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발표하고 생산, 유통하는 플랫폼의 차이가 단행본 플랫폼으로 대표되는 순수문학과 차이를 나타낼 수는 있겠지만,
그 차이가 철학적 사유 분출의 농밀함 여부를 손쉽게 재단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구별 짓기
먼저, 불편한 지적부터 하고 시작해야겠다. ‘장르문학’이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한국사회, 특히 문학 필드에서 일단 구별짓기의 키워드로 기능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해외에서는 장르문학을 어떻게 보는지에 관한 사안이 본 글의 주제가 아니라면 한국사회에서 통용되어 온 문화예술 키워드에서 ‘장르’는 그 적용과 확산의 광범위함만큼이나 순문학, 순수예술의 기준에서 대체물 내지는 더 노골적으로 말해 대중문화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이른바 ‘구별 짓기’에서 출발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 포개어지는 건 기존 패러다임에서 통용되는 대중문화와 통속성이란 정서적 맞물림이다. 이제 대중문화는 글로벌한 대세로 자리 잡은 속칭 K-드라마에서 시작해 BTS, 블랙 핑크로 대표되는 K-POP까지, 그 규모와 영향력의 경중 여부와 상관없이 하위문화의 변종이나 그 자체로 하위 대표성을 갖는 영향력으로 인지되어 온 것이다.
더욱이 웹소설과 웹툰으로 대표되는 장르문학은 대중문화가 표방해온 대중성, 혹은 보편적 문화예술향유자로부터 파생된 일반화된 문화향유와는 시작점부터 다르다. 장르문학이 결국, 순수예술 분야의 변종이거나 모더니즘적 속성의 전통적 서클 내부로 편입되지 못한 이른바 번외 영역으로 대체된 것으로 간주하는 실정에서는 대중문화가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통속성 이상의 부정적 경향을 덧입게 된 나머지 ‘장르문화 - 하위문화’라는 등식은 문자 그대로 문화 계급에서 상위를 점유하지 못한 탈락한 대안 정도로 인지되어온 것이다.
주제 넘게도 한국의 근대화 이후의 문화 정서를 소묘해보면, 한국 문화를 끌어온 정서는 분명 대중문화가 그 주요한 주축임에 이견이 없다. 문제는 대중문화와 순수문화 사이의 엄격한 ‘구별 짓기’가 일종의 문화 계급으로 그 강고한 편견의 함정을 가속화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글은 현재 형성된 구별 짓기의 프레임 자체를 지적해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조금 비껴가 생각해보려 한다. 구별짓기의 프레임 여부와 실체적 주범을 추적하는 일은 문화사회학의 몫이라 보여 본격적 논의가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그 파생 지점에서 나타난 장르문학에서 분출되는 철학적 사유의 논의나 가치 자체가 소거되거나, 소위 말하는 주류 문화에서의 배제단위로 봐야 하는 편견에 대한 논의를 더욱 냉소적으로 전개할 필요를 불러일으킨다.
두 가지 방향에서 발견되는 섬뜩함이 있다. 첫 번째 방향은 장르 문화의 시작점 자체부터 부딪히는 안팎의 논리 기반으로서 순수문화와의 가치 차별에 대응하는 메타 인지 관점에서의 접근이며, 두 번째 방향은 장르 문화가 가진 차별적 관점에 의해 축조된 편견 기반에서의 ‘하위’가 아닌 리얼리즘 차원에서 자리 잡은 하위문화가 보유한 철학적 사유 철저성이다. 두 경우를 모두 섬뜩함이라 보는 이유는 여전히 장르 자체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에 스며든 편견과 연관되었음을 거듭 밝히기에 그렇다.
