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을 A라고 하자. A는 밖에 있으면 늘 자기의 방과 방의 이불과 그 위에 누운 자신을 그리워한다. 다른 누군가를, 먼 곳을, 특별한 때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늘 잠자는 이불 위를, 매일 누울 수 있는 그곳을 그리워한다. A는 그곳을 벗어나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어릴 적 본 TV 드라마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부모 잃은 어린 형제가 부모의 무덤을 보러 갔다 돌아오는 버스 안이다. 아픈 동생이 열에 들떠 중얼거린다. 형은 동생의 목에 머플러를 둘러주고 머플러를 입까지 끌어올려 기침 하는 동생의 입을 가린다.
형아.
동생은 말한다.
입 다물어. 말하지 마. 기침하잖아.
형이 말한다.
형아, 그게 아니고…….
열에 들떠 힘없는 목소리로 동생이 말한다.
형아, 우리 이제 집에 가자.
뭐라고?
우리 그러지 말고…… 이제…… 집에 가자…….
형이 놀란다. 동생이 말하는 '집'은 어디일까. 집에 가고 있는데도 왜 동생은 ‘집’에 가자고 하는 것일까.
형아…… 이제…… 집에 가자…….
그 말을 끝으로 동생은 실신한다. 형은 그제야 동생의 병이 단지 감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급히 동생을 병원으로 옮기지만 결국 동생은 죽고 만다. 형은 홀로 집에 돌아가 동생이 가버린 ‘집’에 대해 생각한다. 언젠가 형도 가야하는 집,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하는 그곳.
내 기억의 '집’은 이런 모습이다. 드라마 속 아픈 동생이 마지막 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집, 언제 어디서든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다 말하는 A의 집. 조금 과장해 말한다면 그 집이란 외부와 차단되어 있으며 그곳에 머무는 동안만은 어느 정도 죽어 있어도 좋은 곳이다.
그 죽음이란 휴식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그 휴식이 꿈 없는 잠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TV 드라마 보기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겐 어제 번 돈과 오늘 번 돈을 계산해보는 시간일 수도 있다. 나에게 휴식이란 충분한 음악과 충분한 생각과 충분한 독서를 하는 것이다. 충분히 혼자 있음.
무엇보다 내게 충분히 필요한 것은 내 신체적 습관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지속하는 것이다. 그 신체적 습관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손톱 물어뜯기나 아랫입술 깨물기, 고양이털 만지기 같은 반복적이고 촉각적인 습관의 일종이라고만 말해두어야겠다.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아무 것에도 집중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이 습관을 끝없이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나에게 집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나의 이런 습관을 장시간 참아주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집의 중요한 조건은 나를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숨겨줄 만한 벽과 동시에 내가 폐쇄공포증을 느끼지 않을 만한 창의 적절한 배치다. 때때로 그 창은 언제나 커튼으로 가려져 있겠지만.
#2.
밤낮으로 커튼을 닫아두고 지냈던 때가 있다. 내가 머물던 곳은 서울의 한 호텔이었다. 호텔치고는 그리 고층은 아니었지만 살면서 2층이나 3층, 높아봐야 5층을 오가며 지냈던 나는 11층이란 높이에 당황했다. 물론 몇 년 간 옥탑방에 살며 나름대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경험한 적도 있지만 다세대 빌라의 옥탑과 도심 한 가운데의 11층은 내려다보이는 풍경과 그 풍경이 주는 느낌이 달랐다. 간단히 말해 떨어지면 운 좋게 살아남을 수도 있는 높이와 떨어지면 끝장인 높이의 차이라고 할까.
나에게는 약간의 폐쇄공포증과 함께 그보다 약간 더 큰 비중으로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런데 11층 호텔 룸에서 내가 느낀 공포는 이제껏 느낀 고소공포증과 달랐다. 나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까 봐 무서운 게 아니었다. 불시에 어떤 추락이 나에게 닥칠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추락을 내가 손수 실행할까 봐 두려웠다. 이런 말을 써도 된다면, 나는 11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순간 뛰어내리고 싶었다. 추락하고 싶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의 나라면 그 추락의 충동을 이기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나는 창가에서 등을 돌렸다. 커튼을 치고 그곳에 머무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고층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에게 피해야 할 주거장소였다. 문득 저 밑으로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거라는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층에 살아도 좋겠지만 나는 그런 쪽으로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때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혼자 있는 호텔 방에서도 혼자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제껏 그 방에 머물렀던 사람들과 앞으로 그 방에 머물 사람들이 모두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종류의 익명성은 내가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지만 나는 마치 빠른 속력으로 철길을 지나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된 것처럼 나 자신을 빠르고 간단히 스쳐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질량으로 만들었다. 쉽게 말해 내 물건을 최소화하고 방 안에서의 내 활동 반경을 최소화 한 것이다.
