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연봉의 직장에 취직하고, 비싼 집을 사고,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맛집을 가고, 남들이 선망하는 여행 사진으로 SNS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행복하고 기분이 좋기는 한데 그런데 이것이 삶의 의미일까요? 삶의 의미, 이 문제야말로 철학이 답변해야 할 문제이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철학자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살고 있었죠! 나는 태어나겠다고 결정한 적이 없는데도요. 때로는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언제 존재하겠다고 결정한 적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정말이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난감한 현실을 두고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피투(被投)되었다’ 즉 ‘던져졌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졌죠, 그것도 내가 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던져졌습니다. 이 외모로, 이 나라에, 현재의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기껏해야 100년이라는 시간을 살다가 떠나가게 됩니다.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기는 가는 건지조차 알 수가 없지요.
그 100년이라는 시간도 생각해보면 참으로 허망합니다. 초반 20년은 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는 데 보내야 합니다. 말년의 20년은 아픈 몸으로 고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맘대로 살아볼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60년입니다. 이러려고 태어났을까요? 그 60년의 시간도요, 이 규칙 저 규칙 지켜가며 살아야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뭔 의무는 그렇게도 많은지 말이지요. 독일 출신의 생(生)철학자인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이러한 황당한 인간의 삶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들어보실래요?
쇼펜하우어(좌)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표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교보문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밖에서 보면 얼마나 무의미하고 보잘것없게 흘러가고 안에서 갖는 느낌으로도 얼마나 숨 막히고 제정신이 아니게 흘러가는지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들의 삶은 빛바랜 동경이자 괴로움이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생각을 품고 인생의 사계를 거치며 죽음을 향해 꿈결처럼 허우적거리며 걸어간다. 이들은 태엽이 감기고는 왜 그런지 알지도 못하고 가는 시계의 태엽 장치와 같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기는 것인데 이는 이미 수없이 연주된 손풍금 곡을 악절마다 소절마다 보잘것없게 변주하여 거듭 되풀이하기 위해서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58절
인간을 ‘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가는 시계의 태엽 장치’에 비유한 것이 인상 깊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힘’을 ‘의지’라고 칭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자연 속의 모든 힘’이고 바로 ‘모든 사물을 지금의 사물로 존재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따라 어떤 일은 잘 풀리고 어떤 일은 안 풀립니다. 인간은 잘 풀리는 일은 좋다고 하지만, 잘 안 풀리는 일은 나쁘다고 하면서 고통을 느낍니다. 잘 풀리는 일은 계속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잘 안 풀리는 일은 앞으로는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그 일들을 쳐다보며 힘이 듭니다.
물론 세상살이가 재미있기도 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할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악기나 스포츠 그리고 각종 취미 활동 등 배워 볼 것도 많습니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득문득 의문이 듭니다. 학교, 직장, 결혼, 아이..., 이 모든 싸이클을 다 돌고 나면 뭐가 남는 걸까요? 남들이 말하는 기준을 다 충족시킬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기준을 다 충족시키고 나면 나는 뭐가 되는 거지?’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살다 가는 건가...? 인생은 뭐지?’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고통일까, 행복일까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궁핍함으로든 무료함으로든 고통스러운 그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궁핍함이 싫기에 부를 추구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는 부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부를 가진 사람은 많은 재산을 유지하려고 전전긍긍하느라 행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느끼므로 재산은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무료함에 대해 생각해볼까요? 요즘 엄청난 인기를 거둔 〈오징어 게임〉에서도 무료함에 지친 사람이 등장하지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핍함에 시달린다고 느끼기 때문에 무료함이 주는 고통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없는 경우에는 더이상 추구하고 싶은 것이 없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바라다보면 행복이 너무 드물게 느껴지고 또 행복이 가고 나면 고통이 더 심해지기에 차라리 고통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지요.
사실 쇼펜하우어가 삶의 의미가 뭔지를 결론 내릴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삶은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의해 이유도 없이 펼쳐지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니 말입니다. 인간은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울고 웃게 되어 있을 뿐이니 의지에 의해 결정당하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의 덧없음을 직시하면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없는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깨닫고 나면 더 이상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우리가 삶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결론을 내린다고 해서 삶이 정말 그렇다는 보장이 없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삶이 어떠한 이유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음을 생각하면, 삶이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일 뿐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설명이 매우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맹목적인 힘에 의해 달라지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 것일까요?
