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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는가?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김해원

2022-09-21

공포에 휩싸인 오랑시에서 누군가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고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돌아다녔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 빼앗아 가 버리고만 페스트에 맞선 이들도 있었다. 알베르 카뮈는 ‘끝없는 패배’인 페스트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의사 리유의 말을 빌려...

 


지구가 자연재해로 무너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인류 앞에 닥친 자연재해는 흔히 ‘역대급’, ‘최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역대급 태풍, 최악의 폭염, 폭우, 가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상 기후는 점차 잦아지면서 곧 인류의 일상이 될 거라는 불길한 예측은 지구 곳곳에서 눈앞에 닥친 현실이 되고 있다. 달에 우주선을 보내고, 우주망원경으로 135억 년 전 우주의 빛을 찍고, 넘어뜨려도 인간처럼 유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로봇 같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눈부신 과학 문명 발전’을 이룬 인류는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21세기 자연재해를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업보’. 과학자들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를 만들어낸 인류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고 있지만, 인간은 여전히 매주 자기 몸무게만큼의 인공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만들고, 소비하고, 다시 만들고,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온 인류는 결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지구 기온을 4도쯤 올리는 어려운 일을 기어이 해내고 만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업보’를, 일상적인 자연재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만한 만물의 영장은 디지털 시대에도 자연재해를 초월적인 존재의 농간이라고 여긴 조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할지 모른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코로나19 바이러스



세계인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이미 공포를 체험하고 있다. 인류는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감소시킨 페스트와 1918년 순식간에 전 세계를 감염시키면서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14만 명이 사망한 스페인 독감을 겪은 경험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포’와 ‘두려움’에 초연할 수 없었다. 물론 감염자를 집에 가둔 채 못질을 한 뒤 불을 지르거나, 페스트가 우물에 독을 탔기 때문이라는 유언비어로 유대인을 학살한 중세 시대의 무지가 빚어낸 최악의 공포와는 다르다. 바이러스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빠르게 알아냈고, 발 빠르게 백신도 만들어냈다. 죽음을 막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중세 시대의 무지에 비교한다면 인류는 진보한 게 확실했다. 그리하여 코로나19의 발화점이 중국 우한의 시장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 무분별한 개발로 생태계를 파괴한 인류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도 언제든 인수 공통의 전염병으로 팬데믹과 엔데믹을 반복하게 될 거라는 불길한 미래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앎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국내에 처음 코로나바이러스가 유입되었을 때 감염자의 동선이 낱낱이 온 국민에게 공개되고, 비난을 퍼부은 것은 변명이 아니라 진짜 공포 때문이었다. 공포 앞에서 인류는 자유와 권리를 빠르게 포기하면서 감염자의 인권은 쉽게 묵살되었다.


 

팬데믹에 직면하여 우리는 생명정치적 감시권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양의 자유주의는 바이러스 앞에서 분명히 실패하고 있다. 팬데믹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개인들을 하나하나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관철될 것이다. 개인에 대한 이 생명정치적 감시는 자유주의의 원칙들과 모순된다. 그러나 위생이 중시되는 상황에서 생존사회는 자유주의적 원칙들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 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 중 -

 

 


국가의 감시와 통제

국가의 감시와 통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감시와 통제를 기꺼이 수용했고,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배척되었다. 시청 홈페이지에는 감염자의 너무 뻔한 일상이, 편의점에서 빵집으로 세탁소로 커피숍으로 이어진 게시물이 띄워져 있었고, 그것을 일일이 챙겨보는 이들은 ‘도대체 뭘 이렇게 싸돌아다닌 거냐’며 분노했다. 감염자가 많이 나온 커피숍은 꽤 오랫동안 블라인드를 내린 채 분노와 질타의 시선을 피하며 영업을 해야 했다. 공포에서 비롯된 분노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분노에 휩싸여 있는 동안 확진자의 죽음은 깊은 애도를 받을 수 없었다. 숫자로 표기되는 죽음은 바이러스의 위력을 판단하는 수치로만 보일 뿐이었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에서 페스트가 무섭게 번지고 있는 오랑시의 절망을 공포와 반항이라고 표현했다.



