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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와 총각

국민학생 시절, ‘나’의 삶이 아닌 ‘우리’의 삶을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다

황진영

2019-07-17



‘천사를 찾아 사바 사바 사바...’

받아쓰기 시험을 보기 시작한 내 나이 여덟.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며 손바닥으로 엉덩이가 시뻘게지도록 치고 다녔던 그 해. 

1995년이었다. 아직은 ‘국민학교’ 시절이었던 때였다. 국민학교 1학년생의 위치는 참으로 애매했다. 유치원을 갓 졸업한 위풍당당 어린이 대열에 합류한 신세대요, 5,6학년 언니 오빠들에겐 여전히 코찔찔이 애송이일 뿐이었다. 나는 특히나 그랬다. 아니, 한 반 뿐이던 우리 반 전체가 애송이였다. 대성이와 주희가 전학 오기 전까지는. 


MODERN BOY PRETTY GIRL 같은 반에 얼굴 하얀 도시 남자애와 치아교정기까지 예뻐보이는 여자애가 전학을 오고나서, 내 초등학교 일학년의 일상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illustration Kim Jina


서울에서 인천으로 전학 온, 새하얀 피부의 대성이는 말끔한 정장 재킷에 노란색 나비넥타이를 하고 우리와 처음 만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선 제 생일 초대장을 직접 만들어 전해주던 우리 반의 모던보이. 대성이가 내 8년 인생의 신세계였다면, 주희는 내게 방아쇠 같은 존재였다. 머슴밥을 먹으며 땡볕에 ‘오징어 달구지’놀이로 체력을 다지며 씩씩하고 까무잡잡했던 내 모습과는 달리, 여리 여리하고 청바지에 티만 입어도 예쁜 아이. 무엇보다, 그 아이 치아에 가지런히 붙어있던 그깟 교정기까지 예뻐 보였다. 어린이로서 신입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함께 본분을 다하며 지내왔는데 고 계집애가 불현듯 나타나 특별한 경쟁심에 불을 붙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 아빠, 할머니가 친척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부산스럽게 외출 준비를 하셨다. 엄마는 내게 얼른 준비하라며 채근하셨지만 난 가지 않겠다며 동행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잔치음식보다 소중했던 <디즈니 만화동산>이 나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홀가분하게 큰 꼬리(나)와 작은 꼬리(남동생)를 집에 놔두기로 하셨다. 만화를 기다리며 텔레비전 앞에서 대기를 타던 나는 옆에서 화장하는 엄마를 나도 모르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을 잘 안했던 평소의 우리 엄만 그저 내 사랑하는 우리 엄마였을 뿐인데, 화장품 몇 개를 푹푹 찍어 바르더니 조금은 낯설면서도 매력적이고 세련된 아가씨로 변해 방을 나갔다. 내가 뭘 본 걸까. 어쩌면 세일러문의 변신은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인지도 모른다. 그날따라 인어공주의 에리얼은 어찌나 예쁘게 보이던지. 나도 특별해 질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세일러문처럼 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날, 나는 엄마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고  남동생은 아빠의 양복을 꺼내입고 어른 흉내를 낸다.  illustration Kim Jina


