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생생한 꿈이 있습니다. 옛날의 장터 같은 곳이었는데, 사고파는 사람들 뿐 아니라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리를 하는 사람, 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거긴 한국도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독일도 아닌 뒤섞인 곳이었습니다. 어슬렁거리는 많은 사람들 틈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쫓겨서 도망치고 있었어요. 어디에도 숨을 만한 곳이 보이질 않아 난처한 지경인데, 박수무당 한 사람이 멍석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내게 눈길을 보내겠지요. 그 눈길은 바닥에 던져져있는 빨간 천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저 아래로 숨으라는 뜻이구나 싶어 그 보자기 밑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지요. 이제 살았구나 했는데 그 순간, 땅바닥에 박고 있는 내 머리 위로 도예가들이 흙을 자를 때 쓰는 그런 철사가 내려왔습니다. 속았구나! 목이 잘려나갈 그 순간에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소리도 못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깨어나서도 한참동안 숨을 몰아쉬며 진정해야했지요.
그 당시 나는 심리치료사에게 다니고 있었습니다. 독일생활을 한지 10여년 정도 됐었는데, 잘 적응하며 살고 있었던 것 같던 삶이 뒤죽박죽, 오리무중, 내가 누군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하는지, 생각만 복잡할 뿐 도무지 아무것도 선명하게 보이질 않아서,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지요. 나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누군가가 선입견 없이 내 얘기를 들어주길 늘 간절히 바라왔었습니다. 그 꿈에 대해 물론 다음 상담시간에 얘기했지요. 그이는 내게 꿈에서와 같은 자세를 다시 한 번 취해보라고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윗몸은 가능한 한 조그맣게 만들어 땅바닥에 붙이고, 팔은 몸 앞으로 뻗어서 머리 주위를 막아주는 그런 자세였습니다. 꿈에서의 공포감이 다시 밀려드는 듯 했는데, 그 자세로 머물며 정말 어떤 느낌이 드는지 보라고 하더군요. 그 자세로 머무는 동안 빨간 보자기가 마치 내 몸 위에 덮여있는 듯하고, 나의 두 팔 사이에서는 내 스스로의 숨이 그대로 느껴지고, 나의 몸은 동그랗게 모여 나와 나의 몸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치료사는 그 상태에서 머리가 없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머리가 없다면? 아, 이 머리가 없다면 이 많은 복잡한 생각이 없겠구나 싶으니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며 편안해지더군요. 내 숨을 느끼며 나만이 나와 있는 그 '보자기' 밑이 너무나 안온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엄마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갖는 느낌이 그런 걸까 싶었어요.
그 꿈이 내게 하고자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 이후, 나는 참선을 정말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을 한데로 모으고, 생각에 치이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절실해졌지요.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나는 소용돌이 바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였어요. 내가 읽은 참선을 비롯한 좋다는 책들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머릿속에서 짐이 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삶으로 옮겨지지 않는 지식들, 삶에서 말미하지 않는 지식들은 정보일 뿐이라는 것을 내 존재의 깊이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귀에 박히게 들은 얘기입니다, 서양인들은 버스를 타고도, 기차를 타고도 늘 책을 읽으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데, 한국 사람들은 멍하니 있거나 졸고 있을 뿐이라고요. 시간을 잘 활용해서 허비하지 않아야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는 선진국의 대열에 끼기 위해, 미개하지 않기 위해, 얕보이지 않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한국에 다녀온, 혹은 독일에서 한국인 교포 1세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빨리빨리' 입니다. 요즘은 지하철에서도 자동차를 몰면서도 심지어 대화중에도 우리는 계속 무언가를 '더'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닌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보'를 쉴 새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정보는 시·청각적으로 너무나 빨리, 엄청난 양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내 스스로 생각을 할 여유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게 아니라 정보를 교환하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들이 나의 자율적인 사고를 방해하는지 조차 감지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잊은 채 어렴풋이 어떤 목표가 있었다는 생각만으로 어서어서 가자고 다그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없는 완벽한 고요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 고요를 그리워하지 못하게 수많은 장치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고요를 완전히 잊어버렸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꿈을 통해서건 심신의 고통을 통해서건 우리의 본성은 계속 신호를 보내옵니다. 그 신호를 알아채려면 우리는 고요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에겐 '멍하게' 있는 공백의 시간이 필요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지루한 시간 - 즉 시간표가 없이 스스로 재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창조적인 지루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정말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24살이던 1899년 9월 22일에 썼다고 전해지는 시를 여기 소개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시일 겁니다. 릴케가 시인으로의 성장을 시작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연상의 연인이었던 루 안드레아 살로메와 함께한 첫 러시아 여행 후에 쓴 것 같습니다. 이 시는 수도자의 기도로 읽어야 한다고 문학자들은 얘기합니다. 이 시의 '너'가 신인지 연인인지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의 존재 깊숙이에서 부터 그리워하는 그 무엇이 '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본인의 글도 읽는 분께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각, 삶을 고양시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위해 생각 이 전의 고요를 '수행'하시길 기원하면서 릴케의 시 〈단 한번만이라도 이렇게 완전히 고요하다면〉을 전합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이렇게 완전히 고요하다면.
