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들과의 교전 장면 전에 정조가 호위 군사들에게 신호용 효시(소리가 나는 화살)를 발사하여 신호를 주는 모습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정조의 활 쏘는 손을 보면, 서양식 양궁 사법(射法)으로 활을 쏘고 있다.
이런 무예사와 군사사 고증 관련 문제를 20년 가까이 공식적으로 제기해도 결코 고쳐지지 않는다.
악습 중의 악습이고, 고질병이다.
작가적 상상력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얼마 전 ‘역사 왜곡’ 논란으로 SBS 사극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결국 중간에 방영 취소되었고, 연출가뿐만 아니라 출연진까지도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를 두고 한편에서는 ‘부실한 역사 고증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과도한 애국주의’와 ‘작가 상상력 제한’ 등의 비판적인 의견을 조심스레 내비치기도 하였다.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영 취소된 SBS 사극 드라마 <조선구마사> (이미지 출처: SBS)
이러한 사극 드라마의 역사 고증 문제는 이번뿐 아니라 이미 1970~80년대부터 꾸준하게 제기되어왔다. 포털 사이트 뉴스 검색에 ‘사극 고증’이라는 검색어를 치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히 사극(史劇) 드라마의 경우는 드라마라는 속성상 사실(Fiction)과 허구(Non-fiction)를 넘나드는 작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극이 전개되기에 역사에 대한 색다른 접근 또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일단 재미가 있어야 시청률도 오르고, 그래야 제작비 문제도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대중매체에서 영상으로 만들어진 사극뿐만이 아니라,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되어야 할 역사 다큐멘터리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기에 매우 우려스럽다. 과도한 작가적 상상력은 또 다른 역사 폭력의 문제로 전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역사 다큐로 전염된 고증 문제
‘방송사나 다큐멘터리 제작사에서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우선 순위로 올리는 연출가나 관계자가 누구일까?’를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바로 사극 드라마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던 연출가와 관계자이다. 이미 관련 역사물 제작 경험이 풍부하기에 촬영 일정을 짜는 등의 실무적인 작업을 하는 데 익숙하거니와 작품의 품질 역시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기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으로 보인다. 사극 드라마 제작 경험이 없는 연출이 뽑혔을지라도 조연출, 의상, 세트, 소품을 담당하는 스태프 등은 현실적으로 사극 드라마에 몸담았던 업체나 인물들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 역사 다큐를 만드는 데 <북극의 눈물>이나 <차마고도> 등을 찍었던 자연 다큐 연출가나 스태프들을 붙이기에는 위험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또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력이 열성을 다해 만든다고 해도 TV 역사 다큐멘터리는 속성상 고증에 대한 한계가 종종 노출되는 장르다. 이에 필자는 지난 2013년 10월에 3부작으로 제작·방영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을 중심으로 TV 역사물의 고증 한계와 그 대안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013년 10월에 제작·방영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이미지 출처: KBS1)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왜 굳이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다큐멘터리를 예시로 삼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역사 관련 다큐멘터리 중 가장 멋지게 잘 만들었고, 공영 방송사에서 귀한 상도 받았으며, 영화관에서 3D 상영까지 했던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도 많이 있지만, 유튜브 등에 업로드된 내용을 지금 다시 봐도 오래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명작이다.
‘정조(正祖)’라는 가장 뜨거운 인물을 다룬 야심작
정조(正祖)(조선 22대 왕, 1752~1800)는 조선 최대의 비극으로 각인된, 국왕의 다음 대를 이을 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사건인 ‘임오화변’(1762)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둔 슬픈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침소에 끊임없이 자객들이 몰려오는 위협을 당했지만, 이를 물리치고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높였던 강인한 임금이었다. 개혁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비로소 조선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 수 있었던 무렵인 1800년 6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왕이기도 하다.
그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국왕이 정조이기에 그의 이야기는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늘 최고의 소재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비록 무거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차마고도>, <누들로드> <슈퍼피쉬> 등으로 다큐멘터리 제작 역량을 뽐낸 KBS에서 야심차게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이야기를 다큐로 풀어낸 것이다.
