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관두고 태국 치앙마이로 떠났다. 현실 도피에 가까웠지만,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치앙마이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면에서 서울에서와는 다른 생활을 했다. 특히 아래와 같은 노력을 했다.
- 자정 전에 잠자리에 든다. - 다음 날 일정이 없을 때는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잔다. - 배가 고플 때 먹는다. - 밖에서 사 먹을 때는 채식 위주로 먹는다. - 하루 한 끼는 직접 해 먹고, 날마다 장을 본다. - 일주일에 2~3회 요가를 한다. - 타는 듯 뜨거운 시간을 제외하면 걸어 다니고, 저녁 시간엔 종종 동네 산책을 한다. - 무리해서 몸에 신호가 올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쉰다. - 잠자리에 들기 전엔 누워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 아픈 곳이 생길 때마다, 간단히 병상 일기를 쓴다.
서울에서와 달랐던 생활을 우리 사회의 시선으로는 ‘태국에서 시간 여유가 많은 사람이 건강 챙기는 생활'로 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표현하고픈 이 단면의 핵심은 ‘최대한 몸을 편하게 하고, 관찰하려 노력한 생활’이다.
예전엔 늘 바빴다. 괜한 것들로 마음을 졸이고 발을 동동거렸다. 그래서였을까? 바쁜 일상에서 내 몸을 제대로 느끼거나 살피는 일이 드물었다. 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몸을 그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뗄 수 없어 지니고 다니는 ‘몸뚱이’ 취급하며 지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유롭고 시간에 여유가 생기자 몸뚱이가 온전한 나, 나의 ‘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찬찬히 뜯어보니 내 몸이 낯설다.
더위를 쫓기 위해 차가운 타일 바닥에서 뒹굴뒹굴하다 보니 발이 보였다. 내 발이 어색해서 보고 또 봤다. 발에서 올라와 다리, 무릎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흉터와 새로 생긴 상처도 꼼꼼히 살펴봤다. 셔츠를 들어 올려 아랫배를 만졌더니 차가움이, 갈비뼈 사이사이를 눌렀더니 통증이 느껴졌다. 거울을 통해 화장품이 잘 발리는지 확인하며 슬쩍슬쩍 봤던 얼굴의 그 살결들을 하나씩 뜯어 봤다. 팔의 냄새를 샅샅이 맡아 보기도 했고, 손가락 길이를 하나씩 재어 보기도 했다.
이렇게 찬찬히 뜯어보니 내 몸이 낯설었다. 삶은 죽음으로 종결된다. 그 종결의 순간은 온전히 내 몸이 보내는 신호가 중지되면서 결정된다. 결국 삶이란 살아 있는 순간들의 집합인 것으로 내 몸이 세상에서 직면한 반응들의 총합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몸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 그냥 모르는 게 아니라, 내 몸을 외면하며 학대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니, 몸이 사랑스러워졌다. 그래서 자주 몸을 관찰했다. 어느 한 곳도 불편하거나 거슬리지 않는 가뿐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다. 일반적인 건강 상식을 적용해 보기도 했고, 실제로 좋은 느낌을 받았던 활동을 반복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몸의 감각들이 내게 보내는 신호를 들으려 애썼다.
내 몸의 소리.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신호.
내 몸이 세상과 만날 때 발생하는 마찰음.
놀라운 것은 이 소리를 듣기 시작하니, 내 몸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내 몸이 부딪혀야 하는 세상이 겁나지 않았다
온전히 나만 알 수 있는 몸의 메시지
한국으로 돌아왔다. 치앙마이에서 하던 일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진 않지만, 몸의 소리를 듣는 일상의 노력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내가 몸에 가지는 관심이나 그 의미를 전하면 오해 섞인 반응이 돌아온다.
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면, "아직 젊은데 웬 몸 관리를 그렇게 해? 얼마나 오래 살려고?" 몸에 무리가 되는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아! 돈 벌고 가족 챙기고 하려면 몸이 열두 개라도 부족해." 내 몸이 먹는 것이나 사용하는 것에 예민하다고 하면, "그걸 다 신경 쓰고 어찌 살아. 아는 게 병이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고, 나만 온전히 알 수 있는 내 몸의 메시지. 그 메시지가 내게 주는 삶의 자신감. 그래서 더 짜릿하고 소중한 것.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이 몸의 메시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메를로 퐁티는 나의 신체가 살아 있고 움직이기 때문에 세계도 늘 다양한 모습을 갖고 나의 신체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있다고 했죠.
나의 고유한 몸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것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는 게 이전에 알던 것과 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 《몸과 살, 그리고 세계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 정지은, 들녘
몸에 대한 나의 파편화된 생각과 느낌을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는데, 좋은 가이드가 생겼다. 메를로 퐁티가 말했듯 나의 고유한 몸, 소중한 몸을 온전히 알고 난 이후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다르다. 내가 바라보게 된 타인들도 달라졌다. 내 고유하고 소중한 몸만큼이나 타인의 그것 또한 귀하다. 타인의 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나는 좋다.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정지한다. 세상과 만나는 나의 글이 마침표를 찍으려나보다.
더 이상은 모른척 하지 않을게, 나의 몸
고유한 나의 몸을 소중히 여기기
이아나
2019-02-20
‘몸뚱이’를 ‘몸’으로 인식하게 되다
회사를 관두고 태국 치앙마이로 떠났다. 현실 도피에 가까웠지만,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치앙마이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면에서 서울에서와는 다른 생활을 했다. 특히 아래와 같은 노력을 했다.
