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밖에서는 재빠르게 변화의 시간이 흐르고,
탐욕이 집을 삼키고 마을을 삼키고 마침내는
인간마저 송두리째 먹어치우는 시대
작은 골짜기 손바닥만 한 동네에
멈춘 듯 그대 서 있으라
비탈과 골목과 이웃이 어울려 빚어내는
낡은 것의 아름다움을 그대, 간직한 채 남아있으라
하나쯤은 시간을 거슬러 존재하는 것이 있음을
하나쯤은 세상과 멀찌감치 떨어져 살아가는 것도 있음을
그대를 통해 느끼리니
오래 그대로 견디며 서 있으라
성북동이여
최성수 시인(58)의 시 「성북동에게」이다. 시인은 1968년 부모님과 함께 성북동으로 이사 온 뒤에 50년 가까이 성북동에 살며 시를 쓰고 마을운동을 했다. 그와 함께 성북동을 걸으며 성북동의 골목과 그 골목사이에 담긴 옛 이야기를 들었다.
성북동은 구준봉과 응봉, 두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성북천을 중심으로 생긴 마을이다. 성북동 사람들은 맑은 물이 흘러 그 물로 포백(마전)을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비록 지금은 복개 되어 그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여전히 성북동은 옛 성북천을 복개한 도로가 마을의 중심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기억하는 성북천은 어땠을까?
“조선시대에는 맑은 물이 흘러 마전도 하고 했다고 하는데, 제가 이사 왔을 땐 이미 깨끗한 성북천은 없었어요. 연탄재와 쓰레기를 모두 성북천에 던져서 매우 더러웠고, 여름에는 악취도 심하고 그랬죠.”
사람은 과거의 기억을 되도록 아름답게 기억하려 한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은 맑은 물이 흐르던 조선시대의 성북천일 것이다. 하지만 성북천은 악취가 나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는 맑은 물이 흐르던 시절과 악취가 나던 시절, 두 시절의 성북천을 모두 기억해야 해야하지 않을까? 과거를 바로 보는 것이야 말로 미래를 계획하는 첫걸음일 수 있다.
시인은 나를 골목으로 안내했다. 골목은 공사 중이었다. 불과 몇 달 사이 한옥이 헐리고 빌라가 지어지고 있었다. 좁고 짧은 골목 안에서 네 채의 한옥이 사라졌다. 이렇게 급격하게 변하는 성북동이기에 시인이 처음 왔던 시절과는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 변하는 성북동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돌아온 시인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성북동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서울의 다른 동네에 비하면 성북동은 그 정도가 덜한 것 같아요. 오히려 성북동의 급격한 변화가 시작된 것은 최근 10년이죠. 재개발이 추진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투기를 목적으로 이곳에 건물을 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옛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죠. 성북동의 정체성은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며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도 재개발 찬성과 개발 반대로 나뉘기 시작했으니까요.”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변화에 대한 어쩔 수 없음도 시인은 이해했다.
“옛 한옥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집 주인 입장에서는 집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삶이고 생활이죠. ‘한옥을 지키자’라고 말을 하지만, 한옥을 보존하려면 보존을 위한 대안이 필요한데 그 대안이 없습니다. 한옥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어떤 해택이 있어야 하는 데 지금은 한옥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훨씬 이익이니 한옥은 사라질 수밖에 없죠.”
성북동의 옛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골목
ⓒ박수진
하지만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도 성북동에서 옛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은 도로의 포장이 바뀌었을 뿐, 옛 모습 그대로라고 했다. 시인이 전정으로 아쉬워하는 것은 공동체의 해체였다. 물론 그것 역시 삶의 방식이 변한 결과 이루어진 필연적 결과라고 이야기 했지만…
“예전에는 주로 남자들만 나가서 일을 했어요. 그래서 여자들은 마을에 있으며 서로 교류하고 소통을 했습니다. 이웃에 무슨 일이 있는지 서로 다 알았죠. 하지만 지금은 젊은 세대는 맞벌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마을에서 서로 소통할 시간이 없어요. 사회 변화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마을 공동체의 해체와 그 반작용으로 벌어지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은 단기간에 끝날 사업이 아니다. 시인의 말처럼 성북동이란 마을 공동체는 오랜 기간 마을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집이 없어 2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하는 젊은 세대에게 마을 공동체는 관심을 갖기엔 너무 사치스러운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시인이 성북동의 옛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고 한 골목이다. 파란색으로 표기한 부분은 최근 몇 달 사이 네 채의 한옥이 헐린 골목 ⓒDAUM MAP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덧 조지훈 집터에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문학 이야기로 넘어갔다. 시인이 생각하는 성북동을 대표하는 인물이 궁금했다. 역사적 중요성 등을 제외하고, 성북동과의 관련성과 상징성을 볼 때 성북동의 대표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다.
