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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되 감상에 흐르지 아니하다

- 감정의 자서전 -

손택수

2022-11-24

시는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게 하고, 자신의 상처에 귀를 기울이듯 겸허하게 타자의 상처에도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상처와 상처가 만남으로써 더 큰 상처가 되고, 더 높은 차원의 치유를 꿈꾸게 합니다. 저는 검둥이를 통해 저의 가족사를 들여다보게 되었고, 훗날 재회한 부모님에 대한 뿌리 깊은 거리감을......



낭만주의에 대한 오해

 

 

윌리엄 워즈워스 (출처: 나무위키)

윌리엄 워즈워스 (출처: 나무위키)


 

 

시는 시인의 실제 감정이나 경험 혹은 세계관과 일치하는가. 그렇다고 답하면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를 동일시하는 19세기 유럽 낭만주의 시인들의 후예입니다. 그들은 세계나 대상을 끝없이 자아화하여 인간의 의지나 욕망의 논리에 동화된 상태로서 자아와 세계를 인식했습니다. 세계를 자아화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독자가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성실하게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곧 예술이니 시인과 시적 자아 그리고 독자 사이의 관계를 연속적인 흐름으로 파악하여 표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시는 감정의 자연 발생적 유로다’라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선언이 대표적입니다. 감정을 흘러가는 대로 그저 자연스럽게 읊조리면 시가 될 것 같다는 오해가 여기에서 생겨납니다. 워즈워스의 『서정시집』 서문에 실린 이 말은 그러나 다음과 같은 뒷받침 문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발생적 유로다. 그러나 시는 고요히 회상된 정서에서 기원한다. 그렇게 회상된 정서를 묵상하고 나면 처음 명상의 대상이었던 정서와 닮은 제2의 정서가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창작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 윌리엄 워즈워스『서정시집』 -


시의 감정은 ‘고요히 회상’되어 거름망을 통과한 제2의, 구조적 정서입니다. 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감상적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딱 좋습니다. 합평 현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지적 사항입니다. 시인이 자신과 대상에 대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감정을 과잉 노출하거나 지나치게 억제하면 독자는 뜨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자의 ‘슬프되 감상에 흐르지 아니하다’라는 뜻의 ‘애이불상’은 이에 대한 경고입니다. 시인의 체험은 질서화되고 양식화되어야 하며 시에서 정서는 원초적 감상 자체가 아니라 미적 거리를 확보한 감각적 인식, 즉 감성의 결과물입니다. 절제나 압축, 수사학은 바로 감상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궁리들이라고 보면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의 동일시에 대한 이의제기는 독자 앞에서 시인을 겸허하게 만듭니다. 낭만주의의 천재성 대신 언어 장인의 고통스런 수련을 하나의 통과의례로서 성실하게 겪게 합니다. 정서나 감정의 야생마를 그대로 방목한 상태로 전달하면 낙상의 위험으로 외면받거나 미숙한 상태로 취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어떻게 들여다볼 것인가

 

 

강아지

강아지



검둥이는 제 유일한 동무였습니다. 산 너머로 해가 꼴까닥 넘어가고, 처마 아래 단란한 제비 일가처럼 안방에서 큰댁 식구들의 수저질 소리가 들려올 때면 혼자서 툇마루에 앉아 가족들 그리움에 온갖 청승을 다 떨고 있는 저를 검둥이만은 늘 이해해 주었습니다. 지금쯤 어머니와 아버지가 밥 벌러 간 항구 도시에도 저녁이 오고 있겠지. 산동네 담벼락에 고개를 내민 누이는 갓 난 막냇동생을 등에 업고 빈 도시락통을 울리며 올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겠지. 가족들 생각에 울적해져서 가슴팍을 향해 고개를 푹 꺾고 있노라면 말 못할 슬픔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가만히 웅크려 앉은 채 물들어 가는 저녁노을을 함께 바라봐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위로를 하듯 젖은 혀로 손을 핥아 주었습니다.