타인의 삶 역시 고통스럽다
쇼펜하우어는 동고(同苦, Mitleid)를 말합니다. 나만 이 맹목적인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 삶의 맹목성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나뿐만 아니라 저 사람도 이 답 없는 삶의 움직임의 그 맹목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생의 동지, 이 고통의 바다를 함께 건너야 할 동료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는 데에는 물론 자신이 마주한 현실이 좋으니 나쁘니를 따지는 자기중심성을 탈피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쇼펜하우어 철학에서는 ‘너와 내가 완전히 구분되는 개체’라는 의식에 빠져 있는 것이 부적절합니다. 어쩌다 의지가 그러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그 자리에 서게 된 존재가 너이고, 의지가 이러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이 자리에 서게 된 존재가 나이기에 그렇습니다. 너와 나는 의지의 큰 흐름을 실현하는 매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너와 나는 그렇게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타인이 이 고해(苦海)를 헤쳐 나가느라 나만큼이나 힘든 또 한 명의 사람임을 알게 되면 우리에겐 설명할 수 없는 연대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어려움을 겪으면 응원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 있으면 기뻐하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타인에 대해 막연한 연대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쉽게 불행해집니다. 인간은 연대감을 느낄 때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밥 먹으면 배부른 것처럼 ‘그냥 그렇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고의 실제 사례는 많습니다.
시한부 소년은 왜 노숙자들에게 샌드위치를 주고 싶었을까
미국의 시애틀에 살던 11살 소년 브랜든의 얘기도 그러합니다. 어려서부터 희귀병으로 고생한 브랜든은 지난 2008년, 열심히 치료를 받았는데도 결국은 2주밖에 삶이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생명의 불꽃이 얼마 남지 않은 브랜든에게 엄마는 하고 싶은 것이 무어냐고 묻습니다. 힘없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브랜든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노숙자들의 캠프를 봅니다. 그리고는 “저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주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브랜든의 이 소원은 여러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어 많은 사람들이 샌드위치 캠페인에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캠페인을 통해 많은 노숙자들이 〈브랜든의 샌드위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브랜든은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꿈을 잃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미국의 시애틀에 살던 11살 소년 브랜든 (이미지 출처: Dignity Memorial)
이 소년은 왜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주고 싶었을까요? 죽음 앞에 선 브랜든의 소원이 왜 만나지도 못한 타인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사람들은 브랜든의 샌드위치를 응원하게 되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습니다. 죽음 앞에 서면 ‘정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구분이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죽음에 가까이 가보지 못해서 이를 경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막상 죽음 앞에 서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타인을 더 위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죽음 앞에서 제 삶의 의미를 정립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원 철학과 진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모으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도를 만나 학교에 내려던 등록금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 강도가 칼을 들고 있었으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세상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담배 연기보다도 더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인생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 무엇인가는 또 왜 해야 하는 것일까?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무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깊게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철학과 대학원에 왜 가야 하는지조차 불투명해졌습니다.
저는 오랜 고민과 방황 끝에 ‘담배 연기보다도 더 허무한 인생’을 철학에 던지기로 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사상이라는 그물로 엮는 철학자는 행복하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만나면서 제가 원래 철학을 하고 싶었던 이유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삶에 닿아 있는 철학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동지들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철학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잘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날로 고민을 접고 철학과 대학원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삶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잘 구분되었습니다. 저에게는 대학교수가 되는 것보다 철학을 쉽게 전하느냐 전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문적인 어려운 논문을 쓰는 것보다 쉬운 말과 글로 ‘지혜로서의 철학’을 전하는 것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나의 죽어가는 삶을 어디에 던질 것인가
삶의 의미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삶의 의미를 어디서 느끼는가를 관찰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공통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에서는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삶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위할 때가 아니라 타인을 위할 때 정립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보통 죽음 앞에서 정립됩니다. 제가 보기에 인간은 동고(同苦)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죽어가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다 보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종착지는 바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고’입니다. 그리고 동고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나갈 것인지에서 나의 삶의 특수성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라는 슬프지만 엄정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이 죽어가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부터 잘 고민해보세요. 여러분도 저와 동일한 결론을 얻게 되는지 아닌지 잘 살펴보세요. 삶을 죽음으로부터 도망 다니는 시간으로 채우면 삶의 의미와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나의 죽어가는 삶을 어디에 던질 것인지 고민하다 보면 자신만의 단단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 나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가장 지속적인 행복인 것 같습니다.