“역사적, 문학적 평가를 떠나서라면, 제가 생각하기에 성북동을 제일 잘 표현한 문학가는 김광섭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북동 비둘기」 하나만으로도 현재 성북동의 모습까지 포괄하고 있으니까요. 당시 시에서 쓴 개발에 대한 묘사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니까요.”
개발과 보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떠나서라도 시인의 말은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성북동의 이미지를 이야기 할 때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간송 전형필의 보화각,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떠올리는 사람보다 ‘비둘기’를 떠올리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 말이다.
선잠단지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성북동의 여러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이곳은 문화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공터 정도로 생각을 했죠. 표지판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요. 지금처럼 잘 관리가 되어있지도 않았어요.”
사실 시인에게 성북동의 문화재는 최근에 생긴 개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선잠단이 관리되지 않은 공터였듯, 심우장은 북정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들어가기 어려운 조금 특이한 한옥이었다. 조지훈의 집은 -비록 그가 이사 오던 그 해에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동네의 여러 한옥 가운데 하나였고, 최순우 옛집은 어떤 문인이 사는 집 정도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것들의 가치가 재발견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시인은 말을 이었다.
“성북동은 걸어서 봐야하는 곳이에요. 골목길이 좋으니까요. 차를 타고 식당에 와서 밥 먹고, 몇 군데 문화재를 보고 휙 가면 아무리 홍보를 해도 성북동의 매력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차분히 걷게 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성북동의 매력을 자연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북동은 아직 북촌과 서촌만큼은 아니지만, 주말엔 제법 사람이 북적인다. 성북동의 여러 자취들이 문화재로 재발견 되면서부터다. 관광객이 오는 마을은 어떤 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마을은 그 자체로 사람들이 생활을 하는 공간이지, 관광지일 수 없다. 하지만 문화재가 있으니 몰려드는 사람들을 무작정 막을 수도 없다. 이 사이 어딘가에 접점을 찾아 공존할 수 있게 하는 현명한 정책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객들에겐 하루 오가는 관광지이지만, 주민들에겐 삶을 영유하는 공간이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시인이 말했다.
“물길이 복원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말을 이었다.
“물길 복원이 쉽지는 않겠죠. 예전에 구청에 이야기 하니 중앙부처와 상의를 해야 한답니다. 쉽지 않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 물길이 일부라도 복원되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 봅니다.”
생각해보면 성북동에 처음 마을이 생긴 것은 이곳 주민들에게 마전을 하고 그것을 값을 쳐서 국가가 사준다는 보장을 해주면서부터였다. 성북천은 성북동 사람들 생활의 젖줄이었다. 비록 어린 시절 시인이 본 성북천은 악취가 나는 곳이었지만, 그 악취 나는 성북천도 성북동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온 그의 말이지만, 그리고 나의 방식대로이지만 난 시인의 말을 곧 수긍할 수 있었다.
수연산방의 모습. ⓒ성북문화원
마지막으로 이렇게 빨리 변해온, 그리고 지금도 변하고 있는 성북동에서 꼭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시인에게 물었다.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북동의 선입니다. 길가 쪽으로 있는 나직나직하고 작은 가게들, 저녁에 삼선교 쪽에서 올라오다보면 보이는 능선들 이런 선입니다. 만약 이곳에 아파트라도 들오게 되면 이런 선은 사라지겠죠.”
이 이야기와 함께 수연산방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시인과 함께 조지훈과 청록파의 시, 김수영의 시, 신동엽의 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헤어지고 생각했다. 시인과 나눈 이야기의 핵심은 삶의 공간으로서의 성북동이었다. 문화재, 관광지, 그리고 이곳에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주민의 삶과 공존시킬 수 있을까? 집을 잃은 비둘기가 떠나갔듯, 우리의 삶 역시 이곳을 떠나가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 봤다. 김광섭 시인이 봤을 성북동 하늘은 예전 그대로일 터이니 말이다.
인터뷰이 최성수
시인이자 청소년 문학작가. 시집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천 년 전 같은 하루』, 『꽃, 꽃잎』을 냈으며, 청소년 소설 『비에 젖은 종이비행기』, 『꽃비』, 『무지개 너머 1,230마일』을 내기도 했다. 성북동에 50년 가까이 살며 ‘성북동천’ 등의 마을 단체에서 활동 중이다.