손에 감기던 그 혀의 부드러운 감촉을 기억해낸 건 일 년째 실업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건강마저 악화되어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나자 가난한 가계에 먹그늘이 더 짙어 갔습니다. 당장이라도 낙향을 하고 싶었으나 낙향을 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많은 부모님들의 얼굴에 수심만 더 짙게 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 참담한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잠이 올 리 없었습니다. 방구석에 웅크려 앉아 손전화에 저장된 전화번호들을 꺼내 보았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신세 한탄이라도 하며 막막한 가슴을 위로라도 받고 싶었나 봅니다. 아니, 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속엣말이라도 터놓고 보면 울적한 마음이 스스로 다독거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수백 개의 전화번호 중 전화를 걸 만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이 기막힌 사실이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때 불현듯 수십 년 동안 잊고 지내온 검둥이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래, 옛날 내게는 형제 같은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지. 기억 바깥에 내팽개쳐 놓고 부러 외면해 온 강아지의 젖은 눈망울이 떠오르는 순간 가슴에 통증이 일었습니다. 마치 무거운 천장이 가슴에 내려와 얹힌 듯 숨이 쉬어지질 않았습니다. 검둥이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가족과 떨어져 살던 유년 시절 나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푸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 없이 사는 애라 골목에서 늘 싸움질만 한다며 어른들이 사시를 뜨며 바라볼 때마다 툭하면 검둥이를 걷어찼습니다. 초등학교 일학년 저축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같은 반의 사촌은 백 원을, 저는 구십 원을 저축했습니다. 까만 안경테 너머로 선생님이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추궁해 왔습니다. 한집인데 너는 왜 십 원이 모자라니? 어디서 군것질을 한 거 아냐? 저는 아니라고 강변을 하였지만 선생님은 좀처럼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는 예의 억울한 마음을 풀 대상으로 검둥이를 지목했습니다. 분노와 고통을 어디 호소할 길이 없어 점점 더 삐뚤어져 가는 악동의 폭력은 사뭇 잔혹스러운 데가 있었습니다. 개의 목줄을 잡고 쥐불놀이 하듯 뱅뱅 돌리다가 벽을 향해 내팽개치면 속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강아지가 신음을 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목젖이 다 보이도록 그악스럽게 웃고 있는 소년! 상처받은 소년은 갈수록 아무도 못 말리는 작은 악마가 되어 갔습니다.


그런 검둥이가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툇마루 아래 깊은 어둠 속에 웅크린 채 공포에 질려 떨고 있던 검둥이는 꼬박 일주일을 굶은 뒤 소리 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그 일주일 동안 가증스럽게도 저는 먹잇감을 들고 어둠 속에서 검둥이를 꺼내기 위해 갖은 애교를 부렸습니다. 그런 저를 검둥이는 희미해져 가는 눈빛으로 멀거니 쳐다보다가 툭,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할머니는 쥐약을 먹은 모양이라고 쯧쯧 혀를 찼지만 저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검둥이는 스스로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다 스스로 숨을 끊는 게 낫다고 판단을 한 것이었습니다. 동물이 자살이라니?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신뢰가 깨어지면 그 스트레스로 인해 동물도 자살을 한다고. 검둥이가 그랬습니다. 속죄의 마음으로 절을 찾아 백일기도를 드렸으나 고통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세례도 받아보았으나 그 통증은 여전하였습니다. 그 후 검둥이를 소재로 시를 써 보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실패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 전혀 다른 시가 찾아왔습니다.


흰둥이 생각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다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이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이었다. 

(졸시)


 언뜻 보면 전혀 반대되는 내용이라 의아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흰둥이 생각」에 나오는 소년과 구체적 경험 속의 소년의 이미지가 너무도 판이하니까요. 검인정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 시에 대해 중학생들이 정말 있었던 일이에요? 하고 물어오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시의 비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간절하나 그렇기에 더욱 쓸 수 없는 이야기는 절망을 부르고, 절망은 좌절된 말들을 통해 다시 꿈을 꾸게 합니다.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숱하게 실패한 ‘검둥이 생각’을 버리면서 저는 생명에 대한 예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말 속에 생명의 느낌을 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손을 쓰다듬던 검둥이의 혀를 이미지화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이야기의 겉은 다르지만 그 속에 흐르는 속죄와 참회의 정서는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언어적 구성체로서의 「흰둥이 생각」과 실제 경험으로서의 검둥이 이야기 사이에 있는 굴절은 언어와 경험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고통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닐까요.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 그 상처가 자꾸 덧나는 아픔으로 저를 깨어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저는 검둥이에 대한 멍든 그리움으로 유년 시절을 지배하던 외로움과 서러움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외로움과 서러움이야말로 모든 숨탄것들의 존재 조건임을 간신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죄책감과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던 아이를 안아주기 위해 제 삶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습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

