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우리는 두 갈래의 시작을 상상하고 나눈다. 기원적 시작과 새로운 시작. 모든 시작의 처음이자 모델이 기원적 시작이라면, 그것의 반복이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은 그것이 반복인 한에서 모순적이다. 새롭지만 반복이며, 반복이지만 새로운 게 새로운 시작이다. 그럼에도 ‘새로움’에 값한다면, 거기엔 새롭게 하려는 의지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지의 유무에 따라서도 시작을 구분할 수도 있겠다. 수동적 시작과 능동적 시작으로. ‘시작된다’의 시작과 ‘시작한다’의 시작으로. 시작의 윤곽은 거기까지만 그리기로 한다. 내가 적으려는 것은 시작에 관한 에세이가 아니니까. 내가 받은 주문대로 나는 다만 몇 권의 책에서, 몇 권의 소설에서 시작의 장면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시작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시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말해보려고 한다. 어디부터, 무엇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무언가가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시작’이란 단어에 관해, 기억 속에서 무얼 끄집어낼 수 있을까.
▲ⓒ문학동네
알베르 카뮈, 『페스트』의 시작
제일 처음 떠올리는 건 의사 베르나르 리외가 기록하고 있는 오랑 시의 연대기다. 오랑은 평범한 도시이고 알제리 해안에 위치한 프랑스의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 아, 이 연대기는 알제리가 프랑스가 독립하기 이전에 쓰인 것이기에 그렇다. 그는 194×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다. 시작은 그랬다.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진료실에서 나오다가 층계참 한가운데서 죽은 쥐 한 마리를 밟았다.”
사소한 사건이지만 이후 중대한 사건들을 예고하는 표지의 하나였다. 쥐가 없는 건물에 죽은 쥐가 놓여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리외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장난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귀가길 아파트 복도에서 그는 한 번 더 쥐와 마주친다. 큰 쥐 한 마리가 비틀거리더니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는 것을 목격한다. 곧 쥐는 오랑 시 전체의 문제가 된다. 18일부터는 공장과 창고에서 수백 마리의 죽은 쥐가 쏟아져 나오고 이것은 페스트라는 재앙의 징후였다.
1947년에 발표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 페스트는 전쟁, 구체적으로는 2차세계대전의 은유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도 많이 발생했다.”고 리외(혹은 카뮈)는 적었다. 사망자가 발생하고 조기에 종결될 것 같지 않자 결국 오랑 시는 폐쇄된다. “페스트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는 결정과 함께 국면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곧 감옥살이의 시작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하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프랑스 국민들의 처지는, 페스트 때문에 감옥살이가 시작된 오랑 시민들의 모습과 중첩된다. 두 경우 모두 속수무책으로 재앙을 버텨낼 수밖에 없었다. 의사 리외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다만 페스트에,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그의 유일한 선택이자 윤리였다.
오랑 시의 페스트는 느닷없이 시작되었다가 갑자기 수그러든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 난 뒤이지만 페스트에서 해방되자 도시는 생기를 회복하고 기쁨에 젖어든다. 다시 삶이 시작된다. 다만 리외는 신중한 의사로서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페스트는 언젠가 또다시 찾아올 수 있으며, 그때는 또 다른 감옥살이가 시작되리라.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 ⓒ해냄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의 시작
느닷없는 시작의 사례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1995)』에서도 읽을 수 있다. 도심 한가운데서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음에도 중간 차선의 차 한 대가 출발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다른 운전자들이 내려서 상황을 알아보는데, 문제의 운전자는 “눈이 안 보여.”라고 말한다. 그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갑작스레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 ‘백색 실명’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연이어 그와 접촉했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실명하면서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 간다. 아이러니하게, ‘눈이 멀게 된’ 안과 의사의 아내만을 제외하고.
백색 실명이 마치 페스트처럼 번져가자, 초기 환자들은 수용소에 수용된다.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수용소는 눈먼 깡패들에 의한 생지옥으로 변한다.
