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뜻이 통하지 않아 겪는 곤란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표준이 될 울림말을 정하는 일이다.
당연히 수십 개의 같은 뜻을 가진 말 중에 표준어가 될 하나를 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극로,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에 불씨 피워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2019년에 개봉, 약 300만 명이 관람했다.
영화 <말모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말모이'는 사전의 순우리말이자 주시경이 만들기 시작한 우리말 사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주시경은 제자들과 같이 1911년 조선어연구학회를 만들고 사전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3년 뒤 중단됐다. 이후 주시경의 뜻을 이어 조선광문회에 계명구락부를 결성해 사전 작업을 재개했지만, 수양회 사건 등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사전 편찬의 불씨를 되살린 이는 조선인 최초로 유럽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극로였다. 독일 유학시절 대학에 조선어과를 개설하고 한글을 가르치면서 누구보다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그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후 그는 조선어연구회 안에 사회 각 분야의 인사 108인을 발기인으로 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었다. '사회 가계 유지망라 조선어사전편찬회' 라는 동아일보의 기사뿐만 아니라 당시 언론들이 주목했을 만큼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시인 이은상이 쓰고 낭독한 발기문은 훗날 조선어학회에서 방언 조사 활동을 시작할 때 <한글>에 재수록되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낙오된 조선 민족의 갱생할 첩경은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무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천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은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
- 한글 제31호, 조선어학회, 1936
사전 편찬은 언어와 겨레의 운명을 하나로 인식했고 민족어인 한글을 보전하고 문화의 기초를 세워 독립을 이루고자 한 민족적인 독립투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당대의 모습은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 말이 모이고, 말이 모이는 곳에 뜻이 모이고, 그 뜻이 모이는 곳에 독립의 길이 있지 않을까요?”라는 대사에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세 가지 사업
이듬해 사전편찬회는 사전 편찬을 위한 세 가지 사업을 정했다. 그 첫 번째가 사전 편찬에 필요한 철자법의 기준을 세우는 한글 맞춤법 확정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이극로, 이상춘 이윤재, 이병기, 이희승 등 18명의 제정위원은 1930년 12월 13일 제1독회를 시작으로 1933년 10월 19일 마지막 독회까지 모두 136차례, 소요 시간 442시간 40분이라는 3여 년의 대장정 끝에 한글에 가장 적합하고 편리한 철자법과 표기 방식을 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했다.
영화 <말모이> 중 표준어 제정 공청회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균형과 공정을 바탕으로 한 표준어 사정
사전편찬회는 두 번째 사업인 표준어 사정에 들어갔다. 영화에서도 ‘표준어 제정 공청회’(원래는 ‘표준어 사정 독회’임)을 상당히 길게 다룬다. 류정환(이극로와 조선어학회 이우식 회장을 섞어놓은 듯한)과 판수가 극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엉덩이’와 ‘궁둥이’ 중 어떤 말을 표준어(올림말)로 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을 빚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판수의 계략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영화관에서 몰래 하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 온 나라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 속에서 독회가 이루어졌다. 독회가 열리는 곳의 지역 유지와 지역민들이 잠자리와 식사, 독회 홍보 등을 자발적으로 맡아 해결했고 온양온천에서 열린 제1독회가 끝난 뒤 사정위원들은 근처 현충사를 둘러볼 정도였다.
1차 사정 독회 이후 온양의 현충사에서 찍은 표준어 사정위원회 위원들(출처: 한글학회)
조선인의 지지 속에 세 차례 사정 독회로 올림말 정해
표준어 사정 작업은 같은 뜻의 말이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뜻이 통하지 않아 겪는 곤란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표준이 될 올림말을 정하는 일이다. 당연히 수십 개의 같은 뜻을 가진 말 중에 표준어가 될 하나를 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34년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실제 말을 사용할 조선인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의지로 사정위원의 구성에도 신중과 균형을 꾀했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중심지인 서울말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울 및 경기 출신이 절반, 나머지는 각 도 별로 위원 수를 배정했다. 또 각 계층의 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해 직업 및 정치적 성향, 남녀 등을 고려했으며 비타협 민족주의자인 안재홍, 공산주의자 정노식 같은 이도 사정위원에 포함시켰다.
