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31일, 나는 독일 함부르크의 알스터 호숫가에서 새천년을 맞고 있었다. 셀린 디옹이 부르는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 〈My heart will go on〉이 울려 퍼지고 호숫가에는 새천년을 맞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5, 4, 3, 2, 1,
해피 뉴 이어!
옆에 선 낯선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건네고 포옹을 나누던 그 순간, 시내 곳곳에서는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고 경찰들도 초긴장한 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새천년을 맞자마자 지하철로 뛰어들거나 자해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은 지구 멸망이 예고된 해이기도 했고 12월 31일은 모든 전산시스템이 마비될 것이라며 세계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던 때였다. 하지만 여느 해와 다르지 않은 연말,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어느 하루처럼 그날도 이젠 오래전 과거가 되어버렸다.
뉴밀레니엄의 첫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태어났던 아이들은 올해 만 19세가 되었다. 태어난 순간 이미 인터넷, 핸드폰과 (지금은 벌써 과거가 된) MP3가 존재했던 세대, 듣고 보고 싶은 것들을 작은 기계 속에 다운받아 언제 어디서나 누릴 수 있게 된 세대, 손쉽게 세계 어느 곳에 있는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세대, 정보의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 한편으로는 머지않을 미래에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길까 봐 불안해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지금 10대들의 장래희망 2위는 유튜버라고 한다. 나같이 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장래희망 리스트엔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직종이니, 밀레니얼 세대라는 말이 실감되기도 한다.
복고와 뉴트로의 차이
지난 몇 년 사이, 과거의 음악이 리메이크되었고 과거의 추억이 〈응답하라〉 시리즈로 재탄생되더니 최근에는 영국의 록밴드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문화 소비에 가장 여유로운 세대가 3, 40대임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지난 2010년 초반부터 시작된 레트로, 즉 복고 문화에 모든 세대가 열광하고 있는 현상을 부인할 수 없다.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으로,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신선하고 독특한 문화로 인식되는 과거의 유행들이 음악, 패션, 소품 등 문화 소비 일반에서 뉴트로라는 타이틀로 부상하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불리는 과거의 물건들, 필름 카메라, LP, 자개농, 꽃무늬 가득한 둥근 양철 밥상, 그 위에 놓인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유명 상표가 찍힌 컵과 물병, 궁서체 같은 옛글씨체에 추억의 옛날 교과서에 등장했을 법한 철수와 영희의 이미지, 이런 사물과 이미지가 카페나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로, 간판으로, 그리고 기념품으로 수집되거나 재생산되고 있다. 누군가의 추억이 다른 이의 취향으로 소비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복고풍 패션은 존재했다. 빈티지 소품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었고 가장 즐겨 듣는 음악은 6, 70년대의 록이었다. 인터넷이 없던 세대의 복고 취향과 밀레니얼 세대의 뉴트로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가 과거를 소비하는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 아날로그 세대의 과거 문화 소비가 노스텔지어1의 소환 혹은 과거의 재현에 그쳤다면 디지털 세대가 소비하는 과거 문화는 전혀 다른 생산품이 된 것 같다. 복고풍의 껍질은 취하고 내용은 지금 세대에게 맞는 편리함과 쾌적함으로 바뀐 것이다.
1 향수(鄕愁), 향수병(homesickness), 과거에 대한 동경, 회고의 정
돌고 도는 세상
변하지 않을 본질에 대하여
핸드폰 하나로 시공간을 넘어 어디든 접속할 수 있는 디지털 세대들은 역설적이게도 풍요 속 빈곤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마음이 불편해진다. 과거의 문화가 더 아름답고 풍요로웠으며, 현재 딱딱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세대도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가질 수는 있다. 어느 세대 어느 누구든 그 세대의 문화가 형성될 것이고 그들의 기억과 추억을 공유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어느덧 되풀이되어 복고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난 30여 년간 세상의 많은 것들이 편리해지고 풍요로워진 만큼 인간을 생각하는 마음조차 ‘편리함’을 중심으로 변해버린 것 같다. 비정규직, 하청, 용역, 파견 근로 등등의 고용시스템 또한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인간조차 손쉽게 쓰이고 버려지는 재화처럼 취급당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내가 가진 편견일 수도 있지만 아날로그적 감성이라는 말에는 포근함이 배어 있다. 조금 서툴고 모자라고 못생겨도 정감 있고 인간미 있다. 반면에 디지털 감성은 차갑고 스마트하고 빠르고 날렵해서 세련되기는 했으나 결코 정이 넘친다는 표현은 쓸 수 없다. 단지 중독될 뿐이다. 인간미가 사라져가는 자본주의 고용시스템에서 점점 더 많은 희생을 당하고 있는 디지털 세대들이 아날로그 감성의 사물들을 찾는 것이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는 모든 생명들의 자연스러운 모습 같다면 내가 너무 과장하는 걸까. 그리고 계속 내 머릿속에서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의 노래〉가 떠오르는 건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이기 때문인 걸까.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문학을 사랑하는 누군가는 그것이 전자책의 형태일지라도 지금도 《데미안》을 읽을 테고, 좋아하는 음악가의 공연을 보기 위해 콘서트장을 찾을 것이며, 사랑하고 헤어지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My heart will go on
뉴밀레니엄과 신인류
최엄윤
2019-01-23
뉴밀레니엄과 함께 시작된 신인류
1999년 12월 31일, 나는 독일 함부르크의 알스터 호숫가에서 새천년을 맞고 있었다. 셀린 디옹이 부르는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 〈My heart will go on〉이 울려 퍼지고 호숫가에는 새천년을 맞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5, 4, 3, 2, 1,
해피 뉴 이어!