그러다 오랑 시가 갑자기 페스트에서 해방되듯이 눈먼 자들의 도시도 어느 순간 백색 실명에서 벗어난다. 사라마구는 의사 아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두 종류의 눈먼 자들이 있다. 보지 못하는 자(맹인)들과, 볼 수 있지만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자들 역시 눈먼 자들과 다를 바 없다. 되짚어보면 생지옥이 된 눈먼 자들의 수용소는 20세기 역사 속의 수많은 수용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백 만의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에 수용되었고 학살되었다. 마치 눈먼 자들처럼, 짐승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사라마구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다시 시력을 되찾은 사람들은 이제 그런 역사와 작별할 수 있을까. 제대로 눈뜬 자가 될 수 있을까.
▲ ⓒ민음사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의 시작
시작은 불시에 들이닥친 재앙과 더불어 시작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특정한 계기를 갖기도 한다. ‘새로운 인생’으로서의 시작.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유죄 선고를 받고 여러 차례의 탈옥 시도까지 가중 처벌되어 19년의 감옥살이 끝에 출소한 장발장의 경우를 보자. 그는 “너는 자유다.”란 말과 함께 출옥하면서 새로운 생애가 열리리라 믿었다. 하지만 전과자를 뜻하는 노란 통행권이 첨부된 자유는, 또다른 감시와 차별의 연장일 뿐이었다. 아무도 숙소를 제공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미리엘 주교의 도움을 얻어 성당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장발장이 떠난 아침, 주교관의 사람들은 은그릇 바구니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가서 절도 혐의자로 헌병에게 붙들려온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아! 당신이구려! 당신을 보니 기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오? 나는 당신에게 촛대도 드렸는데, 그것도 다른 것과 마찬가질 은이니, 200프랑은 능히 받을 수 있을 거요. 어째서 그것도 그 식기들과 가져가기 않았소?”
주교는 장발장의 처지를 짐작하여 그가 은그릇과 은촛대를 선물로 주었다고 얘기한 것이다. 장발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존경스러운 주교를 바라본다. 주교가 그에게 건네는 말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살라는 약조다.
“잊지 마시오. 결코 잊지 마시오. 이 은을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쓰겠다고 내게 약속한 일을.”
프랑스 혁명기를 다룬 위고의 대작 『레미제라블(1862)』은 그렇듯 미리엘 주교와 약조를 맺은 장발장의 갱생, 즉 새로운 인생의 이야기다. 미리엘 주교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장발의 새로운 시작은 가능하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감옥생활이 이어졌을 것이다. 선의 감화를 통해서만 선은 그 계기를 얻는다.
▲ ⓒ민음사
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의 시작
새로운 시작의 계기는 한 권의 책이 마련해줄 수도 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로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1994)』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 권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또 다른 세계로 빨려들어간다. 책은 평범한 물건에 지나지 않지만 사랑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힘으로 삶을 바꿔놓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때 인생은 어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 자전적 성격의 이 소설에서 파묵이 그린 새로운 인생은 작가의 삶이다. 한 권의 책에 이끌려 또 다른 책을 쓰게 된 운명이 곧 작가의 운명 아닌가.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뀐 한 인물이 화자인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나의 새로운 인생은 규칙적이고 질서 있고 정확해. 매일 아침 9시쯤 찻집에서 나와 집으로, 내 책상으로 돌아와. 9시가 되면 책상에 앉아 커피도 준비해놓은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지.”
덧붙여,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내 생각에는 쓰는 것이 좋고 즐겁다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해. 쓸 수 있을 때까지 써야 한다고 생각해. 인생은 짧으니까.”
다니던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젊은 파묵이야말로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경우가 아닐까.