- 자정 전에 잠자리에 든다.
- 다음 날 일정이 없을 때는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잔다.
- 배가 고플 때 먹는다.
- 밖에서 사 먹을 때는 채식 위주로 먹는다.
- 하루 한 끼는 직접 해 먹고, 날마다 장을 본다.
- 일주일에 2~3회 요가를 한다.
- 타는 듯 뜨거운 시간을 제외하면 걸어 다니고, 저녁 시간엔 종종 동네 산책을 한다.
- 무리해서 몸에 신호가 올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쉰다.
- 잠자리에 들기 전엔 누워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 아픈 곳이 생길 때마다, 간단히 병상 일기를 쓴다.
서울에서와 달랐던 생활을 우리 사회의 시선으로는 ‘태국에서 시간 여유가 많은 사람이 건강 챙기는 생활'로 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표현하고픈 이 단면의 핵심은 ‘최대한 몸을 편하게 하고, 관찰하려 노력한 생활’이다.
예전엔 늘 바빴다. 괜한 것들로 마음을 졸이고 발을 동동거렸다. 그래서였을까? 바쁜 일상에서 내 몸을 제대로 느끼거나 살피는 일이 드물었다. 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몸을 그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뗄 수 없어 지니고 다니는 ‘몸뚱이’ 취급하며 지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유롭고 시간에 여유가 생기자 몸뚱이가 온전한 나, 나의 ‘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찬찬히 뜯어보니 내 몸이 낯설다.
더위를 쫓기 위해 차가운 타일 바닥에서 뒹굴뒹굴하다 보니 발이 보였다. 내 발이 어색해서 보고 또 봤다. 발에서 올라와 다리, 무릎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흉터와 새로 생긴 상처도 꼼꼼히 살펴봤다. 셔츠를 들어 올려 아랫배를 만졌더니 차가움이, 갈비뼈 사이사이를 눌렀더니 통증이 느껴졌다. 거울을 통해 화장품이 잘 발리는지 확인하며 슬쩍슬쩍 봤던 얼굴의 그 살결들을 하나씩 뜯어 봤다. 팔의 냄새를 샅샅이 맡아 보기도 했고, 손가락 길이를 하나씩 재어 보기도 했다.
이렇게 찬찬히 뜯어보니 내 몸이 낯설었다. 삶은 죽음으로 종결된다. 그 종결의 순간은 온전히 내 몸이 보내는 신호가 중지되면서 결정된다. 결국 삶이란 살아 있는 순간들의 집합인 것으로 내 몸이 세상에서 직면한 반응들의 총합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몸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 그냥 모르는 게 아니라, 내 몸을 외면하며 학대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니, 몸이 사랑스러워졌다. 그래서 자주 몸을 관찰했다. 어느 한 곳도 불편하거나 거슬리지 않는 가뿐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다. 일반적인 건강 상식을 적용해 보기도 했고, 실제로 좋은 느낌을 받았던 활동을 반복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몸의 감각들이 내게 보내는 신호를 들으려 애썼다.
내 몸의 소리.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신호.
내 몸이 세상과 만날 때 발생하는 마찰음.
놀라운 것은 이 소리를 듣기 시작하니, 내 몸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내 몸이 부딪혀야 하는 세상이 겁나지 않았다
온전히 나만 알 수 있는 몸의 메시지
한국으로 돌아왔다. 치앙마이에서 하던 일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진 않지만, 몸의 소리를 듣는 일상의 노력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내가 몸에 가지는 관심이나 그 의미를 전하면 오해 섞인 반응이 돌아온다.
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면, "아직 젊은데 웬 몸 관리를 그렇게 해? 얼마나 오래 살려고?" 몸에 무리가 되는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아! 돈 벌고 가족 챙기고 하려면 몸이 열두 개라도 부족해." 내 몸이 먹는 것이나 사용하는 것에 예민하다고 하면, "그걸 다 신경 쓰고 어찌 살아. 아는 게 병이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고, 나만 온전히 알 수 있는 내 몸의 메시지. 그 메시지가 내게 주는 삶의 자신감. 그래서 더 짜릿하고 소중한 것.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이 몸의 메시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메를로 퐁티는 나의 신체가 살아 있고 움직이기 때문에 세계도 늘 다양한 모습을 갖고 나의 신체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있다고 했죠.
나의 고유한 몸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것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는 게 이전에 알던 것과 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 《몸과 살, 그리고 세계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 정지은, 들녘
몸에 대한 나의 파편화된 생각과 느낌을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는데, 좋은 가이드가 생겼다. 메를로 퐁티가 말했듯 나의 고유한 몸, 소중한 몸을 온전히 알고 난 이후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다르다. 내가 바라보게 된 타인들도 달라졌다. 내 고유하고 소중한 몸만큼이나 타인의 그것 또한 귀하다. 타인의 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나는 좋다.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정지한다. 세상과 만나는 나의 글이 마침표를 찍으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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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Amy Shin
<엄마, 나 시골 살래요> 저자. 글을 쓰고 농사를 짓습니다. 소박하지만, 하루하루 기쁘게 ‘완벽한 날들’을 살고자 합니다.
brunch.co.kr/@ana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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