일반적으로 널리 흔히 쓰이는 낱말 9,547개를 고르고 세 가지 사정 원칙도 정했다. 현재 쓰는 말이고 지역적으로는 서울말을 표준으로 하며 중류층이 쓰는 말을 표준말로 정한다는 것이 그것. 같은 서울말이라도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는 말이 있기 때문에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못 박았다.
1935년 1월 첫 독회는 온양온천에서, 제2독회는 같은 해 8월 고양군 우이동 천도교 수도원 봉항각에서, 제3독회는 이듬해 7월 인천 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열렸으며 조선어학회의 수정 과정을 거쳐 그해 490주년 한글날에 6,231개의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다. 1년 9개월 만의 일이었다.
학생에서 노인까지 시골말 캐기 운동에 참여해
사전 편찬은 조선어학회가 주도했지만 온 조선인들이 참여한 민족 사업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판수가 자신이 감옥에서 알고 지내던 각 지방의 사람들을 모아 해당 단어에 대한 사투리를 돌아가며 말하는 장면이다. 사전편찬회는 구성 때부터 모든 서울말이 표준어가 되지 않기 때문에 표준어 사정에 기초가 될 어휘 수집을 목표로 전국의 방언(사투리, 이후에는 시골말) 채집을 계속해왔다.
시골말 캐기 잡책 (출처: 한글학회)
시골말 캐기 운동으로 더 알려진 방언(시골말) 조사는 1935년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에 광고가 실리면서 폭발적인 지지와 함께 전 국민의 참여를 끌어냈다. 영화에서는 류정환이 극장 간판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 것으로, 또 총독부에 의해 전국에서 보낸 편지들이 우편국 창고에 쌓여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사실과 다르다. 조선어학회는 각지에서 보내온 사투리를 잡지에 실은 것은 물론이고 사투리 채집에 활용할 수 있게 전용 수첩도 만들었다. 당시 <한글>의 편집장이기도 한 최현배가 엮은 『시골말 캐기 잡책』이 바로 그것이다. 주제별로 약 천여 개에 달하는 낱말 옆에 빈칸을 만들어 이에 해당하는 시골말을 적도록 했다. 조선어학회의 재정 상황이 어려워지자 최현배는 자신이 쓴 <우리말본>의 인세로 인쇄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각 지방 방언을 수집하기 위해, 사오년 전부터 부내 각 중등학교 이상 학생을 총동원해 하기 방학 시 귀향하는 학생에게 방언을 수집하였던 바, 이미 수집된 것이 만여 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장차 정리하여 사전 어휘로 수용할 예정입니다. 여기에 방언 조사란을 특설하였으니, 누구시든지 이 난을 많이 이용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 한글 제27호, 조선어학회, 1935
<시골말 캐기 잡책>은 1935년 10월(제27호)부터 1942년 5월(제93호)까지 투고란의 형식으로 독자들이 자기 지역의 사투리를 알아보고 게재할 수 있도록 해 사투리 조사율을 높였다. 약 7년 동안 1만 개 이상의 어휘를 수집했으며 이렇게 수집한 사투리(방언)는 <한글>지에 실렸다. 전국 14개 학교 5백여 명의 초등·중학생들이 참여했는데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쓰는 게 너무나 당연했던 학생들이 사전 편찬에 힘을 보탰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화 <말모이> 중 <한글> 지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그대로'가 주는 감동과 울림
말모이 원고 뭉치를 받은 류정환이 일본군에게 쫓기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 <말모이>는 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미와 온 국민이 사전 편찬 과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말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했다는 면에서 높이 살 만하다. 더 극적인 감동을 주기 위해, 대중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고 실제보다 과장, 왜곡된 부분이 많아 안타까웠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실명을 그대로 쓰지 않은 것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걸렸다. 조선어 사전 편찬의 역사는 실제 사건인 만큼 굳이 등장인물을 모두 가공인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시간의 흐름대로 담담하게 그렸다면 영화의 감동이 떨어졌을까? 여전히 의문이다.
작가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으며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지금은 청소년 역사소설과 동화를 쓰고 있다. 스토리텔링 글쓰기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아동문학창작은 사이버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사이 출간한 역사청소년소설로는 <말을 캐는 시간> <계회도 살인 사건> <괴불주머니> <뽀이들이 온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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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사전 편찬,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민족 독립투쟁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윤혜숙
2022-07-19
표준어 사정 작업은 같은 뜻의 말이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뜻이 통하지 않아 겪는 곤란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표준이 될 울림말을 정하는 일이다.