이 의궤의 내용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서울에서 출발, 수원 화성을 다녀온 8일간의 기록이다. 본 다큐는 3부작으로 2년의 제작 기간, 총 제작비 15억여 원이 소요되었다. 3D를 비롯해서 특수 영상 제작비만 해도 수억 원이 넘게 소요되었을 법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화룡점정이 되었어야 할 결정적인 장면에 고증 오류가 발생하고 말았다.
일본도를 차거나 칼을 손에 들고 있는 고증 오류
사극의 군사나 전투 관련 장면에서 가장 쉽게 발견되는 오류는 칼을 손에 도적처럼 덜렁덜렁 들고 다니는 모습이다. 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이 20년 가까이 문제 제기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조선의 칼 패용법은 ‘환도(環刀)’ 패용이라고 해서 칼집에 '띠돈'이라는 특수 회전형 고리를 달아 360도 회전이 가능한 형태로 몸에 착용하였다. 그래서 실제로 본 다큐의 핵심 소재인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원래 사료에서도 명확하게 칼의 손잡이가 뒤를 가도록 군사들이 환도를 패용하고 있다. 의궤에 등장하는 군사 중 단 한 사람도 칼을 손에 들고 가지 않는다.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정조반차도>에 나오는 환도 패용 모습.
기병과 보병 모두가 손잡이가 뒤로 가도록 칼을 찼다.
그러나 본 다큐에서는 수백 명의 군사 모두 칼을 손에 덜렁덜렁 들고 행렬을 한다. 심지어 정조의 최측근 호위 무관은 조선의 환도 대신 일본도를 일본 사무라이처럼 허리춤에 끼워 넣고 정조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다. 자! 칼을 손에 들고 다니는 조선군이 적군을 만나 칼을 뽑으면 칼집은 어디에 둘 것인가? 버릴 것인가? 아니면 한 손에는 칼집을 들고 나머지 한 손만으로 싸울 것인가? 고증은 상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지적하는 것도 지겨울 정도다.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일본도를 허리에 끼워 넣은 호위 무관 (이미지 출처: KBS1)
불화살이 하늘을 가르고, 총통의 발사체가 폭발한다고?
정조가 수원 화성 서장대에 올라 직접 지휘했던 야간 군사 훈련인 야조(夜操) 장면에서 불화살이 하늘을 가르고, 과녁에 박히며 활활 타오르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밤하늘에 멋지게 날아가는 불화살, 정말 멋진 장면이다. 사극에서 가장 애용하는 야간 전투의 명장면이다. 그러나 이는 화약이 개발되기 이전인 고려 중기 이전의 화전(火箭) 방식이다. 정조 시대에는 화살에 작약통이라는 화약통을 붙이거나 화약을 붙인 천을 감아 심지에만 불을 붙여 날아가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특히 불화살은 본 다큐처럼 결코 활활 타며 날아갈 수 없다. 화살이 초당 65m/s라는 엄청난 속도로 공기가 꽉 찬 허공을 날아가는 것이다. 불길이 활활 타기는커녕 안 꺼지는 것이 다행이다. 그래서 실제 사극 촬영 모습을 살펴보면, 불을 붙여 발사하는 장면까지만 한 프레임으로 놓고, 나머지는 스태프진이 불붙인 화살을 손으로 던져 그다음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왜? 활로 쏘면 속도 문제로 불화살이 꺼지니까. 더 큰 문제는 다음 장면에서는 작약통 방식의 화전인 신기전이 하늘을 가르고 있다는 점이다. 앞뒤가 서로 안 맞는 고증을 보여주면서 작가적 상상력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불 붙은 불화살 (이미지 출처: KBS1)
이와는 반대로 천자총통이나 호준포를 비롯한 전통 화포류의 무기는 몇백 년을 앞당기기도 한다. 야간 군사 훈련 시 화성 성곽 중 공심돈(空心墩, 성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높은 망루의 가운데를 비워둔 시설물)에서 발사한 다양한 화약 무기들이 멀리 날아가 멋지게 불바다를 이루며 폭발하는 장면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충격 신관형 폭발물은 서양에서도 19세기 중반에나 만들어진 근대식 무기로 당시에는 돌덩어리나 쇠뭉치가 날아가기에 폭발과 함께 화염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둥근 무쇠뭉치 혹은 돌무더기가 날아가는 것이다.
