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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고독하겠습니다

달콤 씁쓸한 고독의 맛

해원(박은재)

2018-09-19

내가 고독하고 싶은 것은 사실은 연결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가 아니라 자신으로의 연결이다.

그러니까 고독은 ‘나와 함께 있음’이다.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욕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외부와도 연결된다.

 

 

 

하얀색 빈 문서를 띄운 화면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고독해진다. 독주가 든 잔을 쥐었다 폈다 하듯 고독이란 단어를 만지작거린다. 장소를 옮겨가며 단어를 곱씹고 뜯어본다. 삼키면 쑥 하고 넘어갈 것 같았는데, 사레 걸린 듯 막혀서 캑캑거린다. 겨우 숨을 돌리고 난 다음에, 이 에세이를 나 혼자서 써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슬프고 무서워졌다.

 

 

함께여서 ‘고독했던’ 방

어릴 적에는 혼자 있을 틈이 없었다. 방이 세 개 있는 집에 가족 다섯 명이 살았다. 안방은 부모님이 점유하고, 남은 방 두 개를 D와 Y와 나, 세 남매가 같이 썼다. 우리는 한 방에서 같이 잤다. 자기 전 나란히 누워 우주선 놀이를 했다. 밤이 되고 불을 끄면 침대는 우주선이 되었다. 베개는 조종석. 우리는 우주를 활강하며 외계인과 싸웠다.

‘삐- 전방 우측에서 유에프오 출몰. 삐- 확인. 삐- 미사일 발사.’

지금 보니 엄청난 놀이다. 당시 그 어떤 영화 보다 신났다.

 

열 살 넘어서부터는 나보다 다섯 살 많은 D와 내가 방을 함께 쓰고 남자인 Y는 독방을 갖게 됐다. 그때 쓰던 방 풍경이 아련하다. 중앙에 침대를 두고 창가에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두었다. 침대 헤드 뒤쪽 벽엔 베이지색 바탕에 은은한 꽃무늬가 있는 벽지를 발랐다. 해 질 무렵이면 그 위로 햇볕이 길게 내리쬐었다. 책장에는 엄마가 아마도 자녀 교육을 위해 작심하고 구매했을 백 권 넘는 청소년 문고가 꽂혀 있었다.


그 아래엔 D가 틈틈이 사 모은 '쎄씨'며 '키키'며 하는 강아지 이름 비슷한 제목이 붙은 패션 잡지가 쌓여갔다. 책상 서랍엔 김건모, 서태지, 공일오비 등의 앨범이 수집되고 있었다. 화장품과 잡동사니로 가득한 화장대, 구식 서랍장, 행거에 걸린 옷가지들로 엄마에게 잔소리를 자주 듣던 방. 온종일 정리해도 새로운 것이 나올 것 같은 흥미로운 세계였다.

 

D가 엄마랑 싸우고 기분이 안 좋으면 혼자 방에 있도록 나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럴 때면 Y의 방에 건너갔다. 그곳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이를테면 <드래곤볼>, <나루토>, <슬램덩크> 같은 만화책이 있고, 레고와 장난감이 굴러다니는 방. 그곳에서 임요환이나 이윤열이 나오는 스타크래프트 경기에 탄성을 지르고 Y의 플레이에는 야유를 보냈다. 그러면서 몰래 Y의 <바람의 검심> 만화책을 보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 세계에는 그런 재미가 있었다.


 

유년 시절의 공간은 즐거웠지만 혼자 있을 수 없어 고독했다.

유년 시절의 공간은 즐거웠지만 혼자 있을 수 없어 고독했다.

 

 

이처럼 유년 시절의 공간은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두 개의 세계를 두루 섭렵하며 놀았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조금 고독했다. 어디도 내가 완전히 편안하게 있을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가끔 정말 혼자 있고 싶었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을 수 없어서 고독해졌다. 그런 날에는 집 주위를 빙빙 돌며 한참 동안 걷다 너무 늦지 않게 귀가하곤 했다.