우리 동네 토박이와 걷다
성북동의 과거, 그리고 미래
박수진
2016-04-18
성북동에게
최성수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으라
자본과 개발의 밀물 속에서도 그대
거대한 도시 서울에 홀로 서 있으라
마을 밖에서는 재빠르게 변화의 시간이 흐르고,
탐욕이 집을 삼키고 마을을 삼키고 마침내는
인간마저 송두리째 먹어치우는 시대
작은 골짜기 손바닥만 한 동네에
멈춘 듯 그대 서 있으라
비탈과 골목과 이웃이 어울려 빚어내는
낡은 것의 아름다움을 그대, 간직한 채 남아있으라
하나쯤은 시간을 거슬러 존재하는 것이 있음을
하나쯤은 세상과 멀찌감치 떨어져 살아가는 것도 있음을
그대를 통해 느끼리니
오래 그대로 견디며 서 있으라
성북동이여
최성수 시인(58)의 시 「성북동에게」이다. 시인은 1968년 부모님과 함께 성북동으로 이사 온 뒤에 50년 가까이 성북동에 살며 시를 쓰고 마을운동을 했다. 그와 함께 성북동을 걸으며 성북동의 골목과 그 골목사이에 담긴 옛 이야기를 들었다.
성북동은 구준봉과 응봉, 두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성북천을 중심으로 생긴 마을이다. 성북동 사람들은 맑은 물이 흘러 그 물로 포백(마전)을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비록 지금은 복개 되어 그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여전히 성북동은 옛 성북천을 복개한 도로가 마을의 중심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기억하는 성북천은 어땠을까?
“조선시대에는 맑은 물이 흘러 마전도 하고 했다고 하는데, 제가 이사 왔을 땐 이미 깨끗한 성북천은 없었어요. 연탄재와 쓰레기를 모두 성북천에 던져서 매우 더러웠고, 여름에는 악취도 심하고 그랬죠.”
사람은 과거의 기억을 되도록 아름답게 기억하려 한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은 맑은 물이 흐르던 조선시대의 성북천일 것이다. 하지만 성북천은 악취가 나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는 맑은 물이 흐르던 시절과 악취가 나던 시절, 두 시절의 성북천을 모두 기억해야 해야하지 않을까? 과거를 바로 보는 것이야 말로 미래를 계획하는 첫걸음일 수 있다.
시인은 나를 골목으로 안내했다. 골목은 공사 중이었다. 불과 몇 달 사이 한옥이 헐리고 빌라가 지어지고 있었다. 좁고 짧은 골목 안에서 네 채의 한옥이 사라졌다. 이렇게 급격하게 변하는 성북동이기에 시인이 처음 왔던 시절과는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 변하는 성북동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돌아온 시인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성북동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서울의 다른 동네에 비하면 성북동은 그 정도가 덜한 것 같아요. 오히려 성북동의 급격한 변화가 시작된 것은 최근 10년이죠. 재개발이 추진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투기를 목적으로 이곳에 건물을 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옛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죠. 성북동의 정체성은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며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도 재개발 찬성과 개발 반대로 나뉘기 시작했으니까요.”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변화에 대한 어쩔 수 없음도 시인은 이해했다.
“옛 한옥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집 주인 입장에서는 집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삶이고 생활이죠. ‘한옥을 지키자’라고 말을 하지만, 한옥을 보존하려면 보존을 위한 대안이 필요한데 그 대안이 없습니다. 한옥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어떤 해택이 있어야 하는 데 지금은 한옥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훨씬 이익이니 한옥은 사라질 수밖에 없죠.”
성북동의 옛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골목
ⓒ박수진
하지만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도 성북동에서 옛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은 도로의 포장이 바뀌었을 뿐, 옛 모습 그대로라고 했다. 시인이 전정으로 아쉬워하는 것은 공동체의 해체였다. 물론 그것 역시 삶의 방식이 변한 결과 이루어진 필연적 결과라고 이야기 했지만…
“예전에는 주로 남자들만 나가서 일을 했어요. 그래서 여자들은 마을에 있으며 서로 교류하고 소통을 했습니다. 이웃에 무슨 일이 있는지 서로 다 알았죠. 하지만 지금은 젊은 세대는 맞벌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마을에서 서로 소통할 시간이 없어요. 사회 변화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마을 공동체의 해체와 그 반작용으로 벌어지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은 단기간에 끝날 사업이 아니다. 시인의 말처럼 성북동이란 마을 공동체는 오랜 기간 마을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집이 없어 2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하는 젊은 세대에게 마을 공동체는 관심을 갖기엔 너무 사치스러운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시인이 성북동의 옛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고 한 골목이다. 파란색으로 표기한 부분은 최근 몇 달 사이 네 채의 한옥이 헐린 골목 ⓒDAUM MAP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덧 조지훈 집터에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문학 이야기로 넘어갔다. 시인이 생각하는 성북동을 대표하는 인물이 궁금했다. 역사적 중요성 등을 제외하고, 성북동과의 관련성과 상징성을 볼 때 성북동의 대표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다.
