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공원에서 가젤(영양) 한 마리에게 먹이를 주려 한다. 두툼한 빵을 찢어 조각낸 뒤 경계가 삼엄한 가젤에게 손을 내민다. 가젤은 재빨리 그의 손에 들린 빵을 물어뜯고는 고개를 숙여 들이받을 듯하다가 다시 한입을 뜯어먹고는 또 들이받을 태세를 취한다. 그는 야생 초원에서 노닐어야 할 그 가젤이 공원에 있는 게 신기하고 반갑다. 그때 가까운 길에서 시설 보수 작업을 하고 있던 아랍인 인부 하나가 묵직한 곡괭이를 내려놓더니 쭈뼛쭈뼛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그 아랍인은 놀란 듯이 가젤을 보다 빵을 보고, 빵을 보고 가젤을 본다. 생전 처음 보는 구경이란 듯이. 마침내 그 인부는 쑥스러운 듯 그와 가젤을 향해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 빵은 ‘나도’ 먹을 수 있는데.”
잠시 멈칫한 그는 아무 말 없이 가젤의 먹이, 즉 그 빵의 일부를 인부에게 건넨다. 빵을 받아든 인부는 자신의 옷 속 깊숙이 그 ‘먹이’를 감추고는 그에게서 멀어진다. (강조는 인용자.)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1938년 요양차 머물렀던 모로코의 도시 마라케시에서 겪었던 일화 중 하나로, 그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2010, 한겨레출판)의 ‘마라케시’ 편에 실린 이야기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당시 그 아랍인과 가젤과 빵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왜 여태 내게 머물러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더불어 기억되는 건 조지 오웰조차 이 에피소드를 문맥에 상관없이 써놓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왜 말하는 것인지, 그리하여 빵과 가젤과 인부가 그에게서 혹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놓지 않는다. 요컨대 이 짧은 에피소드는 마치 수채화 배경의 일부처럼 혹은 <동물의 왕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법칙의 한 장면처럼 글의 초반부에 덜렁,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와서 가만 생각해보면 오웰의 저 이야기는 인간 존엄에 대해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하는, 정체 모를 할 말을 차치하고서라도 대체로 씁쓸한 인상만을 남긴다.
이 표현은 좀 과할 수도 있겠다. 나는 영국인 소설가 오웰과 아랍인 인부가, 먹이를 손에 쥐고 있는 주인과 먹이 들린 손만을 노려보는 개처럼 보였다. 그의 손에서 먹이를 낚아채려는 가젤과 가만히 서서 쑥스럽게 ‘먹이’를 기다리는 인부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어서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인해 열악하고 척박해진 모로코에 머물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을 가로막고 있는―피부색에 의한―주종적 사회구조의 전복에 대해 일갈하고 있는 이 짧은 에세이에서, 오웰은 이 에피소드를 던져놓고 내빼버린 느낌이다(이건 나의 추정이다). 그러면서 이 글의 말미에서는 흑인 보병부대의 행렬을 이렇게 묘사한다.
“적대적이지도, 경멸적이지도, 부루퉁하지도, 탐색적이지도 않았다. (중략) 그는 백인종이 자신의 주인이라 배웠으며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흑인 군대의 행군을 보면 어떤 백인이든 품게 되는 생각이 하나 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저들을 골려 먹을 수 있을까? 얼마나 있으면 저들이 총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까?”
오웰은 그 부대 행렬을 보며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흑인 부대를 바라보는 백인들은 누구나 마음 한구석으로 그런 생각들일 거라고. 그것은 우리(백인) 모두가 알지만, 약아서 말은 안 하는 그런 유의 비밀일 거라고 말이다. 어쩌면 오웰은 이런―지배자의 시선으로써의―자각을 통해 그 제국주의의 몰락을 먼저 감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립(自立)’에 대해 생각했던 나는 오웰과 가젤과 빵과 아랍인을 떠올렸다. 자립에 대해 생각하면서 왜 제국주의 시절의 어느 영국인 소설가가 쓴 가젤과 인부와 빵 이야기가 떠오른 것일까. 아마도 그건 영국인이었던 오웰의 시선이 아닌 아랍인 인부가 빵을 물어뜯는 가젤과 자신을 같은 위치로 본 그의 ‘자각(自覺)’에 있지 않을까 싶다. 아랍인 인부의 자각은 가젤과 ‘나’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그 빵을 나도 먹을’ 수 있다는 자각, 가젤과 같은 위치에서 빵을 기다린다면 내게도 빵이 건네질 수 있다는 그 자각 말이다. 아마도 이 자각은 인용 중 “그 아랍인은 놀란 듯이 가젤을 보다 빵을 보고, 빵을 보고 가젤을 본다”에 있는 것 같다. 즉 그것은 빵과 가젤의 관계, 가젤과 ‘나’와의 관계, 빵과 ‘나’의 관계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말일 테다. 지배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인간 존엄과 주종관계 구조의 편편한 에피소드쯤 되겠으나 피지배자의 시선으로는 인간 존엄과 모욕이 거세된 생존 ‘자각’만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1938년 오웰의 저 이야기에서 아랍인 인부의 자각을 현재 대한민국에 포개놓고 싶다. 흔히 하는 말로 우리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고유명사 몇 개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3포 세대’와 ‘헬조선’이 그것이다. 나를 포함한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세대를 가리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라 칭한다. 