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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초판 복각본 열풍

옛 시집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나

장은수

2016-02-19


시 읽는 사람은 많지만 시집 사는 사람은 드물다. 출판계 통설이다. 해마다 좋은 시가 쏟아지고, 모여서 수없이 집을 이루어 서점으로 나오지만 독자들 주목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2011년 이후, 지난 5년 동안 교보문고 연간 베스트셀러 100위 안에 든 시집은 류시화의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하상욱의 『서울 시』, 박광수의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등 단 3권뿐이다. 30여 년 전인 1980년대는 ‘시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시집이 사랑을 받은 적도 있지만, 이미 고릿적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 최근 다시 옛 책의 외형으로 출간되어 돌풍을 일으킨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최근 다시 옛 책의 외형으로 출간되어
    돌풍을 일으킨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소와다리

그런데 최근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시집이 세 권이나 올라 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김소월의 『진달래꽃』, 백석의 『사슴』이다. 세 권의 책 모두 익숙하다.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보았을 명시집이다. 시인들 이름 역시 한국 현대시를 대표한다. 시집에 담긴 시들도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작품들이다. 이런 훌륭한 시집들이 많이 팔리는 것은 혹여 시의 시대가 부활하려는 조짐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시대적 의미가 있는 걸까.

복각본인가, 영인본인가?

이 시집들은 모두 소와다리라는 출판사에서 이른바 ‘복각본’으로 출판되었다. 복각이란 옛날에 출판된 서적이나 잡지를 원형 그대로 살려 다시 출판한다는 말이다. 당시의 활자, 종이, 제책 방식까지를 물리적으로 가깝게 재현하는 경우에 쓴다. 하지만 소와다리의 판본은 사진을 찍거나 스캔을 떠서 그 모양만 비슷하게 복원한 후, 지질 좋은 종이에 최신 인쇄기를 이용해서 출판하므로 사실상 고급 ‘영인본’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편집자가 기획한 콘셉트 그대로, ‘오리지널 디자인’을 살린 책이다. 그러니 이 시집들이 ‘복각본’이라 불리는 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 역시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을 채택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김소월의 『진달래꽃』
  • 역시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을 채택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김소월의 『진달래꽃』
    ⓒ소와다리

『진달래꽃』은 1925년 경성의 매문사에서 초판이 나왔다. 초판본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책은 단 4부 뿐으로, 그중 하나인 중앙서림 총판본이 지난해 12월 경매에서 근대 출판물로는 사상 최고가인 1억 3500만 원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었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와다리의 초판본 『진달래꽃』은 그보다 한 달 먼저인 11월에 출판되었다.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이라는 기획 콘셉트에 걸맞게 초판본 장정을 살려서 최대한 원본 느낌이 나도록 만들었다. 요즘엔 낯선 세로쓰기로 조판을 하고 제책을 오른쪽 넘김으로 했다. 옛날식 맞춤법도 살리고 한자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가독성이 떨어지는 당시 인쇄 상태까지 재현하려 애썼다. 편집자가 세부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쓴 제법 공들인 기획물이다.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 서거 10주년을 맞이하여 1955년에 정음사에서 간행된 증보판을 되살린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에 최초 간행된 초판본이 별도로 있다. 시인은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고, 이 시집은 살아생전에 친구인 정병욱에게 맡긴 육필 원고를 바탕 삼아 만들어진 것이다. 10주기 기념 증보판은 이 시집에 유족들이 따로 보관하던 원고를 더해 출판한 책으로, 시인의 주요 작품이 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역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형태로  다시 출간된 백석의 『사슴』
  • 역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형태로
    다시 출간된 백석의 『사슴』 ⓒ소와다리

백석의 『사슴』은 1936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자비출판으로 겨우 100부 밖에 찍지 않은 전설의 명품이다. 『진달래꽃』 이전, 경매에서 7,000만 원에 낙찰되어 최고가를 기록했던 책이기도 하다. 전통 자루매기 기법으로 양장 제본되고, 한지에 아름답게 인쇄된 데다 평안도 사투리에 얹어 삶에 두터운 질감을 부여하는 정감 어린 작품 덕분에 당대 시인들이 다투어 소장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 책은, 2005년 『시인세계』 설문조사에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거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 1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 판매를 실시한 날, 하루 만에 무려 2,500부의 주문이 밀려들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책스타그램을 공유하는 우아한 소비자들의 등장

이 시집들이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데에는 소장욕구를 자극하는 소와다리 출판사의 『초판본 진달래꽃』 마케팅이 한몫을 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이 책을 주문하면, ‘경성부 연건동 121번지 김정식’이라고 적힌 누런 봉투에 담아 배송을 해 준다. 소월의 본명이 김정식이다. 이 책을 받는 독자들은 세월을 가로질러 시인 본인에게 직접 선물을 받는 듯한 커다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정말 기발한 이 발상은 독자들 사이에서 거대한 입소문을 일으켰다.