목마른 당신을 위한 인생 비타민
① 쇼펜하우어 저, 홍성광 역,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을유문화사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특히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을 모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낸 지 36년 만에 2판을 출간하면서 부록으로 붙이려고 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부록으로 붙이지 못해서 『소품과 부록』이라는 독립된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행복론과 인생론’인데요. 말 그대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에 해당하는 내용이기에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이 궁금하다면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세요.
② 박찬국 저, 『사는 게 고통일 때: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당신을 구할 철학수업』, 21세기북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읽기 쉽게 요약한 책입니다. 저자는 쇼펜하우어가 인생과 세계에 대해 철저한 폭로를 했다고 말합니다. 흔히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이지만 사실 그는 엄청난 현실주의자입니다.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 현실에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를 고민하기를 요구하니까요. 저자는 세상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도 무가치하고 부질없는 것으로 느끼면서 자기혐오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실존철학과 생철학의 권위있는 연구자인 저자가 일반인을 위해 쉽게 쓴 이 책을 통해 쇼펜하우어를 만나보시기를 권유합니다.
[MZ세대와 함께하는 철학 카페] 나는 왜 살아야 할까...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feat. 쇼펜하우어)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장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 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적 성찰력의 힘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글로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단독 저서로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공동저서로 『철학, 삶을 묻다』, 『미래 인문학 트렌드』, 『왜 철학상담인가?』 등이 있고, 역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공동번역서로 『철학 2: 실존조명』, 『50인의 철학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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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살아야 할까...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feat. 쇼펜하우어)
- MZ세대와 함께하는 철학 카페 -
박은미
2022-01-21
생명의 불꽃이 얼마 남지 않은 브랜든에게 엄마는 하고 싶은 것이 무어냐고 묻습니다.
브랜든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노숙자들의 캠프를 봅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주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왜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주고 싶었을까요?
Q. 맛집, 여행, 취업 다 좋은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과제를 완성하고 좋은 성적을 받고
예매에 성공한 공연을 가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즐거워요.
하지만 이게 삶의 의미인가요?
취업을 하고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차를 사고
비싼 집을 사면
행복하고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삶의 의미일까요
A. 삶의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삶의 의미를 정립할 수는 있습니다.
태어나겠다고 결정한 적도 없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연봉의 직장에 취직하고, 비싼 집을 사고,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맛집을 가고, 남들이 선망하는 여행 사진으로 SNS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행복하고 기분이 좋기는 한데 그런데 이것이 삶의 의미일까요? 삶의 의미, 이 문제야말로 철학이 답변해야 할 문제이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철학자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살고 있었죠! 나는 태어나겠다고 결정한 적이 없는데도요. 때로는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언제 존재하겠다고 결정한 적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정말이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난감한 현실을 두고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피투(被投)되었다’ 즉 ‘던져졌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졌죠, 그것도 내가 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던져졌습니다. 이 외모로, 이 나라에, 현재의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기껏해야 100년이라는 시간을 살다가 떠나가게 됩니다.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기는 가는 건지조차 알 수가 없지요.
그 100년이라는 시간도 생각해보면 참으로 허망합니다. 초반 20년은 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는 데 보내야 합니다. 말년의 20년은 아픈 몸으로 고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맘대로 살아볼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60년입니다. 이러려고 태어났을까요? 그 60년의 시간도요, 이 규칙 저 규칙 지켜가며 살아야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뭔 의무는 그렇게도 많은지 말이지요. 독일 출신의 생(生)철학자인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이러한 황당한 인간의 삶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들어보실래요?