나는 그 방에서 낮과 밤을 줄곧 혼자 보냈지만 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처럼 굴었다. 함께 있다기보다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실내는 언제나 깨끗하게 정돈했고 몇 안 되는 나의 물건들은 서랍에 넣어 두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했다. 가끔 찬 음료수에서 생긴 물방울이 테이블 위에 얼룩을 남기면 곧바로 티슈로 닦아내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느 곳에 머물더라도 이런 식의 행동양태를 보일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곳이든 자신의 집처럼 공간에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영역이라 부여받은 공간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처럼 굴며 공간의 눈치를 보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호텔을 나오기 전 우연히 같은 호텔에 머무는 다른 사람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방의 주인을 B라고 하자. B의 방은 내 방과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가구들이 있었지만 내 방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곳은 놀랍도록 B만의 방이었다. B가 집에서 가져온 가구와 소품들, 꼭 필요한 사물들이 B의 동선과 시선에 맞게 놓여 있었다. 나는 B의 용기와 신뢰가 부러웠다. B는 자신을 믿었고 자신의 사물들을 믿었으며 그 믿음 안에서 편안해보였다. 무엇보다 B의 방의 커튼은 활짝 쳐져 있었다. 바깥으로 열린 창으로 여름의 빛이 비치고 흰 커튼을 흔드는 바람이 불어왔다. B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 만한 자격을 갖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를 기준으로 두고 집이 갖춰야 할 조건만을 생각했다. 집의 입장에서도 자기 안에 들일만 한 사람을 고르는 조건이 있지 않을까. 월수입, 부양가족 수, 등본상의 주소 따위 말고도, 집의 입장에서 봤을 때 들이고 싶은 사람과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나는 어느 쪽일까. 부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은 아니길 바라지만 집의 입장도 있으니 내 마음만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집의 입장
어쩌면 집에도 그만의 입장이, 기호가 있을지도 모른다.
인문쟁이 김은영
2019-09-04
#1.
언제나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을 A라고 하자. A는 밖에 있으면 늘 자기의 방과 방의 이불과 그 위에 누운 자신을 그리워한다. 다른 누군가를, 먼 곳을, 특별한 때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늘 잠자는 이불 위를, 매일 누울 수 있는 그곳을 그리워한다. A는 그곳을 벗어나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어릴 적 본 TV 드라마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부모 잃은 어린 형제가 부모의 무덤을 보러 갔다 돌아오는 버스 안이다. 아픈 동생이 열에 들떠 중얼거린다. 형은 동생의 목에 머플러를 둘러주고 머플러를 입까지 끌어올려 기침 하는 동생의 입을 가린다.
형아.
동생은 말한다.
입 다물어. 말하지 마. 기침하잖아.
형이 말한다.
형아, 그게 아니고…….
열에 들떠 힘없는 목소리로 동생이 말한다.
형아, 우리 이제 집에 가자.
뭐라고?
우리 그러지 말고…… 이제…… 집에 가자…….
형이 놀란다. 동생이 말하는 '집'은 어디일까. 집에 가고 있는데도 왜 동생은 ‘집’에 가자고 하는 것일까.
형아…… 이제…… 집에 가자…….
그 말을 끝으로 동생은 실신한다. 형은 그제야 동생의 병이 단지 감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급히 동생을 병원으로 옮기지만 결국 동생은 죽고 만다. 형은 홀로 집에 돌아가 동생이 가버린 ‘집’에 대해 생각한다. 언젠가 형도 가야하는 집,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하는 그곳.
내 기억의 '집’은 이런 모습이다. 드라마 속 아픈 동생이 마지막 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집, 언제 어디서든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다 말하는 A의 집. 조금 과장해 말한다면 그 집이란 외부와 차단되어 있으며 그곳에 머무는 동안만은 어느 정도 죽어 있어도 좋은 곳이다.
그 죽음이란 휴식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그 휴식이 꿈 없는 잠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TV 드라마 보기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겐 어제 번 돈과 오늘 번 돈을 계산해보는 시간일 수도 있다. 나에게 휴식이란 충분한 음악과 충분한 생각과 충분한 독서를 하는 것이다. 충분히 혼자 있음.