당연히 수십 개의 같은 뜻을 가진 말 중에 표준어가 될 하나를 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극로,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에 불씨 피워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2019년에 개봉, 약 300만 명이 관람했다.
영화 <말모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말모이'는 사전의 순우리말이자 주시경이 만들기 시작한 우리말 사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주시경은 제자들과 같이 1911년 조선어연구학회를 만들고 사전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3년 뒤 중단됐다. 이후 주시경의 뜻을 이어 조선광문회에 계명구락부를 결성해 사전 작업을 재개했지만, 수양회 사건 등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사전 편찬의 불씨를 되살린 이는 조선인 최초로 유럽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극로였다. 독일 유학시절 대학에 조선어과를 개설하고 한글을 가르치면서 누구보다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그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후 그는 조선어연구회 안에 사회 각 분야의 인사 108인을 발기인으로 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었다. '사회 가계 유지망라 조선어사전편찬회' 라는 동아일보의 기사뿐만 아니라 당시 언론들이 주목했을 만큼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시인 이은상이 쓰고 낭독한 발기문은 훗날 조선어학회에서 방언 조사 활동을 시작할 때 <한글>에 재수록되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낙오된 조선 민족의 갱생할 첩경은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무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천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은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
- 한글 제31호, 조선어학회, 1936
사전 편찬은 언어와 겨레의 운명을 하나로 인식했고 민족어인 한글을 보전하고 문화의 기초를 세워 독립을 이루고자 한 민족적인 독립투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당대의 모습은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 말이 모이고, 말이 모이는 곳에 뜻이 모이고, 그 뜻이 모이는 곳에 독립의 길이 있지 않을까요?”라는 대사에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세 가지 사업
이듬해 사전편찬회는 사전 편찬을 위한 세 가지 사업을 정했다. 그 첫 번째가 사전 편찬에 필요한 철자법의 기준을 세우는 한글 맞춤법 확정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이극로, 이상춘 이윤재, 이병기, 이희승 등 18명의 제정위원은 1930년 12월 13일 제1독회를 시작으로 1933년 10월 19일 마지막 독회까지 모두 136차례, 소요 시간 442시간 40분이라는 3여 년의 대장정 끝에 한글에 가장 적합하고 편리한 철자법과 표기 방식을 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했다.
영화 <말모이> 중 표준어 제정 공청회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균형과 공정을 바탕으로 한 표준어 사정
사전편찬회는 두 번째 사업인 표준어 사정에 들어갔다. 영화에서도 ‘표준어 제정 공청회’(원래는 ‘표준어 사정 독회’임)을 상당히 길게 다룬다. 류정환(이극로와 조선어학회 이우식 회장을 섞어놓은 듯한)과 판수가 극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엉덩이’와 ‘궁둥이’ 중 어떤 말을 표준어(올림말)로 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을 빚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판수의 계략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영화관에서 몰래 하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 온 나라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 속에서 독회가 이루어졌다. 독회가 열리는 곳의 지역 유지와 지역민들이 잠자리와 식사, 독회 홍보 등을 자발적으로 맡아 해결했고 온양온천에서 열린 제1독회가 끝난 뒤 사정위원들은 근처 현충사를 둘러볼 정도였다.
1차 사정 독회 이후 온양의 현충사에서 찍은 표준어 사정위원회 위원들(출처: 한글학회)
조선인의 지지 속에 세 차례 사정 독회로 올림말 정해
표준어 사정 작업은 같은 뜻의 말이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뜻이 통하지 않아 겪는 곤란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표준이 될 올림말을 정하는 일이다. 당연히 수십 개의 같은 뜻을 가진 말 중에 표준어가 될 하나를 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34년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실제 말을 사용할 조선인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의지로 사정위원의 구성에도 신중과 균형을 꾀했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중심지인 서울말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울 및 경기 출신이 절반, 나머지는 각 도 별로 위원 수를 배정했다. 또 각 계층의 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해 직업 및 정치적 성향, 남녀 등을 고려했으며 비타협 민족주의자인 안재홍, 공산주의자 정노식 같은 이도 사정위원에 포함시켰다.
일반적으로 널리 흔히 쓰이는 낱말 9,547개를 고르고 세 가지 사정 원칙도 정했다. 현재 쓰는 말이고 지역적으로는 서울말을 표준으로 하며 중류층이 쓰는 말을 표준말로 정한다는 것이 그것. 같은 서울말이라도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는 말이 있기 때문에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못 박았다.