활쏘기, 무기에 있어서의 오류
자객들과의 교전 장면 전에 정조가 호위 군사들에게 신호용 효시(嚆矢, 소리가 나는 화살)를 발사하여 신호를 주는 모습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정조의 활 쏘는 손을 보면, 서양식 양궁 사법(射法)으로 활을 쏘고 있다. 이런 무예사와 군사사 고증 관련 문제를 20년 가까이 공식적으로 제기해도 결코 고쳐지지 않는다. 악습 중의 악습이고, 고질병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엄지손가락에 깍지라는 보조 기구를 끼워 쏘는 엄지걸이 방식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정조가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설정을 해서 다큐를 만든 것인가? 아니면 하멜처럼 조선에 온 이방인에게 서양 방식의 활쏘기를 익힌 것으로 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인가?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정조의 서양식 활 깍지걸이 방식 (이미지 출처: KBS1)
이 다큐의 근본이 되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는 군사 훈련의 순서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훈련 명령 체계는 기본적으로 국왕-병조판서-선전관-신호 군사 등으로 이어지며, 이 과정에서 깃발, 군사 신호용 악기, 군사 신호용 포 등이 다양하게 나와야 섬세하게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다. 그러나 다큐에서는 과감히 모든 것이 생략되었다.
수천 아니 수만의 군사를 지휘하는데 목소리로 지휘를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북, 징, 나발, 신호포를 비롯한 청각적 신호 체계와 군사 신호용 깃발로 대표되는 수많은 시각적 신호 체계가 연동되어야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텔레비전 사극처럼 이 다큐에서도 장수들은 오로지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군사들을 지휘 통제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군사 훈련 지휘 신호 체계 고증 오류.
명령을 복창하는 군사는 손에 칼을 들고 목청껏 외친다. (이미지 출처: KBS1)
현대전에서도 가장 먼저 타격해야 할 대상이 적의 지휘부, 즉 지휘 통제소라는 것은 이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지휘 통제 기능의 마비는 곧 전투의 패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사 훈련 시 가장 철저하게 지켜지는 것이 신호 체계이며 다큐라면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영상화시키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아쉽게도 이 다큐 역시 사극처럼 목이 터져라 장수가 소리를 지를 뿐이고, 적의 매복을 살피는 당보군(塘報軍, 군사 훈련이나 전투 상황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어 알리는 임무를 맡은 군사)은 현대 항공 모함 전투기 이착륙 때나 사용하는 두 개의 수기(手旗)를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 또한 칼은 손에 들거나 혹은 일본도처럼 패용을 한다. 용맹함의 상징인 장용영(壯勇營, 정조 때 설치한 국왕 전용 호위 부대) 군사들의 전투 무기로 활용한 등패(藤牌, 등나무로 만든 둥근 방패)의 크기는 앉으면 상반신 전체를 가려야 하는 크기여야 함에도 마치 머리에 쓰는 갓 크기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그려내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두 개의 수기를 활용한 수신호 (이미지 출처: KBS1)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삿갓 크기의 등패 (이미지 출처: KBS1)
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등패. 등패는 앉았을 경우 상반신 전체를 방호 가능할 정도의 크기다.
사극의 고증 오류는 교육적 역사 다큐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쳐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군사사나 무예사를 다룬 영상들에서는 어김없이 고증 오류가 발견된다. 가장 역동적이기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극 드라마의 전쟁과 전투 장면에서는 앞에서 지적된 오류들이 대부분 그대로 반복된다. 아니 바로 그 ‘작가적 상상력’이 충만해야 할 역사 드라마 때문에 보다 ‘교육적이고 사실적’이어야 할 역사 다큐멘터리까지도 그대로 고증 오류 문제가 전염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사극 드라마 제작진들은 앞에서 언급한 사례를 한두 번쯤은 들었을 것이 분명할 텐데, 촬영 비용 문제를 들며 아직도 뒷짐만 지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학생들은 학교에서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역사 교육을 받고 있다. 중고등학생 시절 역사 다큐멘터리를 역사 수업의 보조 교재로 체험했던 경험은 거의 누구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TV 사극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 아니 각인되고 있다. 역사 왜곡은 그리 먼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고증 오류를 저지른 작품들이 한류라는 이름으로 일본이나 중국 등에 소개되면 그곳 시청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기조차 두려울 지경이다.
