
광장은 이성을 통해 싸우는, 아니 싸운다기보다는 토론을 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광장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았다. 광장은 자기들만의 은신처가 아니며, 또한 전쟁터도 아니다. 공동체의 문제들이 불거질 때 우리는 실제로 무력을 사용해 전쟁하지는 않더라도 늘 전쟁 비유를 즐겨 사용해왔다. 그럴 때면 할 말이 많아지기도 한다. 전쟁은 바로 그 비유의 언어를 통해 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왔으며, 우리 앞에 있는 타인의 존재를 가려왔다. 하지만 광장에서의 토론은 분명 타협과 협력의 기쁨을 알게 할 것이고, 상호존중의 중요성을 알게 할 것이다. 전쟁에서는 원리상 타인의 입장을 고려할 수 없다. 하지만 타인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는 광장이란 정의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토론에서 타인의 입장을 언제나 고려해야 하는 한, 그러면서 서로 대화를 이끌고 가는 능력이 바로 이성인 한, 광장은 이성의 공간이다.
그 이성의 공간이 말 그대로 넓은 장일 필요는 없다. 술자리여도 상관은 없다.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하는 곳이면 어디든 광장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곳 어디든 전쟁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는 “광장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그 답이 주는 한 가지 선물은 저 유구한 전쟁과 전쟁 언어의 유혹에서 이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행복, 즉 아렌트가 말한 정치적 행복을 누릴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생각에 대한 생각 : 이성의 공간, 광장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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