옆에 선 낯선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건네고 포옹을 나누던 그 순간, 시내 곳곳에서는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고 경찰들도 초긴장한 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새천년을 맞자마자 지하철로 뛰어들거나 자해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은 지구 멸망이 예고된 해이기도 했고 12월 31일은 모든 전산시스템이 마비될 것이라며 세계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던 때였다. 하지만 여느 해와 다르지 않은 연말,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어느 하루처럼 그날도 이젠 오래전 과거가 되어버렸다.
뉴밀레니엄의 첫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태어났던 아이들은 올해 만 19세가 되었다. 태어난 순간 이미 인터넷, 핸드폰과 (지금은 벌써 과거가 된) MP3가 존재했던 세대, 듣고 보고 싶은 것들을 작은 기계 속에 다운받아 언제 어디서나 누릴 수 있게 된 세대, 손쉽게 세계 어느 곳에 있는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세대, 정보의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 한편으로는 머지않을 미래에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길까 봐 불안해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지금 10대들의 장래희망 2위는 유튜버라고 한다. 나같이 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장래희망 리스트엔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직종이니, 밀레니얼 세대라는 말이 실감되기도 한다.
복고와 뉴트로의 차이
지난 몇 년 사이, 과거의 음악이 리메이크되었고 과거의 추억이 〈응답하라〉 시리즈로 재탄생되더니 최근에는 영국의 록밴드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문화 소비에 가장 여유로운 세대가 3, 40대임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지난 2010년 초반부터 시작된 레트로, 즉 복고 문화에 모든 세대가 열광하고 있는 현상을 부인할 수 없다.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으로,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신선하고 독특한 문화로 인식되는 과거의 유행들이 음악, 패션, 소품 등 문화 소비 일반에서 뉴트로라는 타이틀로 부상하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불리는 과거의 물건들, 필름 카메라, LP, 자개농, 꽃무늬 가득한 둥근 양철 밥상, 그 위에 놓인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유명 상표가 찍힌 컵과 물병, 궁서체 같은 옛글씨체에 추억의 옛날 교과서에 등장했을 법한 철수와 영희의 이미지, 이런 사물과 이미지가 카페나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로, 간판으로, 그리고 기념품으로 수집되거나 재생산되고 있다. 누군가의 추억이 다른 이의 취향으로 소비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복고풍 패션은 존재했다. 빈티지 소품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었고 가장 즐겨 듣는 음악은 6, 70년대의 록이었다. 인터넷이 없던 세대의 복고 취향과 밀레니얼 세대의 뉴트로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가 과거를 소비하는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 아날로그 세대의 과거 문화 소비가 노스텔지어1의 소환 혹은 과거의 재현에 그쳤다면 디지털 세대가 소비하는 과거 문화는 전혀 다른 생산품이 된 것 같다. 복고풍의 껍질은 취하고 내용은 지금 세대에게 맞는 편리함과 쾌적함으로 바뀐 것이다.
1 향수(鄕愁), 향수병(homesickness), 과거에 대한 동경, 회고의 정
돌고 도는 세상
변하지 않을 본질에 대하여
핸드폰 하나로 시공간을 넘어 어디든 접속할 수 있는 디지털 세대들은 역설적이게도 풍요 속 빈곤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마음이 불편해진다. 과거의 문화가 더 아름답고 풍요로웠으며, 현재 딱딱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세대도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가질 수는 있다. 어느 세대 어느 누구든 그 세대의 문화가 형성될 것이고 그들의 기억과 추억을 공유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어느덧 되풀이되어 복고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난 30여 년간 세상의 많은 것들이 편리해지고 풍요로워진 만큼 인간을 생각하는 마음조차 ‘편리함’을 중심으로 변해버린 것 같다. 비정규직, 하청, 용역, 파견 근로 등등의 고용시스템 또한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인간조차 손쉽게 쓰이고 버려지는 재화처럼 취급당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내가 가진 편견일 수도 있지만 아날로그적 감성이라는 말에는 포근함이 배어 있다. 조금 서툴고 모자라고 못생겨도 정감 있고 인간미 있다. 반면에 디지털 감성은 차갑고 스마트하고 빠르고 날렵해서 세련되기는 했으나 결코 정이 넘친다는 표현은 쓸 수 없다. 단지 중독될 뿐이다. 인간미가 사라져가는 자본주의 고용시스템에서 점점 더 많은 희생을 당하고 있는 디지털 세대들이 아날로그 감성의 사물들을 찾는 것이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는 모든 생명들의 자연스러운 모습 같다면 내가 너무 과장하는 걸까. 그리고 계속 내 머릿속에서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의 노래〉가 떠오르는 건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이기 때문인 걸까.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문학을 사랑하는 누군가는 그것이 전자책의 형태일지라도 지금도 《데미안》을 읽을 테고, 좋아하는 음악가의 공연을 보기 위해 콘서트장을 찾을 것이며, 사랑하고 헤어지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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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Amy Shin
사무엘 베케트의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말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언젠가 결국은 창작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omyu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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