드라마 제작에서 작가적 상상력은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지만, 과도한 상상력은 또 다른 역사 폭력이 될 수 있다.
* 본 칼럼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정조 호위 무관이 일본도를? ... 이러시면 안 됩니다>(2013. 10. 27.) 원고를 수정·보완한 칼럼입니다.
역사학 박사,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24기를 27년간 수련하고 공부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경기대학교에서 Post-doc 연구원을 거쳐 문화사와 무예사를 연구해 왔다. 현재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시범단에서 상임 연출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전통무예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정조의 무예사상과 장용영』(2015), 『조선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2016), 『무예인문학』(2017), 『병서, 조선을 말하다』(2018), 『조선후기 무예사 연구』(2019), 『제국의 몸, 식민의 무예』(2020), 『正譯 武藝圖譜通志』(2021) 등 십여 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조선시대 활쏘기 중 철전(六兩弓) 사법의 특성과 그 실제」(2020), 「조선시대 야간군사훈련 ‘夜操(야조)’를 활용한 ‘불의 축제’ 역사 문화콘텐츠」(2019), 「육군박물관 소장 <무예도보통지> 편찬의 특징과 그 활용」(2018), 「협도의 탄생」(2017), 「조선후기 권법의 군사무예 정착에 대한 문화사적 고찰」(2016) 등 30여 편의 무예사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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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적 상상력’을 빙자한 또 다른 역사 폭력의 가능성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최형국
2021-06-04
음성으로 듣기
13분 15초 읽기자객들과의 교전 장면 전에 정조가 호위 군사들에게 신호용 효시(소리가 나는 화살)를 발사하여 신호를 주는 모습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정조의 활 쏘는 손을 보면, 서양식 양궁 사법(射法)으로 활을 쏘고 있다.
이런 무예사와 군사사 고증 관련 문제를 20년 가까이 공식적으로 제기해도 결코 고쳐지지 않는다.
악습 중의 악습이고, 고질병이다.
작가적 상상력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얼마 전 ‘역사 왜곡’ 논란으로 SBS 사극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결국 중간에 방영 취소되었고, 연출가뿐만 아니라 출연진까지도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를 두고 한편에서는 ‘부실한 역사 고증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과도한 애국주의’와 ‘작가 상상력 제한’ 등의 비판적인 의견을 조심스레 내비치기도 하였다.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영 취소된 SBS 사극 드라마 <조선구마사> (이미지 출처: SBS)
이러한 사극 드라마의 역사 고증 문제는 이번뿐 아니라 이미 1970~80년대부터 꾸준하게 제기되어왔다. 포털 사이트 뉴스 검색에 ‘사극 고증’이라는 검색어를 치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히 사극(史劇) 드라마의 경우는 드라마라는 속성상 사실(Fiction)과 허구(Non-fiction)를 넘나드는 작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극이 전개되기에 역사에 대한 색다른 접근 또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일단 재미가 있어야 시청률도 오르고, 그래야 제작비 문제도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대중매체에서 영상으로 만들어진 사극뿐만이 아니라,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되어야 할 역사 다큐멘터리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기에 매우 우려스럽다. 과도한 작가적 상상력은 또 다른 역사 폭력의 문제로 전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역사 다큐로 전염된 고증 문제
‘방송사나 다큐멘터리 제작사에서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우선 순위로 올리는 연출가나 관계자가 누구일까?’를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바로 사극 드라마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던 연출가와 관계자이다. 이미 관련 역사물 제작 경험이 풍부하기에 촬영 일정을 짜는 등의 실무적인 작업을 하는 데 익숙하거니와 작품의 품질 역시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기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으로 보인다. 사극 드라마 제작 경험이 없는 연출이 뽑혔을지라도 조연출, 의상, 세트, 소품을 담당하는 스태프 등은 현실적으로 사극 드라마에 몸담았던 업체나 인물들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 역사 다큐를 만드는 데 <북극의 눈물>이나 <차마고도> 등을 찍었던 자연 다큐 연출가나 스태프들을 붙이기에는 위험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또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력이 열성을 다해 만든다고 해도 TV 역사 다큐멘터리는 속성상 고증에 대한 한계가 종종 노출되는 장르다. 이에 필자는 지난 2013년 10월에 3부작으로 제작·방영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을 중심으로 TV 역사물의 고증 한계와 그 대안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013년 10월에 제작·방영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이미지 출처: KBS1)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왜 굳이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다큐멘터리를 예시로 삼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역사 관련 다큐멘터리 중 가장 멋지게 잘 만들었고, 공영 방송사에서 귀한 상도 받았으며, 영화관에서 3D 상영까지 했던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도 많이 있지만, 유튜브 등에 업로드된 내용을 지금 다시 봐도 오래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명작이다.