“역사적, 문학적 평가를 떠나서라면, 제가 생각하기에 성북동을 제일 잘 표현한 문학가는 김광섭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북동 비둘기」 하나만으로도 현재 성북동의 모습까지 포괄하고 있으니까요. 당시 시에서 쓴 개발에 대한 묘사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니까요.”
개발과 보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떠나서라도 시인의 말은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성북동의 이미지를 이야기 할 때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간송 전형필의 보화각,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떠올리는 사람보다 ‘비둘기’를 떠올리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 말이다.
선잠단지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성북동의 여러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이곳은 문화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공터 정도로 생각을 했죠. 표지판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요. 지금처럼 잘 관리가 되어있지도 않았어요.”
사실 시인에게 성북동의 문화재는 최근에 생긴 개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선잠단이 관리되지 않은 공터였듯, 심우장은 북정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들어가기 어려운 조금 특이한 한옥이었다. 조지훈의 집은 -비록 그가 이사 오던 그 해에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동네의 여러 한옥 가운데 하나였고, 최순우 옛집은 어떤 문인이 사는 집 정도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것들의 가치가 재발견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시인은 말을 이었다.
“성북동은 걸어서 봐야하는 곳이에요. 골목길이 좋으니까요. 차를 타고 식당에 와서 밥 먹고, 몇 군데 문화재를 보고 휙 가면 아무리 홍보를 해도 성북동의 매력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차분히 걷게 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성북동의 매력을 자연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북동은 아직 북촌과 서촌만큼은 아니지만, 주말엔 제법 사람이 북적인다. 성북동의 여러 자취들이 문화재로 재발견 되면서부터다. 관광객이 오는 마을은 어떤 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마을은 그 자체로 사람들이 생활을 하는 공간이지, 관광지일 수 없다. 하지만 문화재가 있으니 몰려드는 사람들을 무작정 막을 수도 없다. 이 사이 어딘가에 접점을 찾아 공존할 수 있게 하는 현명한 정책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객들에겐 하루 오가는 관광지이지만, 주민들에겐 삶을 영유하는 공간이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시인이 말했다.
“물길이 복원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말을 이었다.
“물길 복원이 쉽지는 않겠죠. 예전에 구청에 이야기 하니 중앙부처와 상의를 해야 한답니다. 쉽지 않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 물길이 일부라도 복원되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 봅니다.”
생각해보면 성북동에 처음 마을이 생긴 것은 이곳 주민들에게 마전을 하고 그것을 값을 쳐서 국가가 사준다는 보장을 해주면서부터였다. 성북천은 성북동 사람들 생활의 젖줄이었다. 비록 어린 시절 시인이 본 성북천은 악취가 나는 곳이었지만, 그 악취 나는 성북천도 성북동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온 그의 말이지만, 그리고 나의 방식대로이지만 난 시인의 말을 곧 수긍할 수 있었다.
수연산방의 모습. ⓒ성북문화원
마지막으로 이렇게 빨리 변해온, 그리고 지금도 변하고 있는 성북동에서 꼭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시인에게 물었다.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북동의 선입니다. 길가 쪽으로 있는 나직나직하고 작은 가게들, 저녁에 삼선교 쪽에서 올라오다보면 보이는 능선들 이런 선입니다. 만약 이곳에 아파트라도 들오게 되면 이런 선은 사라지겠죠.” 이 이야기와 함께 수연산방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시인과 함께 조지훈과 청록파의 시, 김수영의 시, 신동엽의 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헤어지고 생각했다. 시인과 나눈 이야기의 핵심은 삶의 공간으로서의 성북동이었다. 문화재, 관광지, 그리고 이곳에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주민의 삶과 공존시킬 수 있을까? 집을 잃은 비둘기가 떠나갔듯, 우리의 삶 역시 이곳을 떠나가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 봤다. 김광섭 시인이 봤을 성북동 하늘은 예전 그대로일 터이니 말이다.
인터뷰이 최성수 시인이자 청소년 문학작가. 시집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천 년 전 같은 하루』, 『꽃, 꽃잎』을 냈으며, 청소년 소설 『비에 젖은 종이비행기』, 『꽃비』, 『무지개 너머 1,230마일』을 내기도 했다. 성북동에 50년 가까이 살며 ‘성북동천’ 등의 마을 단체에서 활동 중이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부터 성북문화원 향토사연구팀장으로 재직하며 성북동은 물론 성북구의 역사를 발굴하여 수집,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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