우연한 것들과 어슴푸레한 것들,
그리고 이웃의 웃음소리가 침묵되고,
나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소음들이 깨어있는 나를
너무 방해하지 않는다면 - :
그러면 난 천 배로 확장된 생각 속에서
너를, 너의 가장자리까지 생각할 수 있을 테고,
너를 모든 생명에게 감사처럼 선물할 수 있도록
(한 미소를 짓는 동안만큼만) 너를 소유할 수 있을 텐데.” -이 시는 필자가 번역했습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하고, 1981년 도독해 함부르크의 국립조형미술대학교에서 섬유디자인과 회화를 전공했다. 이후 예술가로서 활동, 독일,스웨덴, 미국, 프랑스, 한국 등지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었고, 2009년에는 프랑스의안무가와 함께 기획한 퍼포먼스를 예술의 전당 (서울)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2007년 부터 불교와 서양심리학을 접목하는 관상심리학을 공부하고, 독일 정부가 인정하는심리치유사 자격을 취득, 현재 함부르크애서 개업하여 심리치유와 명상지도를 하고 있다. 그는 예술과 참선은 그의 모든 삶의 자양분이라고 말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단 한번만이라도 이렇게 완전히 고요하다면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이렇게 완전히 고요하다면
이승연
2015-11-30
2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생생한 꿈이 있습니다.
옛날의 장터 같은 곳이었는데, 사고파는 사람들 뿐 아니라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리를 하는 사람, 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거긴 한국도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독일도 아닌 뒤섞인 곳이었습니다. 어슬렁거리는 많은 사람들 틈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쫓겨서 도망치고 있었어요. 어디에도 숨을 만한 곳이 보이질 않아 난처한 지경인데, 박수무당 한 사람이 멍석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내게 눈길을 보내겠지요. 그 눈길은 바닥에 던져져있는 빨간 천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저 아래로 숨으라는 뜻이구나 싶어 그 보자기 밑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지요. 이제 살았구나 했는데 그 순간, 땅바닥에 박고 있는 내 머리 위로 도예가들이 흙을 자를 때 쓰는 그런 철사가 내려왔습니다. 속았구나! 목이 잘려나갈 그 순간에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소리도 못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깨어나서도 한참동안 숨을 몰아쉬며 진정해야했지요.
그 당시 나는 심리치료사에게 다니고 있었습니다. 독일생활을 한지 10여년 정도 됐었는데, 잘 적응하며 살고 있었던 것 같던 삶이 뒤죽박죽, 오리무중, 내가 누군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하는지, 생각만 복잡할 뿐 도무지 아무것도 선명하게 보이질 않아서,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지요. 나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누군가가 선입견 없이 내 얘기를 들어주길 늘 간절히 바라왔었습니다. 그 꿈에 대해 물론 다음 상담시간에 얘기했지요. 그이는 내게 꿈에서와 같은 자세를 다시 한 번 취해보라고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윗몸은 가능한 한 조그맣게 만들어 땅바닥에 붙이고, 팔은 몸 앞으로 뻗어서 머리 주위를 막아주는 그런 자세였습니다. 꿈에서의 공포감이 다시 밀려드는 듯 했는데, 그 자세로 머물며 정말 어떤 느낌이 드는지 보라고 하더군요. 그 자세로 머무는 동안 빨간 보자기가 마치 내 몸 위에 덮여있는 듯하고, 나의 두 팔 사이에서는 내 스스로의 숨이 그대로 느껴지고, 나의 몸은 동그랗게 모여 나와 나의 몸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치료사는 그 상태에서 머리가 없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머리가 없다면? 아, 이 머리가 없다면 이 많은 복잡한 생각이 없겠구나 싶으니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며 편안해지더군요. 내 숨을 느끼며 나만이 나와 있는 그 '보자기' 밑이 너무나 안온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엄마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갖는 느낌이 그런 걸까 싶었어요.