쇼펜하우어(좌)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표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교보문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밖에서 보면 얼마나 무의미하고 보잘것없게 흘러가고 안에서 갖는 느낌으로도 얼마나 숨 막히고 제정신이 아니게 흘러가는지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들의 삶은 빛바랜 동경이자 괴로움이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생각을 품고 인생의 사계를 거치며 죽음을 향해 꿈결처럼 허우적거리며 걸어간다. 이들은 태엽이 감기고는 왜 그런지 알지도 못하고 가는 시계의 태엽 장치와 같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기는 것인데 이는 이미 수없이 연주된 손풍금 곡을 악절마다 소절마다 보잘것없게 변주하여 거듭 되풀이하기 위해서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58절
인간을 ‘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가는 시계의 태엽 장치’에 비유한 것이 인상 깊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힘’을 ‘의지’라고 칭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자연 속의 모든 힘’이고 바로 ‘모든 사물을 지금의 사물로 존재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따라 어떤 일은 잘 풀리고 어떤 일은 안 풀립니다. 인간은 잘 풀리는 일은 좋다고 하지만, 잘 안 풀리는 일은 나쁘다고 하면서 고통을 느낍니다. 잘 풀리는 일은 계속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잘 안 풀리는 일은 앞으로는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그 일들을 쳐다보며 힘이 듭니다.
물론 세상살이가 재미있기도 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할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악기나 스포츠 그리고 각종 취미 활동 등 배워 볼 것도 많습니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득문득 의문이 듭니다. 학교, 직장, 결혼, 아이..., 이 모든 싸이클을 다 돌고 나면 뭐가 남는 걸까요? 남들이 말하는 기준을 다 충족시킬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기준을 다 충족시키고 나면 나는 뭐가 되는 거지?’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살다 가는 건가...? 인생은 뭐지?’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고통일까, 행복일까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궁핍함으로든 무료함으로든 고통스러운 그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궁핍함이 싫기에 부를 추구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는 부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부를 가진 사람은 많은 재산을 유지하려고 전전긍긍하느라 행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느끼므로 재산은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무료함에 대해 생각해볼까요? 요즘 엄청난 인기를 거둔 〈오징어 게임〉에서도 무료함에 지친 사람이 등장하지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핍함에 시달린다고 느끼기 때문에 무료함이 주는 고통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없는 경우에는 더이상 추구하고 싶은 것이 없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바라다보면 행복이 너무 드물게 느껴지고 또 행복이 가고 나면 고통이 더 심해지기에 차라리 고통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지요.
사실 쇼펜하우어가 삶의 의미가 뭔지를 결론 내릴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삶은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의해 이유도 없이 펼쳐지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니 말입니다. 인간은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울고 웃게 되어 있을 뿐이니 의지에 의해 결정당하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의 덧없음을 직시하면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없는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깨닫고 나면 더 이상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우리가 삶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결론을 내린다고 해서 삶이 정말 그렇다는 보장이 없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삶이 어떠한 이유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음을 생각하면, 삶이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일 뿐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설명이 매우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맹목적인 힘에 의해 달라지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 것일까요?
타인의 삶 역시 고통스럽다
쇼펜하우어는 동고(同苦, Mitleid)를 말합니다. 나만 이 맹목적인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 삶의 맹목성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나뿐만 아니라 저 사람도 이 답 없는 삶의 움직임의 그 맹목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생의 동지, 이 고통의 바다를 함께 건너야 할 동료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는 데에는 물론 자신이 마주한 현실이 좋으니 나쁘니를 따지는 자기중심성을 탈피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쇼펜하우어 철학에서는 ‘너와 내가 완전히 구분되는 개체’라는 의식에 빠져 있는 것이 부적절합니다. 어쩌다 의지가 그러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그 자리에 서게 된 존재가 너이고, 의지가 이러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이 자리에 서게 된 존재가 나이기에 그렇습니다. 너와 나는 의지의 큰 흐름을 실현하는 매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너와 나는 그렇게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타인이 이 고해(苦海)를 헤쳐 나가느라 나만큼이나 힘든 또 한 명의 사람임을 알게 되면 우리에겐 설명할 수 없는 연대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어려움을 겪으면 응원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 있으면 기뻐하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타인에 대해 막연한 연대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쉽게 불행해집니다. 인간은 연대감을 느낄 때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밥 먹으면 배부른 것처럼 ‘그냥 그렇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고의 실제 사례는 많습니다.