첫 번째 방향 – 순수문학과의 가치 차별
장르문학과 순수문학 사이의 구별 지점을 본다면 여전히 이 문화적 키워드 사이엔 엄격한 ‘구별 짓기’가 존재한다. 웹소설, 웹툰을 자본주의적 범주 이전에 대중 화제성 범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수문학에 비교해 월등함에도, 오히려 그 대중적 화제성 편차가 순문학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역설로 활용하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하곤 한다. 웹소설, 웹툰과 이른바 단행본 순문학 사이엔 여전히 어느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논지인데, 그 구별 짓기의 논지가 과연 온당한 것인지 누군가가 작심하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엄밀히 말해 두 분야 사이엔 플랫폼과 공급, 수요 주체의 차이에 따른 성질 차이만 있을 뿐, 이른바 작품성의 농도와 질을 구분 짓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웹툰이 대중적이며 드라마, 영화 매체와 친밀하게 교류하며 이른바 OSMU(One Source Multi Use)를 선점한다는 견해, 반대로 순수문학은 더 깊은 철학적 성찰의 소재와 문장력, 메타포가 포진된 탓에 대중문화에 효과적으로 부합되지 않는, 이질적 예술 가치를 보유했다고 보는 견해 자체가 오류와 편견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플랫폼의 차이에 따른 작품 성격의 변화가 가져오는 작품성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르게 보면 항수와 변수 사이의 지속적인 밀고 당기는 흐름으로 이어진 보편성에 불과할 것이지, 그것을 두고 순수문학과 웹툰, 웹소설을 망라한 장르문학을 ‘구별 짓기’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이 역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는 가치의 우월성 여부와 상관이 없다. 단지 플랫폼과 표현 수단의 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작품을 발표하고 생산, 유통하는 플랫폼의 차이가 단행본 플랫폼으로 대표되는 순수문학과 차이를 나타낼 수는 있겠지만, 그 차이가 철학적 사유 분출의 농밀함 여부를 손쉽게 재단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최근 방영된 타임루프, 타임슬립을 소재로 다룬 복수환생물 드라마인 ‘어게인 마이 라이프’(SBS)와 ‘재벌집 막내 아들’(JTBC) 모두 웹에 기반을 둔 장르문학에서 출발했다. 드라마로 구현되는 과정에서의 여러 공과 과를 배제하고 본다면 두 작품을 통해 단지 통속적 재미만을 남겼다고 평가받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왼쪽부터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 (출처:SBS),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출처 JTBC)
복수환생물이란 장르 키워드가 가진 재미 동력에서부터 시청자나 독자의 마음가짐을 역사적 궤적의 회고와 결을 함께 하게 만든다. 복수를 위해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거나(어게인 마이 라이프), 처음부터 다른 출생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신생출생경험(재벌집 막내 아들)을 통해 복수환생물은 우리가 경험해온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보는 재미를 위해 무리수가 느껴지는 변수 설정으로 인해 일부 훼손된다 하더라도 스토리텔링 안에 담겨 있는 인간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철학적 화두, 곧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라는 식의 인문학적 질문 던지기만큼은 효과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결국, 복수환생물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우리 삶의 재점검 내지는 반성적 회고란 철학적이며 인문학적 사유를 제공한 적절한 활용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장르문학과 순문학은 플랫폼으로 인한 차이, 곧 수평적 차이만 존재할 뿐, 철학적 사유의 농밀함 여부를 ‘구별짓기’ 하는 수직적, 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이야말로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방향 - 하위문화 자체가 보유한 철학적 사유 철저성의 측면
두 번째 방향을 생각하기에 앞서 하위문화를 어떻게 규정해왔는지 점검해보자. 본래 하위문화는 상위문화의 서열 아래에 놓인 종속변수가 아니라 그 자체인 독립변수로 봐야 한다. 물론 ‘하위’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이미 높고 낮음의 서열을 제공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21세기 사회가 포스트 모던의 사회라는 문화적 합의로 본다면 하위문화의 문화적 합의가 더는 상위문화의 가치 우월성을 인정하는 전제로부터가 아닌, 하위문화 그 자체의 합의로 보는 게 타당하다.