아마도 이런 시작의 이야기들은 한참 더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당신의 시작을 유예시킨다면, 이쯤에서 멈춰도 좋겠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새로운 시작이니까.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및 세계 문학,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서평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은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1,000명 이상으로, 인문학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책을 읽을 자유』(2010년 한국출판평론상 수상),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아주 사적인 독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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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바벨의 도서관 : 새로운 인생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 소설 속 '시작'에 관한 노트
이현우(로쟈)
2016-01-22
바벨의 도서관
새로운 인생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시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우리는 두 갈래의 시작을 상상하고 나눈다. 기원적 시작과 새로운 시작. 모든 시작의 처음이자 모델이 기원적 시작이라면, 그것의 반복이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은 그것이 반복인 한에서 모순적이다. 새롭지만 반복이며, 반복이지만 새로운 게 새로운 시작이다. 그럼에도 ‘새로움’에 값한다면, 거기엔 새롭게 하려는 의지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지의 유무에 따라서도 시작을 구분할 수도 있겠다. 수동적 시작과 능동적 시작으로. ‘시작된다’의 시작과 ‘시작한다’의 시작으로. 시작의 윤곽은 거기까지만 그리기로 한다. 내가 적으려는 것은 시작에 관한 에세이가 아니니까. 내가 받은 주문대로 나는 다만 몇 권의 책에서, 몇 권의 소설에서 시작의 장면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시작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시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말해보려고 한다. 어디부터, 무엇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무언가가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시작’이란 단어에 관해, 기억 속에서 무얼 끄집어낼 수 있을까.
▲ⓒ문학동네
알베르 카뮈, 『페스트』의 시작
제일 처음 떠올리는 건 의사 베르나르 리외가 기록하고 있는 오랑 시의 연대기다. 오랑은 평범한 도시이고 알제리 해안에 위치한 프랑스의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 아, 이 연대기는 알제리가 프랑스가 독립하기 이전에 쓰인 것이기에 그렇다. 그는 194×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다. 시작은 그랬다.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진료실에서 나오다가 층계참 한가운데서 죽은 쥐 한 마리를 밟았다.” 사소한 사건이지만 이후 중대한 사건들을 예고하는 표지의 하나였다. 쥐가 없는 건물에 죽은 쥐가 놓여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리외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장난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귀가길 아파트 복도에서 그는 한 번 더 쥐와 마주친다. 큰 쥐 한 마리가 비틀거리더니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는 것을 목격한다. 곧 쥐는 오랑 시 전체의 문제가 된다. 18일부터는 공장과 창고에서 수백 마리의 죽은 쥐가 쏟아져 나오고 이것은 페스트라는 재앙의 징후였다. 1947년에 발표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 페스트는 전쟁, 구체적으로는 2차세계대전의 은유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도 많이 발생했다.”고 리외(혹은 카뮈)는 적었다. 사망자가 발생하고 조기에 종결될 것 같지 않자 결국 오랑 시는 폐쇄된다. “페스트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는 결정과 함께 국면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곧 감옥살이의 시작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하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프랑스 국민들의 처지는, 페스트 때문에 감옥살이가 시작된 오랑 시민들의 모습과 중첩된다. 두 경우 모두 속수무책으로 재앙을 버텨낼 수밖에 없었다. 의사 리외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다만 페스트에,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그의 유일한 선택이자 윤리였다. 오랑 시의 페스트는 느닷없이 시작되었다가 갑자기 수그러든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 난 뒤이지만 페스트에서 해방되자 도시는 생기를 회복하고 기쁨에 젖어든다. 다시 삶이 시작된다. 다만 리외는 신중한 의사로서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페스트는 언젠가 또다시 찾아올 수 있으며, 그때는 또 다른 감옥살이가 시작되리라.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 ⓒ해냄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의 시작
느닷없는 시작의 사례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1995)』에서도 읽을 수 있다. 도심 한가운데서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음에도 중간 차선의 차 한 대가 출발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다른 운전자들이 내려서 상황을 알아보는데, 문제의 운전자는 “눈이 안 보여.”라고 말한다. 그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갑작스레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 ‘백색 실명’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연이어 그와 접촉했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실명하면서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 간다. 아이러니하게, ‘눈이 멀게 된’ 안과 의사의 아내만을 제외하고. 백색 실명이 마치 페스트처럼 번져가자, 초기 환자들은 수용소에 수용된다.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수용소는 눈먼 깡패들에 의한 생지옥으로 변한다.