‘정조(正祖)’라는 가장 뜨거운 인물을 다룬 야심작
정조(正祖)(조선 22대 왕, 1752~1800)는 조선 최대의 비극으로 각인된, 국왕의 다음 대를 이을 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사건인 ‘임오화변’(1762)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둔 슬픈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침소에 끊임없이 자객들이 몰려오는 위협을 당했지만, 이를 물리치고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높였던 강인한 임금이었다. 개혁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비로소 조선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 수 있었던 무렵인 1800년 6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왕이기도 하다.
그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국왕이 정조이기에 그의 이야기는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늘 최고의 소재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비록 무거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차마고도>, <누들로드> <슈퍼피쉬> 등으로 다큐멘터리 제작 역량을 뽐낸 KBS에서 야심차게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이야기를 다큐로 풀어낸 것이다.
이 의궤의 내용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서울에서 출발, 수원 화성을 다녀온 8일간의 기록이다. 본 다큐는 3부작으로 2년의 제작 기간, 총 제작비 15억여 원이 소요되었다. 3D를 비롯해서 특수 영상 제작비만 해도 수억 원이 넘게 소요되었을 법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화룡점정이 되었어야 할 결정적인 장면에 고증 오류가 발생하고 말았다.
일본도를 차거나 칼을 손에 들고 있는 고증 오류
사극의 군사나 전투 관련 장면에서 가장 쉽게 발견되는 오류는 칼을 손에 도적처럼 덜렁덜렁 들고 다니는 모습이다. 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이 20년 가까이 문제 제기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조선의 칼 패용법은 ‘환도(環刀)’ 패용이라고 해서 칼집에 '띠돈'이라는 특수 회전형 고리를 달아 360도 회전이 가능한 형태로 몸에 착용하였다. 그래서 실제로 본 다큐의 핵심 소재인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원래 사료에서도 명확하게 칼의 손잡이가 뒤를 가도록 군사들이 환도를 패용하고 있다. 의궤에 등장하는 군사 중 단 한 사람도 칼을 손에 들고 가지 않는다.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정조반차도>에 나오는 환도 패용 모습.
기병과 보병 모두가 손잡이가 뒤로 가도록 칼을 찼다.
그러나 본 다큐에서는 수백 명의 군사 모두 칼을 손에 덜렁덜렁 들고 행렬을 한다. 심지어 정조의 최측근 호위 무관은 조선의 환도 대신 일본도를 일본 사무라이처럼 허리춤에 끼워 넣고 정조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다. 자! 칼을 손에 들고 다니는 조선군이 적군을 만나 칼을 뽑으면 칼집은 어디에 둘 것인가? 버릴 것인가? 아니면 한 손에는 칼집을 들고 나머지 한 손만으로 싸울 것인가? 고증은 상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지적하는 것도 지겨울 정도다.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일본도를 허리에 끼워 넣은 호위 무관 (이미지 출처: KBS1)
불화살이 하늘을 가르고, 총통의 발사체가 폭발한다고?