무엇보다 내게 충분히 필요한 것은 내 신체적 습관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지속하는 것이다. 그 신체적 습관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손톱 물어뜯기나 아랫입술 깨물기, 고양이털 만지기 같은 반복적이고 촉각적인 습관의 일종이라고만 말해두어야겠다.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아무 것에도 집중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이 습관을 끝없이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나에게 집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나의 이런 습관을 장시간 참아주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집의 중요한 조건은 나를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숨겨줄 만한 벽과 동시에 내가 폐쇄공포증을 느끼지 않을 만한 창의 적절한 배치다. 때때로 그 창은 언제나 커튼으로 가려져 있겠지만.
#2.
밤낮으로 커튼을 닫아두고 지냈던 때가 있다. 내가 머물던 곳은 서울의 한 호텔이었다. 호텔치고는 그리 고층은 아니었지만 살면서 2층이나 3층, 높아봐야 5층을 오가며 지냈던 나는 11층이란 높이에 당황했다. 물론 몇 년 간 옥탑방에 살며 나름대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경험한 적도 있지만 다세대 빌라의 옥탑과 도심 한 가운데의 11층은 내려다보이는 풍경과 그 풍경이 주는 느낌이 달랐다. 간단히 말해 떨어지면 운 좋게 살아남을 수도 있는 높이와 떨어지면 끝장인 높이의 차이라고 할까.
나에게는 약간의 폐쇄공포증과 함께 그보다 약간 더 큰 비중으로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런데 11층 호텔 룸에서 내가 느낀 공포는 이제껏 느낀 고소공포증과 달랐다. 나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까 봐 무서운 게 아니었다. 불시에 어떤 추락이 나에게 닥칠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추락을 내가 손수 실행할까 봐 두려웠다. 이런 말을 써도 된다면, 나는 11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순간 뛰어내리고 싶었다. 추락하고 싶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의 나라면 그 추락의 충동을 이기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나는 창가에서 등을 돌렸다. 커튼을 치고 그곳에 머무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고층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에게 피해야 할 주거장소였다. 문득 저 밑으로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거라는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층에 살아도 좋겠지만 나는 그런 쪽으로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때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혼자 있는 호텔 방에서도 혼자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제껏 그 방에 머물렀던 사람들과 앞으로 그 방에 머물 사람들이 모두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종류의 익명성은 내가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지만 나는 마치 빠른 속력으로 철길을 지나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된 것처럼 나 자신을 빠르고 간단히 스쳐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질량으로 만들었다. 쉽게 말해 내 물건을 최소화하고 방 안에서의 내 활동 반경을 최소화 한 것이다.
나는 그 방에서 낮과 밤을 줄곧 혼자 보냈지만 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처럼 굴었다. 함께 있다기보다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실내는 언제나 깨끗하게 정돈했고 몇 안 되는 나의 물건들은 서랍에 넣어 두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했다. 가끔 찬 음료수에서 생긴 물방울이 테이블 위에 얼룩을 남기면 곧바로 티슈로 닦아내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느 곳에 머물더라도 이런 식의 행동양태를 보일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곳이든 자신의 집처럼 공간에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영역이라 부여받은 공간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처럼 굴며 공간의 눈치를 보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호텔을 나오기 전 우연히 같은 호텔에 머무는 다른 사람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방의 주인을 B라고 하자. B의 방은 내 방과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가구들이 있었지만 내 방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곳은 놀랍도록 B만의 방이었다. B가 집에서 가져온 가구와 소품들, 꼭 필요한 사물들이 B의 동선과 시선에 맞게 놓여 있었다. 나는 B의 용기와 신뢰가 부러웠다. B는 자신을 믿었고 자신의 사물들을 믿었으며 그 믿음 안에서 편안해보였다. 무엇보다 B의 방의 커튼은 활짝 쳐져 있었다. 바깥으로 열린 창으로 여름의 빛이 비치고 흰 커튼을 흔드는 바람이 불어왔다. B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 만한 자격을 갖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를 기준으로 두고 집이 갖춰야 할 조건만을 생각했다. 집의 입장에서도 자기 안에 들일만 한 사람을 고르는 조건이 있지 않을까. 월수입, 부양가족 수, 등본상의 주소 따위 말고도, 집의 입장에서 봤을 때 들이고 싶은 사람과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나는 어느 쪽일까. 부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은 아니길 바라지만 집의 입장도 있으니 내 마음만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2019 [인문쟁이 5기]
서울에 살며 일하고 글 쓰는 사람. 비와 냉면을 좋아하고 자서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집의 입장'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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