  • 독자들에게 열풍을 일으킨 옛스런 마케팅 광고
  • 독자들에게 열풍을 일으킨 옛스런 마케팅 광고 ⓒ소와다리

독자가 감동하면 반드시 보답을 받는 법이다. 열풍은 사진 공유 소셜미디어인 인스타그램에서 시작되었다. (인스타그램은 주로 20대 여성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일상을 공유할 때 가장 많이 이용한다.) 인스타그램은 또 다른 소셜미디어인 페이스북과 흔히 연동해서 사용하므로 자연스레 다른 연령층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시집의 독자 역시 여성이 대부분이고, 그중에서도 20대가 압도적이다. 소셜미디어 이용자들과 책 독자들은 라이프 그래프가 어느 정도 일치하므로 이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이 연결되는 초연결사회에서 모든 사건은 정보의 형태로 인지된다.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보화되지 않은 것은 손쉽게 공유되거나 확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과 같이 실제로 읽어보기 전에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없는 사물은 경험재로 수용되지 않고, 메타 정보(서지, 기사, 서평, 별점, 댓글 등)만으로 가치가 지레짐작되는 탐색재로 소비되는 성향이 높아진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책이 아니라 정보가 먼저 소비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자들이 구매 경험을 공유하고 싶도록 뜻깊은 경험을 만들어준 소와다리의 마케팅은 적절하고 강렬했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흔히 사물이나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먹는 음식, 입는 옷, 존재하는 장소, 보는 영화, 듣는 음악, 겪은 체험 등이 곧바로 정체성을 이룬다. 우리가 읽는 책도 우리 자신을 드러낸다. 김소월, 윤동주, 백석의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을 살린 시집들을 보유하고,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사진 찍어 올리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가장 우아하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어찌 보면 소셜미디어에서 이 시집의 이미지들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시의 가치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아니라, 적은 비용으로 높은 문화적 만족을 준 이 시집들을 작은 사치로서 사랑하는 소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우아한 소비가 시에 대한 본원적 갈망을 일으킬 것을 바랄 뿐이다.

옛 시집 열풍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

소와다리의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판 열풍은 출판기획자들에게 적어도 세 가지 생각할 지점을 뚜렷하게 남겼다. 첫째, 데이터가 쏟아져 내리는 정보과잉 시대에 독자들은 진실과 거짓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질 높은 정보에 대한 갈망으로 목말라 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조심스럽게 선별해서 적절한 형태로 제시하는 큐레이션은 출판의 영원한 의무로서, 그 역할에 충실할 경우 회사나 자본의 크기에 관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종이책 같은 물리적 문화상품의 경우, 콘텐츠 자체의 질이 높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콘텐츠와 결합한 좋은 경험을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꼼꼼하게 기획되어 향수를 불러일으키도록 잘 디자인된 책들의 물성은 여전히 출판이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물성을 혁신하고 이를 독자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우면 독자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복각은 출판의 오랜 전통에 속한다. 복각을 행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예전에 나온 책을 무조건 복각해서는 안 된다. 일단, 책을 본래 출판했던 출판사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일단 양해를 구해야 한다. 저자의 저작권이 소멸했다 하더라도 장정가나 해설가 등 편집과 관련한 저작권은 살아 있는 등 여러 권리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이 문제는 여전히 수록 내용을 꼼꼼히 살펴서 저작권의 소멸 여부를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의 복각본 전문 출판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직원을 따로 두고 있을 정도이다.

오랜만에 시집이 독자들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열풍이 오래도록 이어져, 마침내 요즘 시집들까지 사랑으로 적셔 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옛 인쇄의 상태까지 그대로 재현하고자 한 시집의 내지 일부

    옛 인쇄의 상태까지 그대로 재현하고자 한 시집의 내지 일부. 상당한 고심의 흔적이 엿보인다. ⓒ소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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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장은수
장은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출판편집자 겸 문학평론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민음사 대표이사(편집인)을 거쳐 현재 순천향대학교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편집문화실험실을 열어 책이라는 미디어의 가능성과 출판의 미래상을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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