그 꿈이 내게 하고자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 이후, 나는 참선을 정말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을 한데로 모으고, 생각에 치이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절실해졌지요.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나는 소용돌이 바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였어요. 내가 읽은 참선을 비롯한 좋다는 책들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머릿속에서 짐이 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삶으로 옮겨지지 않는 지식들, 삶에서 말미하지 않는 지식들은 정보일 뿐이라는 것을 내 존재의 깊이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귀에 박히게 들은 얘기입니다, 서양인들은 버스를 타고도, 기차를 타고도 늘 책을 읽으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데, 한국 사람들은 멍하니 있거나 졸고 있을 뿐이라고요. 시간을 잘 활용해서 허비하지 않아야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는 선진국의 대열에 끼기 위해, 미개하지 않기 위해, 얕보이지 않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한국에 다녀온, 혹은 독일에서 한국인 교포 1세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빨리빨리' 입니다. 요즘은 지하철에서도 자동차를 몰면서도 심지어 대화중에도 우리는 계속 무언가를 '더'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닌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보'를 쉴 새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정보는 시·청각적으로 너무나 빨리, 엄청난 양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내 스스로 생각을 할 여유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게 아니라 정보를 교환하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들이 나의 자율적인 사고를 방해하는지 조차 감지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잊은 채 어렴풋이 어떤 목표가 있었다는 생각만으로 어서어서 가자고 다그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없는 완벽한 고요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 고요를 그리워하지 못하게 수많은 장치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고요를 완전히 잊어버렸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꿈을 통해서건 심신의 고통을 통해서건 우리의 본성은 계속 신호를 보내옵니다. 그 신호를 알아채려면 우리는 고요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에겐 '멍하게' 있는 공백의 시간이 필요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지루한 시간 - 즉 시간표가 없이 스스로 재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창조적인 지루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정말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24살이던 1899년 9월 22일에 썼다고 전해지는 시를 여기 소개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시일 겁니다. 릴케가 시인으로의 성장을 시작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연상의 연인이었던 루 안드레아 살로메와 함께한 첫 러시아 여행 후에 쓴 것 같습니다. 이 시는 수도자의 기도로 읽어야 한다고 문학자들은 얘기합니다. 이 시의 '너'가 신인지 연인인지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의 존재 깊숙이에서 부터 그리워하는 그 무엇이 '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본인의 글도 읽는 분께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각, 삶을 고양시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위해 생각 이 전의 고요를 '수행'하시길 기원하면서 릴케의 시 〈단 한번만이라도 이렇게 완전히 고요하다면〉을 전합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이렇게 완전히 고요하다면.
우연한 것들과 어슴푸레한 것들,
그리고 이웃의 웃음소리가 침묵되고,
나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소음들이 깨어있는 나를
너무 방해하지 않는다면 - :
그러면 난 천 배로 확장된 생각 속에서
너를, 너의 가장자리까지 생각할 수 있을 테고,
너를 모든 생명에게 감사처럼 선물할 수 있도록
(한 미소를 짓는 동안만큼만)
너를 소유할 수 있을 텐데.” -이 시는 필자가 번역했습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하고, 1981년 도독해 함부르크의 국립조형미술대학교에서 섬유디자인과 회화를 전공했다. 이후 예술가로서 활동, 독일,스웨덴, 미국, 프랑스, 한국 등지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었고, 2009년에는 프랑스의안무가와 함께 기획한 퍼포먼스를 예술의 전당 (서울)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2007년 부터 불교와 서양심리학을 접목하는 관상심리학을 공부하고, 독일 정부가 인정하는심리치유사 자격을 취득, 현재 함부르크애서 개업하여 심리치유와 명상지도를 하고 있다. 그는 예술과 참선은 그의 모든 삶의 자양분이라고 말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단 한번만이라도 이렇게 완전히 고요하다면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댓글(0)
시작을 위하여
장석주
인문(人文)은 ‘인간다움’을 추구한다
함돈균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