문화에서의 ‘하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중성 혹은 통속성의 한복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장이 갈등과 혼란의 장으로 급변하는 현상 진단을 야만적이거나 현장 밀착적으로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키워드로 대표된다.
왼쪽부터 영화 <저수지의 개들>, <킬빌> (출처: 네이버 영화)
순수문학의 장르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경우, 스스로 대중적 친밀감과 거리 두기를 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모더니즘적 강박, 더 노골적으로 말해 한층 괴이하게 진화한 엘리트주의의 시선에 그 역시 괴이하게 견고화된 자기검열적 예술을 추구하곤 한다. 이 사이, 하위문화를 표방한 예술의 대중화, 대중의 현장성을 중시하는 표현 욕구는 그 역시 노골적으로 리얼리즘의 심층으로 파고드는 것에 일말의 자기검열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B급 예술, 하위문화라는 키워드가 작품의 전체 질의 하락을 표방하는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대표작 ‘저수지의 개들’, ‘킬빌’이 B급, 혼종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논할 수 없는 하위문화의 대표성을 가진다 해도 그 하위문화의 헤게모니가 작품성을 배제한 채 대중적인 열광과 지지만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건 이미 세계영화계가 충분히 인정하고 남은 바 있다. 하위문화는 그 자체로 우리 사회가 알고 있지만, 그 기이하게 잔류해 있는 엘리티즘과 사대주의의 강박에 의해 덧씌운 진정한 리얼리즘과 거리를 두는 태도 자체를 거부하는 이른바 새로운 지평을 무한대로 허용하는 장르적 플랫폼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장르문학이 자인하는 맹점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한국적 장르문학 시장에 형성된 자기복제 스토리를 무분별하게 생산한다는 점. 아울러 장르적 특성을 전형적이고 기계적으로 활용한다는 점 등은 한국의 웹툰과 웹소설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하는 것만큼이나 작가 고유의 개성과 정체성 함몰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한 요소가 다분하다. 이 경우 하위문화가 갖는 함의를 일반 대중적 삶의 요소들이 자생적, 불연속적으로 유출되고 뒤섞이면서 나타나는 문화 현상과 관련된 철학적 사유의 화두로 작동하는 데에서 찾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하위의 혼종적 특징을 섣부르고 도식적으로 비하해 생산함으로써 가성비 좋은 호환성을 최대 장점으로 설정하는. 말 그대로 보급형 작품을 하위문화로 등식화시키는 악순환이 작동된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하위는 중의적 의미를 띈다. ‘구별 짓기’로부터 비롯된 문화 계급이 그 자체로 예술지상주의.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뒤, 리그에 편입되지 못하는 문화 현상을 하위문화를 부를 경우. 이때의 하위문화로서의 장르문학은 오히려 작품의 치열함이나 미학적 특수성을 존중하고 무엇보다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태로 기능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지상주의 엘리티즘(elitism)에 관한 저항과 별도로 말초적 문화 소비 차원에서 생산되는 함량 미달의 동어반복, 끊임없는 표절 시비, 작품의 현저한 질적 하락, 전형적인 클리셰 남발 등을 일삼는 ‘하위’는 문자 그대로 함량 미달이란 뜻으로서의 ‘하위’로 사용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필자는 위의 맹점 또한 순문학의 영역이 온전히 면죄부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또한, 그 맹점이 필연적으로 장르문화에서만 나타나는 맹점이라고 등식화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것은 문화를 대하는 태도 일반에 관한 쟁점이지, 순문화와 장르문화의 계급적 차이에서 태동된 문제의식으로 보는 것 역시 순문화에서만 작품다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또 하나의 엘리티즘의 산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장르문학에 나타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
앞서 살핀 것처럼 엘리트 의식의 관점에서 문화 현상을 들여다보고 그와 관련된 현상 진단이나 대안을 도출하는 것이 그 역시 오해에서 발전된 순수문학의 철학적 탐색이라 본다면 장르문학에서 도출되는 문화 현상의 진단과 대안 모색은 그 기본 전제에서부터 다른 지점을 점유하고 있다고 볼 필요가 충분하다.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 물화(物化)된 자본주의 가치 체계의 한복판에서 생산, 유통, 향유되는 장르문학은 그 태생적 특성 자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발표된 작품의 안팎을 살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장르적 재미와 아울러 지속하는 안팎의 사회학적 현상을 살펴보고, 대중과 소비 주체가 어떤 측면에서 물화된 현실을 추종하거나 배제하려 하는지 살피도록 하는 힘을 장르문학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는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리해보자. 이제는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이라는 구별짓기가 더는 예술성이나 미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유효하지 않다는 전제임을 긍정해야 한다. 그 긍정의 시작점에서 다시, 다르게 보는 장르문화를 통해 본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은 분명 새로울 것이다.
