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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시지프

까뮈의 『시지프 신화』에 나타난 부조리를 생각하며

인문쟁이 엄소연

2016-08-08

지금도 바위는 계속해서 굴러 떨어지고 있다.

이 바위를 밀어 올리던 어느 날 문득 “왜?”라는 물음이, 부조리의 인식이 다가온다면, 까뮈가 이야기했던 ‘반항’을 떠올려보았으면 좋겠다.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는, 도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용기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인식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매일매일 늦게까지 일해도 쌓인 일이 끝이 없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은 똑같고 나아지는 것이 없을 때면, 시지프가 떠오르곤 한다. 시지프(혹은 시시포스 Sisypho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신들의 노여움을 사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다. 산꼭대기에 이르면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그러면 이 바위를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끝도 없고, 어떤 희망도 없는 형벌.


이런 끔찍한 벌을 받은 시지프를 일상에서 떠올리다니, 상황을 너무 과장해서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혹은 불행히도) 프랑스의 작가 까뮈(Albert Camus, 1913~1960) 역시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1)고 쓴 바 있다. 70여 년 전에도 지금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형벌과 같은, 생활의 쳇바퀴는 쉬지 않고 굴러가고 있다.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

 

 

『이방인(L'Étranger)』으로 잘 알려져 있는 까뮈는,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에서 부조리와 삶의 문제에 대해 탐구했다. 그에 따르면 부조리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혹은 인간 사이의 ‘절연’과 ‘단절’로서, 어느 한 쪽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속한 곳과 내가 끊어져 있는 상황에 대한 인식, 즉 부조리의 인식은 “어느 날 문득” 시작된다.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2)

 

삶의 분주한 반복 속에서 한 번쯤 느껴보았을 법한 의문에서, 부조리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인식 뒤에는 “판에 박힌 행동의 연쇄가 끊어지면서 마음이 그 줄을 다시 이어줄 고리를 찾으려 하나 헛일이 되는”3) 상태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부조리를 의식한 인간은,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부조리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까뮈는 (내세의) 희망이나 (육체적) 자살은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으며, 의미 있는 귀결은 ‘반항’이라고 이야기한다.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폭넓은 탐구를 이 짧은 글에서 제대로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그가 제시한 ‘반항’에 대해서는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까뮈가 이야기하는 ‘반항’은, 간단히 표현하면,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하며 그 속에서 버텨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정적 의미의 반항이 아니라, 적극적 의미의 대응에 가깝다. 그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에게서 이 모습을 발견한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헤아릴 수 있는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점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끌어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4)

 

 

시지프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추정~1576) 작, 캔버스에 유채

▲ 시지프,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추정~1576) 작, 캔버스에 유채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다 바쳐야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일지라도, 이를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직시함으로써, 시지프는 그의 운명을 넘어선다. 굴러 떨어진 바위는 그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못하고, 이 형벌도 더 이상 벌이 아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바위를 밀어올리기만 해야 하는가? 그냥 상황을 참기만 하면 된다는 뜻인가? 

 

아니다. 이 ‘버텨나감’은, 단순한 순응이나 수용이 아니라,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무의미하게 일상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그저 살아'지기만'하는 것도 아니다. 부조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이로써 외부의 무엇이 아닌 자신의 인식과 노력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일궈내는 것 – 까뮈가 이야기한 시지프의 “행복”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바위는 계속해서 굴러 떨어지고 있다. 이 바위를 밀어 올리던 어느 날 문득 “왜?”라는 물음이, 부조리의 인식이 다가온다면, 까뮈가 이야기했던 ‘반항’을 떠올려보았으면 좋겠다.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는, 도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용기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인식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릴 힘을,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갈 힘을 – 모든 바위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존재하기 위한 힘을. 시지프처럼.

 

 

 


1) 까뮈 저, 김화영 역, 시지프 신화, 책세상, 2014, p186

2) 위의 책, p.28

3) 위의 책, 같은 쪽

4) 위의 책, 같은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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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소연
인문쟁이 엄소연

[인문쟁이 1,2기]


엄소연은 경기 고양시에 살고, 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한다. 춤과 음악에서 힘과 용기를 얻고 있으며, 이를 무대에서 사람들과 나눌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어디에서든, 누구에게서든 그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인문쟁이에 지원했다. 더 많은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함께할 수 있길 기대한다. like_ball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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