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없는 날들이 음 없이 흘러갔다. 간혹 한두 박자가 울린 날이 있었다. 어느 날은 음악이 될 뻔한 날. 시끄럽게 지나간다. 아홉과 스물셋의 소음. 소리가 머리를 가득 채운다. 여전히 음악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김민선
스물셋, 나의 엄마는 스물셋에 결혼했다. 호방한 성격의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들로 괴로워 해야 했다.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 이후로 종종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 어떤 것들은 그림으로 나에게 박제되었다. 종종 어깻죽지를 크게 펴고 소리를 지르는 그림. 두려움의 소리가 온 벽을 치고 울리며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괴로움이 빛이 되어 들어온다.
아홉, 나는 그녀의 발 아래 내 몸 어느 한 쪽을 붙이고 있었다. 모든 붙어 있는 것들엔 그림자가 생겨나고 있었다. 어떤 날은 그녀가 태평양 건너에 가 있다고 믿은 적도 있었다. 어떤 아홉과 어떤 스물셋과 어떤 거짓과 어떤 믿음. 그때의 그녀와 나 사이에 붙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1999년의 세기말, 아홉의 나는 그녀가 돌아오길 기도했다. 묵주알을 넘기는 것은 밥에 섞인 모래를 넘기는 것과 같았다.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익숙해지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먹지 못하는 것이 없어졌다. 모래알을 먹고 진동을 먹고 공기를 먹고 모든 것을 먹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밀봉되었다고 생각했다.
스물셋, 굳어버린 아홉의 기억을 목 뒤편에 놓아두고 있었다. 이따금 그것이 손가락 사이로 묻어나올 때 발 딛고 서 있던 선분은 점이 되었다. 선 위의 것들은 죄다 점이 되어 제멋대로 부풀었다. 스물셋, 그것이 목 뒤를 타고 이마를 넘어 눈앞에 왔을 때 등 뒤엔 스크린이 있었고 앞에는 서른 명 정도의 관객이 있었다. 화면엔 촬영한 엄마의 얼굴이 투사되고 있었다. 그저 밥을 먹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스물넷, 나는 이것을 목 뒤에서 뜯어보고 싶었다. 밀봉 되었다 믿은 그것은 이미 어떤 지점에 대한 서술 가능한 이미지일 뿐이었다. 기억 해낼수록 모순 덩어리인 어떤 것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실재에 다가가고자 함은 아니었다. 조각이 맞춰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간극을 보고 싶었다. 우리의 틈에서 나오는 빛을 보고 싶었다. 우리의 15년이 그려낸 어떤 다른 그림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카메라와 마이크를 가져갔다. 그녀는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자신의 목 뒤를 더듬었다. 서로 보기에 낯선 것이었다. 서로의 것을 마주함이 힘겨웠다. 이것이 폭력이었을까. 나는 아직 모르겠다.
스물셋과 스물셋
나의 첫 번째 인문적 프로필
김민선
2016-02-25
수 없는 날들이 음 없이 흘러갔다. 간혹 한두 박자가 울린 날이 있었다. 어느 날은 음악이 될 뻔한 날. 시끄럽게 지나간다. 아홉과 스물셋의 소음. 소리가 머리를 가득 채운다. 여전히 음악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김민선
스물셋, 나의 엄마는 스물셋에 결혼했다. 호방한 성격의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들로 괴로워 해야 했다.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 이후로 종종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 어떤 것들은 그림으로 나에게 박제되었다. 종종 어깻죽지를 크게 펴고 소리를 지르는 그림. 두려움의 소리가 온 벽을 치고 울리며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괴로움이 빛이 되어 들어온다.
아홉, 나는 그녀의 발 아래 내 몸 어느 한 쪽을 붙이고 있었다. 모든 붙어 있는 것들엔 그림자가 생겨나고 있었다. 어떤 날은 그녀가 태평양 건너에 가 있다고 믿은 적도 있었다. 어떤 아홉과 어떤 스물셋과 어떤 거짓과 어떤 믿음. 그때의 그녀와 나 사이에 붙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1999년의 세기말, 아홉의 나는 그녀가 돌아오길 기도했다. 묵주알을 넘기는 것은 밥에 섞인 모래를 넘기는 것과 같았다. 먹지 말아야 하는 것도 익숙해지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먹지 못하는 것이 없어졌다. 모래알을 먹고 진동을 먹고 공기를 먹고 모든 것을 먹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밀봉되었다고 생각했다.
스물셋, 굳어버린 아홉의 기억을 목 뒤편에 놓아두고 있었다. 이따금 그것이 손가락 사이로 묻어나올 때 발 딛고 서 있던 선분은 점이 되었다. 선 위의 것들은 죄다 점이 되어 제멋대로 부풀었다. 스물셋, 그것이 목 뒤를 타고 이마를 넘어 눈앞에 왔을 때 등 뒤엔 스크린이 있었고 앞에는 서른 명 정도의 관객이 있었다. 화면엔 촬영한 엄마의 얼굴이 투사되고 있었다. 그저 밥을 먹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스물넷, 나는 이것을 목 뒤에서 뜯어보고 싶었다. 밀봉 되었다 믿은 그것은 이미 어떤 지점에 대한 서술 가능한 이미지일 뿐이었다. 기억 해낼수록 모순 덩어리인 어떤 것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실재에 다가가고자 함은 아니었다. 조각이 맞춰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간극을 보고 싶었다. 우리의 틈에서 나오는 빛을 보고 싶었다. 우리의 15년이 그려낸 어떤 다른 그림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카메라와 마이크를 가져갔다. 그녀는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자신의 목 뒤를 더듬었다. 서로 보기에 낯선 것이었다. 서로의 것을 마주함이 힘겨웠다. 이것이 폭력이었을까. 나는 아직 모르겠다.
ⓒ김민선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지금은 덴마크에서 체류중이다. 국민대학교에서 도자공예와 영상디자인이라는 꽤 다른 성향의 두 분야를 함께 공부했고 현재 동 대학원 영상디자인학과 석사과정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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