마침 빗자루 들고 쫓아올 사람도 없겠다, 결국 절대 손대서는 안 될 물건에 흔적을 잔뜩 남기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어깨너머 배운 솜씨로 얼굴을 도화지 삼아 이것저것 그리고 색칠했다. 안방 장롱 문을 열고 가장 예뻐 보이는 다홍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엄마의 큰 링 귀걸이를 팔에 끼고, 진주 목걸이도 목에 걸었다. 달라진 내 모습을 본 동생은 엄지척을 날리더니 자기도 해보겠다며 아빠가 잘 입지 않는 양복과 빨간 넥타이를 꺼내들었다. 나는 동생에게 엄마가 알면 혼낼 거라는 협박을 했지만 동생은 누나는 무사할 줄 아냐며, 또 다른 협박으로 응수했다. 나는 말없이 동생에게 넥타이를 매주었다. 리본으로. 내가 아는 유일한 매듭이었다. 우리는 엄마가 점심을 부탁해 놓은 지선이네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슬프게도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동우슈퍼를 끼고 돌아가기로 했다. 동우슈퍼 아줌마는 우리 남매를 보곤 알 만하다는 듯 묘한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어머. 아가씨, 어디가요?” 기뻤다. 변신에 성공했다. 우리는 있지도 않은 할머니를 찾으러 경로당에도 들렀다. 할머니들은 우리를 참한 색시와 총각으로 부르시며 흐뭇해 하셨다. 세일러문과 턱시도 가면 상황극을 하며 놀던 우리는 이번엔 아가씨와 총각 컨셉으로 그렇게 돌아다녔다. 점심을 먹는 내내, 지선이도 지선이네 아줌마도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뿌듯했다. 저 눈빛이 바로 내가 주희를 바라봤던 눈빛이던가. 아줌마는 부모님이 언제 돌아오시는지 물으시며 입 꼬리를 씰룩댔다. 

 

동생과 나는 손을 맞잡고 걸었다. 걷는 걸음에 맞춰 간은 커져만 갔다. 동네 다방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 쟁반을 들고 있던 예쁜 언니가 우릴 보자 빙긋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우유같이 하얀 프림과 설탕을 탄 맛있는 차를 우리에게 내주며 이름이 뭔지, 어디에 사는지 등 몇 가지 호구조사를 하더니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함께 일어섰다. 우리는 어른 놀이에 심취했었지만 이따금씩 어린이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기에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집까지 무사히 왔다. 데려다줘서 고맙다며 돌아서서 언니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헐렁한 부모님의 옷을 입고 어른이 된 설레는 기분으로 골목길을 나서는 나와 동생.  illustration Kim Jina


그 인사가 마지막이었다. 

우리의 하루가 끝날 거라는 복선의 인사였고, 멀리서 다가오는 승용차 안에서 눈썹이 10시 10분으로 치닫는 부모님과 나누는 하직인사였다. 동생과 나는 빤스만 입은 채 그렇게 쫓겨났다.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참으로 신기했다. 어린 아이 눈에도 좋은 건 알아보나보다. 엄마의 다홍색 원피스는 엄마가 가진 옷들 중 유일한 고급 브랜드였으며 아빠의 양복은 아끼느라 잘 입지도 않았던 옷이었다. 엉엉 울며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드리며 잘못했다고,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속으로 많은 것들을 후회했다. 경로당엔 들르지 말걸. 그럼 더 빨리 집에 왔을 텐데. 파리채랑 빗자루는 숨겼는데 구두주걱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았다. 혹여 근처에 사는 대성이가 지나갈까 싶어, 빨리 해가 져서 벌거숭이에 화장을 떡칠한 내 모습이 안보이길 바라며. 


이후, 엄마의 화장대 위엔 스킨로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그때의 화장품 바구니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홍색 원피스와 아빠의 양복은 장롱 더 깊숙한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주희 고 계집애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안 왔다면 엄마한테 안 혼나지 않았을까. 

누나가 잠깐 정신이 나간 덕분에 같이 혼나게 된 동생에겐 무슨 죄가 있었을까. 

끝내 결백을 주장했지만 너도 똑같은 놈이라며 함께 쫓겨나온 동생이 그래도 심심한 위로가 되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다. 

내 꼴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을까. 그야말로 애가 어른 흉내를 냈으니. 

그 때의 나는 어른인 척했고, 그때 만났던 어른들은 내 기분에 맞장구쳐주듯 나를 어른대접 해줬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다. 어른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고 해서 내가 어른이 결코 아니었음을. 나와 마주쳤던 어른들은 모두 그저 보호자였음을. 


‘나’의 삶이 아닌 ‘우리’의 삶을 살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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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영
황진영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도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이미지_ⓒ황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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