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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 100개의 “좋아요”가 의미하는 것

이달의 인문

서동진

2016-03-31

  • 페이스북에서 100개의 “좋아요”가 의미하는 것

    2000년대 싸이월드에서, 2010년대 페이스북으로의 대대적 이동이 있었다. 페이스북은 단순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넘어 사회적 영향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회학자 바우만의 지독한 표현을 빌자면 “어떤 종류이든 사회의 시선을 끌려면 스타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직 유명 인사나 유명한 피해자만이 자극적이고 무가치한 정보들로 배부른 사회의 주목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1) 승자독식의 세계,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오직 스타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믿음은 확고부동하다. 장황할 듯도 하지만 그의 말을 직접 옮겨보자.

  • 도덕적 불감증 책 표지

    ⓒ책읽는 수요일

소비자의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상품의 소비자인 동시에 소비를 위한 상품들이다. 우리는 모두 상품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위한 수요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VIP 고객의 부티크 살롱을 본 떠 가난한 사람을 위해 만든 번화가 시장과도 같은 페이스북과 블로그가 널려있는 인터넷은 유명 인사들의 공장에서 설정한 표준들을 따르기 마련이다. 광고주들은 광고 내용이 사적이고 야하고 불미스러울수록 더 매력적이고 성공적이며-텔레비전, 번지르르한 잡지, 유명인을 파헤치는 타블로이드 신문 등등에서 매기는-평점이 더 높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전체적인 귀결은 고백실 내부에 마이크가 설치되고 광장에 확성기가 내걸린 ‘고백사회(confessional society)’이다. 고백사회의 성원자격은 모두에게 솔깃하게 열려있다. 그러나 밖에 머무르려면 중벌이 뒤따른다. 가입을 망설이는 자들에게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의 최신판인 “나는 관찰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교훈이. 나아가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더 많이 존재한다는 식의 교훈이 (흔히 고통스럽게) 뒤따른다.2)

바우만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도모하고 품평하고 살아야 하는 세계를 “고백사회”라는, 참으로 그럴싸한 개념으로 풀이한다. 이제 사적인 것은 소중히 감춰지고 보호 받아야 할 자유의 세계에 있지 않다. 그랬다가는 우리는 상품으로서 자신을 내놓아야 하는 우리 시대의 윤리적 의무를 저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명사(名士) 혹은 대기 상태의 셀럽(Celeb)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젠가 으스스한 기분으로 상상했던 오웰 식의 세계와 다른, 아니 이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세계에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딘가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전지전능한 눈길에 의해 추적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우만이 말하듯이, 자신의 고백실에 마이크를 두고 자신에 관해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알다시피 우리는 몰래 카메라를 통해 어느 연예인이 어떻게 아이를 기르는지, 어느 인기 개그맨이 딸내미와 어떤 사이로 지내는지, 어느 아이돌 스타가 어떻게 밥을 먹고 사는지 채널을 돌려가며 관찰한다. 그것이 중계되는 곳은 빅브라더의 중앙감시 모니터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흔해 빠져 지겹기까지 한 오늘날의 흥미로운 오락으로서의 TV쇼이다.

 

  • 1)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드 돈스키스, 『도덕적 불감증』, 책읽는수요일, 2016, 72p.
  • 2) 앞의 책, 54쪽.
‘좋아요’ 고백의 경연장

 

우리는 더 많은 인기를 얻기 위한 비결은 TV에 출연해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을 털어놓는 것임을 훤히 내꿰고 있다. 고백을 위한 경연장(競演場)으로서 우위를 따지자면 TV는 다른 것에 견주어 한참 순위에서 밀린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는 제법 영특한 이름을 단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는 외설스럽게 일상생활을 노출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단지 “벗어라!”라는 협박을 늘어놓지 않을 뿐 그것은 당신의 일상을 친구들과 나누라는 은밀한 꼬드김을 통해 나를 품평(品評)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 품평의 승자가 거두는 수확의 메달은, 페이스북이라면 “좋아요(I Like)”의 개수이고, 트위터라면 리트윗의 개수이다. 관심의 경제니 주목(注目)의 경제니 하는 말을 주워 섬기는 경제학자들의 말을 빌자면 오늘날 가장 희귀한 가치는 편익도 효용도 정보도 체험도 아니다. 말인즉슨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주목이다. 오늘날 가장 값나가는 것은 물론 가장 “조회 수”가 높은 것이다. 따라서 페이스북은 개성의 주식시장처럼 보일 지경이다. 어쩌면 우리는 KOSPI 지수, NYSE 지수 같은 것처럼 페이스북 지수란 것을 만들어 인류 개개인의 명성 지수를 랭크하는 세계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술 작품의 가치란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가를 따질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평판(reputation)’의 가치란 것을 들먹인다. 높은 평판을 가졌다는 것은 그 대상이 그 만한 가치를 지닌 탓이 아니라 그것에 그만한 명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높은 평판이란 바로 그 대상을 둘러싼 들끓는 소문, 논쟁, 전설, 기억담, 축하 등을 통해 배가되고 증폭된다. 이러한 재귀성, 유명하므로 계속 유명해지는 자기반영의 맹목적 추진력은 급기야 경매가를 통해 입증된다. 그런 점에서 평판의 경제로서 미술품의 경제를 생각하면, 오늘날 명성을 둘러싼 아귀다툼 같은 각축을 냉큼 상품의 경제에 비견하는 바우만의 논리는 조금 투박하다. 상품처럼 되었다는 말이 그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 되었다는 어떤 윤리적 판별의 레토릭으로서 남용된다면, 그것은 정작 상품 생산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하여 별로 할 말이 없는 셈이다. 상품은 그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한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페이스북은 우리 모두를 인간-상품의 진열장으로 만들어놓았다는 식으로 비판해서는 도움이 될 게 크게 없다.