또 그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들의 나라, 즉 이곳을 현재와 미래가 거세된 지옥이나 다름없는 ‘헬조선’이라 부른다. 1938년의 조지 오웰이 본 모로코 마라케시 공원의 인부와 현재 대한민국의 ‘3포 세대’들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이유는 바로 그 ‘자각’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스스로 서기 위한 방편으로 구조적 뒷받침이나 사회적 도움도 물론이거니와 앞서 ‘나’는 누구인지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혹은 ‘지금 이곳이’ 무엇인지를 자각하는 일, 그 일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을 벗어나는 실마리가 된다. 조지 오웰이 흑인 부대 행렬을 보며 느꼈을 또는 그 아랍인에게서 유의미하게 그 몰락의 시작을 감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에게서 불리고 있는 ‘3포 세대’ ‘헬조선’이란 말은 우리가 우리를 ‘자각’함과 동시에 그 사회에서 자립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라 말할 수 있겠다. 자각이 우리를 지금 이곳에서 ‘자립’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사는 세계를 지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중략) 지옥에 대한 자각만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게 한다. ‘헬조선’은 적어도 이 지옥이 자각된 곳이다.”
― 황현산, 경향신문 2015년 10월 14일 자
세계는 끊임없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역사와 개인이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개인으로서 때때로 불의의 사태로 자존감이 후퇴하기도 하지만, 아주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고 역사적으로는 후퇴하고 있으나 미래적으로는 발전하고 있다는 말쯤 되겠다. 맞는 말이다. 그럴 것이다. 그 말은 현재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추락하고 있는 걸 목도하고 있으나 그 추락은 추락이 아니기에 반갑다. 그러기에 우리 앞에 놓인 삶이, 역사가, 현실이 어쨌든 앞으로 가고는 있다는 그 말을 여전히 나는 믿고 싶을 뿐이다.
격월간 문학잡지『Axt』 편집장. 평상시에는 잡지 일을 한다. 그 일이 하기 싫을 때에는 종종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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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문文紋 : 그 말을 여전히 나는 믿고 싶을 뿐이다
백다흠
2016-09-21
그 말을 여전히 나는 믿고 싶을 뿐이다
그는 공원에서 가젤(영양) 한 마리에게 먹이를 주려 한다. 두툼한 빵을 찢어 조각낸 뒤 경계가 삼엄한 가젤에게 손을 내민다. 가젤은 재빨리 그의 손에 들린 빵을 물어뜯고는 고개를 숙여 들이받을 듯하다가 다시 한입을 뜯어먹고는 또 들이받을 태세를 취한다. 그는 야생 초원에서 노닐어야 할 그 가젤이 공원에 있는 게 신기하고 반갑다. 그때 가까운 길에서 시설 보수 작업을 하고 있던 아랍인 인부 하나가 묵직한 곡괭이를 내려놓더니 쭈뼛쭈뼛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그 아랍인은 놀란 듯이 가젤을 보다 빵을 보고, 빵을 보고 가젤을 본다. 생전 처음 보는 구경이란 듯이. 마침내 그 인부는 쑥스러운 듯 그와 가젤을 향해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 빵은 ‘나도’ 먹을 수 있는데.” 잠시 멈칫한 그는 아무 말 없이 가젤의 먹이, 즉 그 빵의 일부를 인부에게 건넨다. 빵을 받아든 인부는 자신의 옷 속 깊숙이 그 ‘먹이’를 감추고는 그에게서 멀어진다. (강조는 인용자.)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1938년 요양차 머물렀던 모로코의 도시 마라케시에서 겪었던 일화 중 하나로, 그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2010, 한겨레출판)의 ‘마라케시’ 편에 실린 이야기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당시 그 아랍인과 가젤과 빵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왜 여태 내게 머물러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더불어 기억되는 건 조지 오웰조차 이 에피소드를 문맥에 상관없이 써놓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왜 말하는 것인지, 그리하여 빵과 가젤과 인부가 그에게서 혹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놓지 않는다. 요컨대 이 짧은 에피소드는 마치 수채화 배경의 일부처럼 혹은 <동물의 왕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법칙의 한 장면처럼 글의 초반부에 덜렁,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와서 가만 생각해보면 오웰의 저 이야기는 인간 존엄에 대해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하는, 정체 모를 할 말을 차치하고서라도 대체로 씁쓸한 인상만을 남긴다. 이 표현은 좀 과할 수도 있겠다. 나는 영국인 소설가 오웰과 아랍인 인부가, 먹이를 손에 쥐고 있는 주인과 먹이 들린 손만을 노려보는 개처럼 보였다. 그의 손에서 먹이를 낚아채려는 가젤과 가만히 서서 쑥스럽게 ‘먹이’를 기다리는 인부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어서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인해 열악하고 척박해진 모로코에 머물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을 가로막고 있는―피부색에 의한―주종적 사회구조의 전복에 대해 일갈하고 있는 이 짧은 에세이에서, 오웰은 이 에피소드를 던져놓고 내빼버린 느낌이다(이건 나의 추정이다). 그러면서 이 글의 말미에서는 흑인 보병부대의 행렬을 이렇게 묘사한다.