소설가,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
- 서울에서 태어나 2009년부터 소설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열외인종 잔혹사』를 비롯해 장편소설 『메이드 인 강남』 『서초동 리그』 『반인간선언』 『크리스마스 캐럴』 『망루』 『너머의 세상』 『광신자들』, 청소년 소설 『아지트』 『주유천하 탐정기』, 에세이 『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 평론집 『성역과 바벨』 등을 썼으며 번역서로 『원전으로 읽는 탈무드』가 있다. 2017년 tvN 드라마 〈아르곤〉 집필, 2019년 OCN 드라마 〈모두의 거짓말〉 기획집필을 진행했으며, 2022년 작가의 동명소설 영화 『크리스마스 캐럴』의 각색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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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에 스며든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
- 장르 문화 속 인문 찾기 -
주원규
2023-01-18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는 가치의 우월성 여부와 상관이 없다.
단지 플랫폼과 표현 수단의 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작품을 발표하고 생산, 유통하는 플랫폼의 차이가 단행본 플랫폼으로 대표되는 순수문학과 차이를 나타낼 수는 있겠지만,
그 차이가 철학적 사유 분출의 농밀함 여부를 손쉽게 재단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구별 짓기
먼저, 불편한 지적부터 하고 시작해야겠다. ‘장르문학’이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한국사회, 특히 문학 필드에서 일단 구별짓기의 키워드로 기능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해외에서는 장르문학을 어떻게 보는지에 관한 사안이 본 글의 주제가 아니라면 한국사회에서 통용되어 온 문화예술 키워드에서 ‘장르’는 그 적용과 확산의 광범위함만큼이나 순문학, 순수예술의 기준에서 대체물 내지는 더 노골적으로 말해 대중문화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이른바 ‘구별 짓기’에서 출발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 포개어지는 건 기존 패러다임에서 통용되는 대중문화와 통속성이란 정서적 맞물림이다. 이제 대중문화는 글로벌한 대세로 자리 잡은 속칭 K-드라마에서 시작해 BTS, 블랙 핑크로 대표되는 K-POP까지, 그 규모와 영향력의 경중 여부와 상관없이 하위문화의 변종이나 그 자체로 하위 대표성을 갖는 영향력으로 인지되어 온 것이다.
더욱이 웹소설과 웹툰으로 대표되는 장르문학은 대중문화가 표방해온 대중성, 혹은 보편적 문화예술향유자로부터 파생된 일반화된 문화향유와는 시작점부터 다르다. 장르문학이 결국, 순수예술 분야의 변종이거나 모더니즘적 속성의 전통적 서클 내부로 편입되지 못한 이른바 번외 영역으로 대체된 것으로 간주하는 실정에서는 대중문화가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통속성 이상의 부정적 경향을 덧입게 된 나머지 ‘장르문화 - 하위문화’라는 등식은 문자 그대로 문화 계급에서 상위를 점유하지 못한 탈락한 대안 정도로 인지되어온 것이다.