  •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 『블링링 (The bling ring)』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
    『블링링 (The bling ring)』
    ⓒ영화사 찬란

페이스북의 “좋아요”의 윤리적 효능을 까발리는 재치 있는 접근은, 개봉 직후 금세 잊혀버린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블링링(The bling ring)』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는 페이스북이라는 오늘날의 악(惡)과 공모하는 자들의 역겨운 패악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고등학교를 다니거나 아니면 여성주의(?) 자기계발서 「시크릿」에 심취하여 홈스쿨링을 강요하는 엄마의 자식들이다. 이 아이들은 페이스북에서 나날이 자신의 주가를 올리는 명사들에 넋을 잃는다. 그들은 자신의 스타들의 타임라인을 수시로 확인하며 그들이 시시각각 올리는 파티, 패션, 음식, 애완동물 등의 사진에 넋을 잃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약간의 용기와 사악한 격려뿐이다. 결국 그들은 패리스 힐튼 같은 백치 백만장자 스타의 집을 털고 보석과 시계, 명품 옷들을 수집하며 그들에게서 얻은 돈으로 쇼핑을 즐기고 그들이 드나들던 클럽에 출입한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눈부시게 변신한 모습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악하다 싶은 어떤 코멘트를 발견한다. “미스터 주커버그, 소셜 네트워크? 좋지요. 당신이 페이스북을 통해 만들어진 멋진 사회적 관계란 이런 것이랍니다. 갱(gang)!”

‘사회’ vs ‘소셜(social)’

이제는 철없이 “차라리 좋았던 지난 세기”란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애틋한 눈길로 돌아보게 되는 지난 세기에, ‘사회사업’이란 말이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사업이란 기부나 봉사, 혹은 복지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란 동정과 연민 같은 윤리를 통해 연결된 감정적 유대를 가리킨다. 내가 사회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은 나와 다른 자들의 삶을 상상하며 그들의 고통이나 불운을 기꺼이 자신이 겪는 것처럼 체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란 낱말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도덕적 감상주의가 배어있다. 이것이 낭만주의를 전후하여 유럽에서 계발된 윤리적 상상력이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 감각한다는 감성적 태도와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언가를 실천한다는 윤리적 태도를 접합한다.

  •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 『블링링(The bling ring)』, sns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표현하고 ‘좋아요’를 얻으면서 자신을 확인받고자 하는 이 시대 사람들의 어떤 초상을 보여준다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 『블링링(The bling ring)』, sns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표현하고 ‘좋아요’를
    얻으면서 자신을 확인받고자 하는 이 시대 사람들의 어떤 초상을 보여준다.ⓒ영화사 찬란

그리고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의 심미적인 윤리 혹은 윤리적 감수성은 오늘날에도 끈질기게 남아있다. 물론 그것은 심각한 위선이다. 그것은 타산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사회적 세계, 상품의 생산과 교환을 통해 중재되는 사회적 삶의 세계를 온전히 보전한다. 그렇지만 그런 허위에도 불구하고 사회란 말에는 타인을 향한 눈길에 깃들어야 하는 윤리적 지향이 함축되어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회란 말은 이제 반대의 것으로 뒤집혀있다. 페이스북의 “소셜(social)”은 질투와 선망, 과시와 불안이 교차하는 세계의 알레고리이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사회성의 지수이다. 페이스북에 100개의 “좋아요”가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다. 사회란 결코 너 같지 않은 나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자처하는 모나드적 인간의 함수 혹은 그것의 합이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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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서동진
서동진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 시각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 대한 문화비평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문화의 관계가 기본적 관심사이다. 저널 「맑스주의연구」, 「문화과학」, 「광주비엔날레 저널 Noon」 편집위원이며, 저서로 「변증법의 낮잠:적대와 정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디자인 멜랑콜리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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