정조가 수원 화성 서장대에 올라 직접 지휘했던 야간 군사 훈련인 야조(夜操) 장면에서 불화살이 하늘을 가르고, 과녁에 박히며 활활 타오르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밤하늘에 멋지게 날아가는 불화살, 정말 멋진 장면이다. 사극에서 가장 애용하는 야간 전투의 명장면이다. 그러나 이는 화약이 개발되기 이전인 고려 중기 이전의 화전(火箭) 방식이다. 정조 시대에는 화살에 작약통이라는 화약통을 붙이거나 화약을 붙인 천을 감아 심지에만 불을 붙여 날아가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특히 불화살은 본 다큐처럼 결코 활활 타며 날아갈 수 없다. 화살이 초당 65m/s라는 엄청난 속도로 공기가 꽉 찬 허공을 날아가는 것이다. 불길이 활활 타기는커녕 안 꺼지는 것이 다행이다. 그래서 실제 사극 촬영 모습을 살펴보면, 불을 붙여 발사하는 장면까지만 한 프레임으로 놓고, 나머지는 스태프진이 불붙인 화살을 손으로 던져 그다음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왜? 활로 쏘면 속도 문제로 불화살이 꺼지니까. 더 큰 문제는 다음 장면에서는 작약통 방식의 화전인 신기전이 하늘을 가르고 있다는 점이다. 앞뒤가 서로 안 맞는 고증을 보여주면서 작가적 상상력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불 붙은 불화살 (이미지 출처: KBS1)
이와는 반대로 천자총통이나 호준포를 비롯한 전통 화포류의 무기는 몇백 년을 앞당기기도 한다. 야간 군사 훈련 시 화성 성곽 중 공심돈(空心墩, 성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높은 망루의 가운데를 비워둔 시설물)에서 발사한 다양한 화약 무기들이 멀리 날아가 멋지게 불바다를 이루며 폭발하는 장면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충격 신관형 폭발물은 서양에서도 19세기 중반에나 만들어진 근대식 무기로 당시에는 돌덩어리나 쇠뭉치가 날아가기에 폭발과 함께 화염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둥근 무쇠뭉치 혹은 돌무더기가 날아가는 것이다.
활쏘기, 무기에 있어서의 오류
자객들과의 교전 장면 전에 정조가 호위 군사들에게 신호용 효시(嚆矢, 소리가 나는 화살)를 발사하여 신호를 주는 모습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정조의 활 쏘는 손을 보면, 서양식 양궁 사법(射法)으로 활을 쏘고 있다. 이런 무예사와 군사사 고증 관련 문제를 20년 가까이 공식적으로 제기해도 결코 고쳐지지 않는다. 악습 중의 악습이고, 고질병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엄지손가락에 깍지라는 보조 기구를 끼워 쏘는 엄지걸이 방식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정조가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설정을 해서 다큐를 만든 것인가? 아니면 하멜처럼 조선에 온 이방인에게 서양 방식의 활쏘기를 익힌 것으로 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인가?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정조의 서양식 활 깍지걸이 방식 (이미지 출처: KBS1)
이 다큐의 근본이 되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는 군사 훈련의 순서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훈련 명령 체계는 기본적으로 국왕-병조판서-선전관-신호 군사 등으로 이어지며, 이 과정에서 깃발, 군사 신호용 악기, 군사 신호용 포 등이 다양하게 나와야 섬세하게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다. 그러나 다큐에서는 과감히 모든 것이 생략되었다.
수천 아니 수만의 군사를 지휘하는데 목소리로 지휘를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북, 징, 나발, 신호포를 비롯한 청각적 신호 체계와 군사 신호용 깃발로 대표되는 수많은 시각적 신호 체계가 연동되어야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텔레비전 사극처럼 이 다큐에서도 장수들은 오로지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군사들을 지휘 통제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군사 훈련 지휘 신호 체계 고증 오류.