시한부 소년은 왜 노숙자들에게 샌드위치를 주고 싶었을까
미국의 시애틀에 살던 11살 소년 브랜든의 얘기도 그러합니다. 어려서부터 희귀병으로 고생한 브랜든은 지난 2008년, 열심히 치료를 받았는데도 결국은 2주밖에 삶이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생명의 불꽃이 얼마 남지 않은 브랜든에게 엄마는 하고 싶은 것이 무어냐고 묻습니다. 힘없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브랜든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노숙자들의 캠프를 봅니다. 그리고는 “저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주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브랜든의 이 소원은 여러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어 많은 사람들이 샌드위치 캠페인에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캠페인을 통해 많은 노숙자들이 〈브랜든의 샌드위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브랜든은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꿈을 잃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미국의 시애틀에 살던 11살 소년 브랜든 (이미지 출처: Dignity Memorial)
이 소년은 왜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주고 싶었을까요? 죽음 앞에 선 브랜든의 소원이 왜 만나지도 못한 타인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사람들은 브랜든의 샌드위치를 응원하게 되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습니다. 죽음 앞에 서면 ‘정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구분이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죽음에 가까이 가보지 못해서 이를 경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막상 죽음 앞에 서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타인을 더 위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죽음 앞에서 제 삶의 의미를 정립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원 철학과 진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모으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도를 만나 학교에 내려던 등록금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 강도가 칼을 들고 있었으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세상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담배 연기보다도 더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인생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 무엇인가는 또 왜 해야 하는 것일까?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무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깊게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철학과 대학원에 왜 가야 하는지조차 불투명해졌습니다.
저는 오랜 고민과 방황 끝에 ‘담배 연기보다도 더 허무한 인생’을 철학에 던지기로 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사상이라는 그물로 엮는 철학자는 행복하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만나면서 제가 원래 철학을 하고 싶었던 이유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삶에 닿아 있는 철학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동지들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철학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잘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날로 고민을 접고 철학과 대학원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삶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잘 구분되었습니다. 저에게는 대학교수가 되는 것보다 철학을 쉽게 전하느냐 전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문적인 어려운 논문을 쓰는 것보다 쉬운 말과 글로 ‘지혜로서의 철학’을 전하는 것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나의 죽어가는 삶을 어디에 던질 것인가
삶의 의미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삶의 의미를 어디서 느끼는가를 관찰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공통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에서는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삶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위할 때가 아니라 타인을 위할 때 정립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보통 죽음 앞에서 정립됩니다. 제가 보기에 인간은 동고(同苦)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죽어가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다 보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종착지는 바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고’입니다. 그리고 동고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나갈 것인지에서 나의 삶의 특수성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라는 슬프지만 엄정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이 죽어가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부터 잘 고민해보세요. 여러분도 저와 동일한 결론을 얻게 되는지 아닌지 잘 살펴보세요. 삶을 죽음으로부터 도망 다니는 시간으로 채우면 삶의 의미와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나의 죽어가는 삶을 어디에 던질 것인지 고민하다 보면 자신만의 단단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 나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가장 지속적인 행복인 것 같습니다.
목마른 당신을 위한 인생 비타민
① 쇼펜하우어 저, 홍성광 역,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을유문화사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특히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을 모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낸 지 36년 만에 2판을 출간하면서 부록으로 붙이려고 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부록으로 붙이지 못해서 『소품과 부록』이라는 독립된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행복론과 인생론’인데요. 말 그대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에 해당하는 내용이기에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이 궁금하다면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세요.
② 박찬국 저, 『사는 게 고통일 때: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당신을 구할 철학수업』, 21세기북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읽기 쉽게 요약한 책입니다. 저자는 쇼펜하우어가 인생과 세계에 대해 철저한 폭로를 했다고 말합니다. 흔히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이지만 사실 그는 엄청난 현실주의자입니다.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 현실에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를 고민하기를 요구하니까요. 저자는 세상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도 무가치하고 부질없는 것으로 느끼면서 자기혐오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실존철학과 생철학의 권위있는 연구자인 저자가 일반인을 위해 쉽게 쓴 이 책을 통해 쇼펜하우어를 만나보시기를 권유합니다.
[MZ세대와 함께하는 철학 카페] 나는 왜 살아야 할까...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feat. 쇼펜하우어)
- 지난 글: [MZ세대와 함께하는 철학 카페] 공정, 과연 최고의 가치일까요?(feat. 아리스토텔레스, 마이클 샌델)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장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 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적 성찰력의 힘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글로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단독 저서로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공동저서로 『철학, 삶을 묻다』, 『미래 인문학 트렌드』, 『왜 철학상담인가?』 등이 있고, 역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공동번역서로 『철학 2: 실존조명』, 『50인의 철학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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