주제 넘게도 한국의 근대화 이후의 문화 정서를 소묘해보면, 한국 문화를 끌어온 정서는 분명 대중문화가 그 주요한 주축임에 이견이 없다. 문제는 대중문화와 순수문화 사이의 엄격한 ‘구별 짓기’가 일종의 문화 계급으로 그 강고한 편견의 함정을 가속화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글은 현재 형성된 구별 짓기의 프레임 자체를 지적해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조금 비껴가 생각해보려 한다. 구별짓기의 프레임 여부와 실체적 주범을 추적하는 일은 문화사회학의 몫이라 보여 본격적 논의가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그 파생 지점에서 나타난 장르문학에서 분출되는 철학적 사유의 논의나 가치 자체가 소거되거나, 소위 말하는 주류 문화에서의 배제단위로 봐야 하는 편견에 대한 논의를 더욱 냉소적으로 전개할 필요를 불러일으킨다.
두 가지 방향에서 발견되는 섬뜩함이 있다. 첫 번째 방향은 장르 문화의 시작점 자체부터 부딪히는 안팎의 논리 기반으로서 순수문화와의 가치 차별에 대응하는 메타 인지 관점에서의 접근이며, 두 번째 방향은 장르 문화가 가진 차별적 관점에 의해 축조된 편견 기반에서의 ‘하위’가 아닌 리얼리즘 차원에서 자리 잡은 하위문화가 보유한 철학적 사유 철저성이다. 두 경우를 모두 섬뜩함이라 보는 이유는 여전히 장르 자체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에 스며든 편견과 연관되었음을 거듭 밝히기에 그렇다.
첫 번째 방향 – 순수문학과의 가치 차별
장르문학과 순수문학 사이의 구별 지점을 본다면 여전히 이 문화적 키워드 사이엔 엄격한 ‘구별 짓기’가 존재한다. 웹소설, 웹툰을 자본주의적 범주 이전에 대중 화제성 범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수문학에 비교해 월등함에도, 오히려 그 대중적 화제성 편차가 순문학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역설로 활용하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하곤 한다. 웹소설, 웹툰과 이른바 단행본 순문학 사이엔 여전히 어느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논지인데, 그 구별 짓기의 논지가 과연 온당한 것인지 누군가가 작심하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엄밀히 말해 두 분야 사이엔 플랫폼과 공급, 수요 주체의 차이에 따른 성질 차이만 있을 뿐, 이른바 작품성의 농도와 질을 구분 짓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웹툰이 대중적이며 드라마, 영화 매체와 친밀하게 교류하며 이른바 OSMU(One Source Multi Use)를 선점한다는 견해, 반대로 순수문학은 더 깊은 철학적 성찰의 소재와 문장력, 메타포가 포진된 탓에 대중문화에 효과적으로 부합되지 않는, 이질적 예술 가치를 보유했다고 보는 견해 자체가 오류와 편견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플랫폼의 차이에 따른 작품 성격의 변화가 가져오는 작품성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르게 보면 항수와 변수 사이의 지속적인 밀고 당기는 흐름으로 이어진 보편성에 불과할 것이지, 그것을 두고 순수문학과 웹툰, 웹소설을 망라한 장르문학을 ‘구별 짓기’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이 역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는 가치의 우월성 여부와 상관이 없다. 단지 플랫폼과 표현 수단의 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작품을 발표하고 생산, 유통하는 플랫폼의 차이가 단행본 플랫폼으로 대표되는 순수문학과 차이를 나타낼 수는 있겠지만, 그 차이가 철학적 사유 분출의 농밀함 여부를 손쉽게 재단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최근 방영된 타임루프, 타임슬립을 소재로 다룬 복수환생물 드라마인 ‘어게인 마이 라이프’(SBS)와 ‘재벌집 막내 아들’(JTBC) 모두 웹에 기반을 둔 장르문학에서 출발했다. 드라마로 구현되는 과정에서의 여러 공과 과를 배제하고 본다면 두 작품을 통해 단지 통속적 재미만을 남겼다고 평가받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왼쪽부터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 (출처:SBS),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출처 JTBC)