실상 8월 중순쯤에는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린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인 사건과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밖에는 없었다. 가장 뚜렷했던 것은 생이별과 귀양살이의 감정이었다. 거기에는 공포와 반항이 있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 -



공포에 휩싸인 오랑시에서 누군가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고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돌아다녔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 빼앗아 가 버리고만 페스트에 맞선 이들도 있었다. 알베르 카뮈는 ‘끝없는 패배’인 페스트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의사 리유의 말을 빌려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 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 두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했다. 알베르 카뮈는 재앙을 겪은 인간들이 고통과 불행을 통해 교훈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코로나19와 맞서 싸운 사람들

코로나19와 맞서 싸운 사람들


 

과연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코로나 엔데믹이 거론되면서 공포와 분노는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맞서 싸운 이들의 희생이나 감염자들의 비극적인 죽음은 흐릿해지고 있다. 더욱이 감염자들을 비난했던 부당한 분노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이렇게 인류가 교훈을 얻지 못한 채 망각하게 된다면, 정말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고 만다.


『페퍼민트』(백온유/ 창비)는 치사율이 5%나 되는 프록시모 바이러스가 확산한 후 6년이 지난 시간을 들여다본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뒤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6년 동안 간병하고 있는 열아홉 살 ‘시안’의 가족은 평범한 삶을 잃어버렸다. 처음에는 엄마의 부재가 일상을 깨뜨렸다면 이제는 엄마의 존재로 일상이 불안해진 슬픔을 시안은 묵묵히 받아들인다. 

 

 

아빠와 교대하고 돌아온 뒤 다이어리에 하루를 정리했다. 엄마의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적어둬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다른 점을 하나라도 기록해야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 백온유 <페퍼민트> 중 -



시안은 하루하루 오늘만 산다. 집안에 따뜻한 엄마의 목소리가 가득했던 과거는 희미하고, 미래는 희박하다. 그런 시안 앞에 서로 집을 오가면서 자매처럼 지냈던 친구 해원이 나타난다. 6년 전 해원의 가족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슈퍼 전파자 N번으로 불렸다. 해원의 엄마가 미국에 다녀오면서 바이러스에 전염되었고, 순식간에 전염병이 확산하면서 살던 지역이 봉쇄되었다. 해원의 가족은 온갖 비난에 시달리다가 야반도주하듯 이사를 갔고, 해원은 이름까지 바꿨다. 시안은 자신과 다르게 과거의 시간을 떨쳐내고 평범한 삶을 살면서 미래를 꿈꾸는 해원을 보자 자신이 잃은 것들이 사무친다. 공포와 분노의 시간을 겪은 시안과 해원의 가슴 아픈 재회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누군가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야만의 시간. 불의의 시간이 남긴 상처. 지울 수 없는 상흔은 고통스럽지만, 시안과 해원은 서로의 고통을 품는다.


오랑의 절망에서 시작한 『페스트』도 한 인간의 절망을 파고든 『페퍼민트』도 코로나 팬데믹에서 인류가 찾아야 할 ‘희망’을 보여준다. 자연재해의 재앙에서 인간은 인간의 손을 잡고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인간도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섬’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바다에 떠있는 ‘대륙’의 일부이다. 하나의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사라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진다. 육지 끄트머리가 사라지고, 당신 친구들의 소유지가 사라지고, 당신 자신의 소유지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한 인간의 죽음은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니, 나는 인류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마라. 그 종은 당신을 위해 울리는 것이다.


- 존던 <인간은 섬이 아니다> 중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팬데믹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는가?

- 지난 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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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원

시인
어린이책과 청소년 소설을 쓰고 있다. 세상에 내놓은 책으로는 『오월의 달리기』『열일곱 살의 털』『추락하는 것은 복근이 없다』『나는 무늬』 따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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