“적대적이지도, 경멸적이지도, 부루퉁하지도, 탐색적이지도 않았다. (중략) 그는 백인종이 자신의 주인이라 배웠으며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흑인 군대의 행군을 보면 어떤 백인이든 품게 되는 생각이 하나 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저들을 골려 먹을 수 있을까? 얼마나 있으면 저들이 총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까?”
오웰은 그 부대 행렬을 보며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흑인 부대를 바라보는 백인들은 누구나 마음 한구석으로 그런 생각들일 거라고. 그것은 우리(백인) 모두가 알지만, 약아서 말은 안 하는 그런 유의 비밀일 거라고 말이다. 어쩌면 오웰은 이런―지배자의 시선으로써의―자각을 통해 그 제국주의의 몰락을 먼저 감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립(自立)’에 대해 생각했던 나는 오웰과 가젤과 빵과 아랍인을 떠올렸다. 자립에 대해 생각하면서 왜 제국주의 시절의 어느 영국인 소설가가 쓴 가젤과 인부와 빵 이야기가 떠오른 것일까. 아마도 그건 영국인이었던 오웰의 시선이 아닌 아랍인 인부가 빵을 물어뜯는 가젤과 자신을 같은 위치로 본 그의 ‘자각(自覺)’에 있지 않을까 싶다. 아랍인 인부의 자각은 가젤과 ‘나’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그 빵을 나도 먹을’ 수 있다는 자각, 가젤과 같은 위치에서 빵을 기다린다면 내게도 빵이 건네질 수 있다는 그 자각 말이다. 아마도 이 자각은 인용 중 “그 아랍인은 놀란 듯이 가젤을 보다 빵을 보고, 빵을 보고 가젤을 본다”에 있는 것 같다. 즉 그것은 빵과 가젤의 관계, 가젤과 ‘나’와의 관계, 빵과 ‘나’의 관계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말일 테다. 지배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인간 존엄과 주종관계 구조의 편편한 에피소드쯤 되겠으나 피지배자의 시선으로는 인간 존엄과 모욕이 거세된 생존 ‘자각’만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1938년 오웰의 저 이야기에서 아랍인 인부의 자각을 현재 대한민국에 포개놓고 싶다. 흔히 하는 말로 우리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고유명사 몇 개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3포 세대’와 ‘헬조선’이 그것이다. 나를 포함한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세대를 가리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라 칭한다. 또 그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들의 나라, 즉 이곳을 현재와 미래가 거세된 지옥이나 다름없는 ‘헬조선’이라 부른다. 1938년의 조지 오웰이 본 모로코 마라케시 공원의 인부와 현재 대한민국의 ‘3포 세대’들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이유는 바로 그 ‘자각’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스스로 서기 위한 방편으로 구조적 뒷받침이나 사회적 도움도 물론이거니와 앞서 ‘나’는 누구인지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혹은 ‘지금 이곳이’ 무엇인지를 자각하는 일, 그 일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을 벗어나는 실마리가 된다. 조지 오웰이 흑인 부대 행렬을 보며 느꼈을 또는 그 아랍인에게서 유의미하게 그 몰락의 시작을 감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에게서 불리고 있는 ‘3포 세대’ ‘헬조선’이란 말은 우리가 우리를 ‘자각’함과 동시에 그 사회에서 자립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라 말할 수 있겠다. 자각이 우리를 지금 이곳에서 ‘자립’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사는 세계를 지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중략) 지옥에 대한 자각만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게 한다. ‘헬조선’은 적어도 이 지옥이 자각된 곳이다.” ― 황현산, 경향신문 2015년 10월 14일 자
세계는 끊임없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역사와 개인이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개인으로서 때때로 불의의 사태로 자존감이 후퇴하기도 하지만, 아주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고 역사적으로는 후퇴하고 있으나 미래적으로는 발전하고 있다는 말쯤 되겠다. 맞는 말이다. 그럴 것이다. 그 말은 현재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추락하고 있는 걸 목도하고 있으나 그 추락은 추락이 아니기에 반갑다. 그러기에 우리 앞에 놓인 삶이, 역사가, 현실이 어쨌든 앞으로 가고는 있다는 그 말을 여전히 나는 믿고 싶을 뿐이다.
격월간 문학잡지『Axt』 편집장. 평상시에는 잡지 일을 한다. 그 일이 하기 싫을 때에는 종종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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