 

내 소원은 독립하는 것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것들처럼, 최초의 독립은 설레고 불안한 것이었다. 번거롭지만 원했다. 모든 작업은 그에 대한 준비였다. 마침내 취업하면서 독립을 하게 됐다. 독립 만세! 혼자 산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내 맘대로 꾸밀 수 공간이 있고, 그곳을 다시 아무렇게나 어질러도 된다. 밤에 음악을 틀고 라면을 끓여 먹어도 된다. 내가 쓴 일기를 누가 볼까 봐 꽁꽁 숨기지 않아도 된다. 자유로웠다. 그곳에서 밥을 해 먹고 일기를 쓰고 노래를 듣고 게으름을 피우고 이따금 애타게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달콤 씁쓸한 고독의 맛

혼자이길 꿈꾸던 나는 이제 혼자 있는 것이 당연해졌다. 우주선 놀이를 하던 시절은 구석기 시대처럼 아득해졌다. 고독은 일상 곳곳에 스며들었다. 사회적 고독 현상도 짙어졌고 내 삶도 그 속에 있었다. 혼자 밥을 먹고 일기를 쓰고 노래를 듣고 게으름을 마음껏 피우면서 더 고독해졌다. 우습게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쩐지 본질적인 고독의 농도는 처음부터 똑같이 간직해온 것 같았다.


 

고독은 일상 곳곳에 스며들었다. ⓒPhoto by Anthony Tran on Unsplash

고독은 일상 곳곳에 스며들었다. ⓒPhoto by Anthony Tran on Unsplash

 

 

크지 않은 집에서 가족들과 달그락 부딪히며 살았던 유년기의 기억 때문일까. 혼자 있고 싶으면서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고, 함께 있으면 다시 혼자 있고 싶어졌다. 독립성과 의존성 사이에서 물결처럼 마음이 출렁였다.

 

고독을 즐기기는 쉽지 않다. 고독의 속성은 이중적이다. 달콤하고 쓰다. 타인과 떨어져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과 동시에 홀로 있음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충만감. 둘 사이의 균형 감각을 잡기가 어렵다. 그래도 자유는 사랑스럽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고독을 즐기는 편이다.

 

내가 고독하고 싶은 것은 사실은 연결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가 아니라 자신으로의 연결이다. 그러니까 고독은 ‘나와 함께 있음’이다.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욕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상처를 느끼고 같이 아파한다. 좋아하는 일을 해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외부와도 연결된다. 의존적인 연결이 아니라, 자유로운 연결로써. 사색, 독서, 쓰기, 산책, 여행... 고독을 멋지게 향유하게 된다. 고독의 시간 후에야 못 보던 풍경을 만나고, 배꼽에 힘을 주고 걷고, 사람들의 고독한 모습을 사랑하게 된다.

 

 

하얀 고독 속으로 향하기

다시 백지와 마주한다. 어쩔 수 없이 고독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무엇이든 쓸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써도 된다. 백지는 거울처럼 나를 비추기 때문에 부끄럽고 두렵다. 이렇게 쓰고 싶고 써야 할 것 같다는 자의식에 사로잡히고 싸운다. 싸움은 고독하다. 쓰다가 엉망이 되더라도 결국 의지할 것은 나뿐이다.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한다. 이런 일은 너무 막막하고 무서워서 종종 나를 보고 웃어주는 누군가를 발견하면 쪼르르 달려가고 싶어진다.

 

그렇게 잠시 피할 수는 있지만, 영영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좀 더 고독해보기로 한다. 고독은 계속해서 확장된다. 갑자기 들이닥친 인생으로, 모르는 얼굴에 달라붙은 저마다의 사건들로. 나의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은 나뿐이다. 평범하고 이상하고 복잡한 것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하게 우려진다. 그 맛과 향기는 오로지 내 것이며 나만이 감당해야 한다. 타인에게 일일이 전달하고 이해시킬 수 없는 순간, 나는 그때 말하기보다 조용히 음미하는 쪽을 좋아한다. 음, 고독한 맛이다.

 

 

고독을 음미한다.

고독을 음미한다.

 

 

보이지 않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사이에 펼쳐진 세계에서, 은밀한 시합이 펼쳐진다. 잘 고독하기 위해서 나는 훈련 중이다. 잘 써 내려가고 싶어서, 우아하게 헤엄치고 싶어서. 속으로 다짐한다. 지금도 고독하지만 앞으로 더 잘 고독하겠습니다. 한편으론 누군가와 우주선 놀이는 또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비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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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해원
해원(박은재)

몸을 움직이고 요가하고 글을 씁니다. 무의식에 가라앉은 건더기들을 끌어올려 자기를 탐험합니다. 숨 쉬고, 걷고, 말하고, 읽고, 관찰하고, 우연히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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