1935년 1월 첫 독회는 온양온천에서, 제2독회는 같은 해 8월 고양군 우이동 천도교 수도원 봉항각에서, 제3독회는 이듬해 7월 인천 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열렸으며 조선어학회의 수정 과정을 거쳐 그해 490주년 한글날에 6,231개의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다. 1년 9개월 만의 일이었다.
학생에서 노인까지 시골말 캐기 운동에 참여해
사전 편찬은 조선어학회가 주도했지만 온 조선인들이 참여한 민족 사업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판수가 자신이 감옥에서 알고 지내던 각 지방의 사람들을 모아 해당 단어에 대한 사투리를 돌아가며 말하는 장면이다. 사전편찬회는 구성 때부터 모든 서울말이 표준어가 되지 않기 때문에 표준어 사정에 기초가 될 어휘 수집을 목표로 전국의 방언(사투리, 이후에는 시골말) 채집을 계속해왔다.
시골말 캐기 잡책 (출처: 한글학회)
시골말 캐기 운동으로 더 알려진 방언(시골말) 조사는 1935년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에 광고가 실리면서 폭발적인 지지와 함께 전 국민의 참여를 끌어냈다. 영화에서는 류정환이 극장 간판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 것으로, 또 총독부에 의해 전국에서 보낸 편지들이 우편국 창고에 쌓여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사실과 다르다. 조선어학회는 각지에서 보내온 사투리를 잡지에 실은 것은 물론이고 사투리 채집에 활용할 수 있게 전용 수첩도 만들었다. 당시 <한글>의 편집장이기도 한 최현배가 엮은 『시골말 캐기 잡책』이 바로 그것이다. 주제별로 약 천여 개에 달하는 낱말 옆에 빈칸을 만들어 이에 해당하는 시골말을 적도록 했다. 조선어학회의 재정 상황이 어려워지자 최현배는 자신이 쓴 <우리말본>의 인세로 인쇄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각 지방 방언을 수집하기 위해, 사오년 전부터 부내 각 중등학교 이상 학생을 총동원해 하기 방학 시 귀향하는 학생에게 방언을 수집하였던 바, 이미 수집된 것이 만여 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장차 정리하여 사전 어휘로 수용할 예정입니다. 여기에 방언 조사란을 특설하였으니, 누구시든지 이 난을 많이 이용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 한글 제27호, 조선어학회, 1935
<시골말 캐기 잡책>은 1935년 10월(제27호)부터 1942년 5월(제93호)까지 투고란의 형식으로 독자들이 자기 지역의 사투리를 알아보고 게재할 수 있도록 해 사투리 조사율을 높였다. 약 7년 동안 1만 개 이상의 어휘를 수집했으며 이렇게 수집한 사투리(방언)는 <한글>지에 실렸다. 전국 14개 학교 5백여 명의 초등·중학생들이 참여했는데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쓰는 게 너무나 당연했던 학생들이 사전 편찬에 힘을 보탰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화 <말모이> 중 <한글> 지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그대로'가 주는 감동과 울림
말모이 원고 뭉치를 받은 류정환이 일본군에게 쫓기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 <말모이>는 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미와 온 국민이 사전 편찬 과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말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했다는 면에서 높이 살 만하다. 더 극적인 감동을 주기 위해, 대중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고 실제보다 과장, 왜곡된 부분이 많아 안타까웠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실명을 그대로 쓰지 않은 것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걸렸다. 조선어 사전 편찬의 역사는 실제 사건인 만큼 굳이 등장인물을 모두 가공인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시간의 흐름대로 담담하게 그렸다면 영화의 감동이 떨어졌을까? 여전히 의문이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조선어 사전 편찬,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민족 독립투쟁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여성의 이야기를 듣다, 서오릉과 소령원
작가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으며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지금은 청소년 역사소설과 동화를 쓰고 있다. 스토리텔링 글쓰기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아동문학창작은 사이버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사이 출간한 역사청소년소설로는 <말을 캐는 시간> <계회도 살인 사건> <괴불주머니> <뽀이들이 온다> 등이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조선어 사전 편찬,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민족 독립투쟁'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여성의 이야기를 듣다, 서오릉과 소령원
박광일
사극, 창작의 자유와 역사왜곡 사이에서
고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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