자신을 들여다 보는 사람



시는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게 하고, 자신의 상처에 귀를 기울이듯 겸허하게 타자의 상처에도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상처와 상처가 만남으로써 더 큰 상처가 되고, 더 높은 차원의 치유를 꿈꾸게 합니다. 저는 검둥이를 통해 저의 가족사를 들여다보게 되었고, 훗날 재회한 부모님에 대한 뿌리 깊은 거리감을 겨우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라고 속이 편했을 리 없겠지요. 1970년대 산업화 시기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식된 저의 부모 세대들은 그 양상이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유사한 가족 해체를 경험했습니다. 어쩌면 국가가 해결해야 할 복지나 기본적인 사회 환경들을 가장 연약한 가정 단위로 떠넘긴 것이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화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검둥이의 고통스런 기억으로부터 저는 제 가족이 경험한 근대를 조금씩 작품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농경 문화적 감수성이 첫 시집을 준비하는 데 양분이 되었고, 어머니 아버지가 겪었을 도회 공간의 체험이 두 번째 시집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뒤란 툇마루에 앉아 노을을 함께 바라봐 주던 저의 강아지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손등을 핥던 혀의 기억 때문인지 개들만 보면 피해 다니고, 아직도 개들과 눈을 제대로 맞추질 못합니다. 어둠 속에 웅크려 떨고 있던 눈동자 생각이 나면 여전히 숨이 콱 막혀 옵니다.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손등을 핥던 혀의 기억을 애써 뿌리치려 하지 않습니다. 쓰지 못한 상처는 또 다른 노래를 부를 것이기에…….

 

 

다른 방식의 언어



새를 기르는 법 (주민현)  

케이지 안에 손을 넣어두십시오. 손을 넣고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으로 새를 부르십시오. 새가 좋아하는 간식을 손에 두고 기다리십시오. 간식에서 지나친 감상성을 배제하십시오. 막대기에 올라타기 전에 명령어를 알려주십시오. 명령어는 관념적으로 쓰지 마십시오. 막대기에 익숙해지면 새를 꺼내십시오. 새를 둘러싼 투명한 새장을 산책하도록 하십시오. 구체적으로 새가 되십시오. 새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으십시오. 새의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의 언어를 구사하십시오. 새가 되기 위해 꼭 새가 필요하진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킬트, 그리고 퀼트 』, 문학동네, 2020 -



의식하면서 시를 펜으로 옮겨오는 과정과 새장 안의 새를 풀어놓는 과정을 병렬한 시입니다. 시를 ‘새’로 바꾸었을 뿐인데 시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쩌면 뻔하다고 할 생각들이 신선하게 바뀌었습니다. 제가 검둥이를 흰둥이로 바꾼 것처럼. 그렇습니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새를 포착하고 새를 언어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풀어놓는 꿈을 꿉니다. 여기서 감상성과 관념성은 배제의 대상입니다. 감상성은 관념성과 마찬가지로 표피적인 관계방식입니다. 다른 방식의 언어는 표피적인 관계를 넘어설 때 가능해집니다. ‘새가 되기 위해 꼭 새가 필요하진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조언을 곱씹어보아야겠습니다.






[감정의 자서전] 슬프되 감상에 흐르지 아니하다

- 지난 글: [감정의 자서전] 신의 선물, 메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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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담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어릴 때 꿈은 농부였다. 별(辰)과 노래(曲)가 하나가 된 농(農) 자를 업으로 삼고 싶었는데 꿈이 좌절되면서 그만 시를 쓰게 되었다. 유년시절의 실향과 실패와 숱한 실연이 시를 쓰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시집 『목련전차』,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청소년시집 『나의 첫소년』, 동시집 『한눈 파는 아이』 등이 있다. 제3회 조태일문학상, 제13회 노작문학상, 제22회 신동엽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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