명령을 복창하는 군사는 손에 칼을 들고 목청껏 외친다. (이미지 출처: KBS1)
현대전에서도 가장 먼저 타격해야 할 대상이 적의 지휘부, 즉 지휘 통제소라는 것은 이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지휘 통제 기능의 마비는 곧 전투의 패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사 훈련 시 가장 철저하게 지켜지는 것이 신호 체계이며 다큐라면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영상화시키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아쉽게도 이 다큐 역시 사극처럼 목이 터져라 장수가 소리를 지를 뿐이고, 적의 매복을 살피는 당보군(塘報軍, 군사 훈련이나 전투 상황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어 알리는 임무를 맡은 군사)은 현대 항공 모함 전투기 이착륙 때나 사용하는 두 개의 수기(手旗)를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 또한 칼은 손에 들거나 혹은 일본도처럼 패용을 한다. 용맹함의 상징인 장용영(壯勇營, 정조 때 설치한 국왕 전용 호위 부대) 군사들의 전투 무기로 활용한 등패(藤牌, 등나무로 만든 둥근 방패)의 크기는 앉으면 상반신 전체를 가려야 하는 크기여야 함에도 마치 머리에 쓰는 갓 크기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그려내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두 개의 수기를 활용한 수신호 (이미지 출처: KBS1)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삿갓 크기의 등패 (이미지 출처: KBS1)
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등패. 등패는 앉았을 경우 상반신 전체를 방호 가능할 정도의 크기다.
사극의 고증 오류는 교육적 역사 다큐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쳐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군사사나 무예사를 다룬 영상들에서는 어김없이 고증 오류가 발견된다. 가장 역동적이기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극 드라마의 전쟁과 전투 장면에서는 앞에서 지적된 오류들이 대부분 그대로 반복된다. 아니 바로 그 ‘작가적 상상력’이 충만해야 할 역사 드라마 때문에 보다 ‘교육적이고 사실적’이어야 할 역사 다큐멘터리까지도 그대로 고증 오류 문제가 전염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사극 드라마 제작진들은 앞에서 언급한 사례를 한두 번쯤은 들었을 것이 분명할 텐데, 촬영 비용 문제를 들며 아직도 뒷짐만 지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학생들은 학교에서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역사 교육을 받고 있다. 중고등학생 시절 역사 다큐멘터리를 역사 수업의 보조 교재로 체험했던 경험은 거의 누구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TV 사극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 아니 각인되고 있다. 역사 왜곡은 그리 먼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고증 오류를 저지른 작품들이 한류라는 이름으로 일본이나 중국 등에 소개되면 그곳 시청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기조차 두려울 지경이다.
드라마 제작에서 작가적 상상력은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지만, 과도한 상상력은 또 다른 역사 폭력이 될 수 있다.
* 본 칼럼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정조 호위 무관이 일본도를? ... 이러시면 안 됩니다>(2013. 10. 27.) 원고를 수정·보완한 칼럼입니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작가적 상상력’을 빙자한 또 다른 역사 폭력의 가능성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백 년의 반복’… 1918년 인플루엔자와 2019년 코로나 바이러스
역사학 박사,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24기를 27년간 수련하고 공부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경기대학교에서 Post-doc 연구원을 거쳐 문화사와 무예사를 연구해 왔다. 현재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시범단에서 상임 연출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전통무예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정조의 무예사상과 장용영』(2015), 『조선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2016), 『무예인문학』(2017), 『병서, 조선을 말하다』(2018), 『조선후기 무예사 연구』(2019), 『제국의 몸, 식민의 무예』(2020), 『正譯 武藝圖譜通志』(2021) 등 십여 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조선시대 활쏘기 중 철전(六兩弓) 사법의 특성과 그 실제」(2020), 「조선시대 야간군사훈련 ‘夜操(야조)’를 활용한 ‘불의 축제’ 역사 문화콘텐츠」(2019), 「육군박물관 소장 <무예도보통지> 편찬의 특징과 그 활용」(2018), 「협도의 탄생」(2017), 「조선후기 권법의 군사무예 정착에 대한 문화사적 고찰」(2016) 등 30여 편의 무예사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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