그러다 오랑 시가 갑자기 페스트에서 해방되듯이 눈먼 자들의 도시도 어느 순간 백색 실명에서 벗어난다. 사라마구는 의사 아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두 종류의 눈먼 자들이 있다. 보지 못하는 자(맹인)들과, 볼 수 있지만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자들 역시 눈먼 자들과 다를 바 없다. 되짚어보면 생지옥이 된 눈먼 자들의 수용소는 20세기 역사 속의 수많은 수용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백 만의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에 수용되었고 학살되었다. 마치 눈먼 자들처럼, 짐승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사라마구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다시 시력을 되찾은 사람들은 이제 그런 역사와 작별할 수 있을까. 제대로 눈뜬 자가 될 수 있을까.
▲ ⓒ민음사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의 시작
시작은 불시에 들이닥친 재앙과 더불어 시작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특정한 계기를 갖기도 한다. ‘새로운 인생’으로서의 시작.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유죄 선고를 받고 여러 차례의 탈옥 시도까지 가중 처벌되어 19년의 감옥살이 끝에 출소한 장발장의 경우를 보자. 그는 “너는 자유다.”란 말과 함께 출옥하면서 새로운 생애가 열리리라 믿었다. 하지만 전과자를 뜻하는 노란 통행권이 첨부된 자유는, 또다른 감시와 차별의 연장일 뿐이었다. 아무도 숙소를 제공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미리엘 주교의 도움을 얻어 성당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장발장이 떠난 아침, 주교관의 사람들은 은그릇 바구니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가서 절도 혐의자로 헌병에게 붙들려온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아! 당신이구려! 당신을 보니 기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오? 나는 당신에게 촛대도 드렸는데, 그것도 다른 것과 마찬가질 은이니, 200프랑은 능히 받을 수 있을 거요. 어째서 그것도 그 식기들과 가져가기 않았소?”
주교는 장발장의 처지를 짐작하여 그가 은그릇과 은촛대를 선물로 주었다고 얘기한 것이다. 장발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존경스러운 주교를 바라본다. 주교가 그에게 건네는 말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살라는 약조다. “잊지 마시오. 결코 잊지 마시오. 이 은을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쓰겠다고 내게 약속한 일을.” 프랑스 혁명기를 다룬 위고의 대작 『레미제라블(1862)』은 그렇듯 미리엘 주교와 약조를 맺은 장발장의 갱생, 즉 새로운 인생의 이야기다. 미리엘 주교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장발의 새로운 시작은 가능하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감옥생활이 이어졌을 것이다. 선의 감화를 통해서만 선은 그 계기를 얻는다.
▲ ⓒ민음사
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의 시작
새로운 시작의 계기는 한 권의 책이 마련해줄 수도 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로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1994)』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 권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또 다른 세계로 빨려들어간다. 책은 평범한 물건에 지나지 않지만 사랑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힘으로 삶을 바꿔놓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때 인생은 어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 자전적 성격의 이 소설에서 파묵이 그린 새로운 인생은 작가의 삶이다. 한 권의 책에 이끌려 또 다른 책을 쓰게 된 운명이 곧 작가의 운명 아닌가.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뀐 한 인물이 화자인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나의 새로운 인생은 규칙적이고 질서 있고 정확해. 매일 아침 9시쯤 찻집에서 나와 집으로, 내 책상으로 돌아와. 9시가 되면 책상에 앉아 커피도 준비해놓은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지.” 덧붙여,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내 생각에는 쓰는 것이 좋고 즐겁다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해. 쓸 수 있을 때까지 써야 한다고 생각해. 인생은 짧으니까.” 다니던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젊은 파묵이야말로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경우가 아닐까. 아마도 이런 시작의 이야기들은 한참 더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당신의 시작을 유예시킨다면, 이쯤에서 멈춰도 좋겠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새로운 시작이니까.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및 세계 문학,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서평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은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1,000명 이상으로, 인문학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책을 읽을 자유』(2010년 한국출판평론상 수상),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아주 사적인 독서』 등을 썼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시작] 바벨의 도서관 : 새로운 인생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 소설 속 '시작'에 관한 노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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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이야기 : 폭염 속의 깨달음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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