복수환생물이란 장르 키워드가 가진 재미 동력에서부터 시청자나 독자의 마음가짐을 역사적 궤적의 회고와 결을 함께 하게 만든다. 복수를 위해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거나(어게인 마이 라이프), 처음부터 다른 출생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신생출생경험(재벌집 막내 아들)을 통해 복수환생물은 우리가 경험해온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보는 재미를 위해 무리수가 느껴지는 변수 설정으로 인해 일부 훼손된다 하더라도 스토리텔링 안에 담겨 있는 인간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철학적 화두, 곧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라는 식의 인문학적 질문 던지기만큼은 효과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결국, 복수환생물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우리 삶의 재점검 내지는 반성적 회고란 철학적이며 인문학적 사유를 제공한 적절한 활용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장르문학과 순문학은 플랫폼으로 인한 차이, 곧 수평적 차이만 존재할 뿐, 철학적 사유의 농밀함 여부를 ‘구별짓기’ 하는 수직적, 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이야말로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방향 - 하위문화 자체가 보유한 철학적 사유 철저성의 측면
두 번째 방향을 생각하기에 앞서 하위문화를 어떻게 규정해왔는지 점검해보자. 본래 하위문화는 상위문화의 서열 아래에 놓인 종속변수가 아니라 그 자체인 독립변수로 봐야 한다. 물론 ‘하위’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이미 높고 낮음의 서열을 제공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21세기 사회가 포스트 모던의 사회라는 문화적 합의로 본다면 하위문화의 문화적 합의가 더는 상위문화의 가치 우월성을 인정하는 전제로부터가 아닌, 하위문화 그 자체의 합의로 보는 게 타당하다.
문화에서의 ‘하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중성 혹은 통속성의 한복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장이 갈등과 혼란의 장으로 급변하는 현상 진단을 야만적이거나 현장 밀착적으로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키워드로 대표된다.
왼쪽부터 영화 <저수지의 개들>, <킬빌> (출처: 네이버 영화)
순수문학의 장르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경우, 스스로 대중적 친밀감과 거리 두기를 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모더니즘적 강박, 더 노골적으로 말해 한층 괴이하게 진화한 엘리트주의의 시선에 그 역시 괴이하게 견고화된 자기검열적 예술을 추구하곤 한다. 이 사이, 하위문화를 표방한 예술의 대중화, 대중의 현장성을 중시하는 표현 욕구는 그 역시 노골적으로 리얼리즘의 심층으로 파고드는 것에 일말의 자기검열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B급 예술, 하위문화라는 키워드가 작품의 전체 질의 하락을 표방하는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대표작 ‘저수지의 개들’, ‘킬빌’이 B급, 혼종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논할 수 없는 하위문화의 대표성을 가진다 해도 그 하위문화의 헤게모니가 작품성을 배제한 채 대중적인 열광과 지지만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건 이미 세계영화계가 충분히 인정하고 남은 바 있다. 하위문화는 그 자체로 우리 사회가 알고 있지만, 그 기이하게 잔류해 있는 엘리티즘과 사대주의의 강박에 의해 덧씌운 진정한 리얼리즘과 거리를 두는 태도 자체를 거부하는 이른바 새로운 지평을 무한대로 허용하는 장르적 플랫폼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장르문학이 자인하는 맹점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한국적 장르문학 시장에 형성된 자기복제 스토리를 무분별하게 생산한다는 점. 아울러 장르적 특성을 전형적이고 기계적으로 활용한다는 점 등은 한국의 웹툰과 웹소설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하는 것만큼이나 작가 고유의 개성과 정체성 함몰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한 요소가 다분하다. 이 경우 하위문화가 갖는 함의를 일반 대중적 삶의 요소들이 자생적, 불연속적으로 유출되고 뒤섞이면서 나타나는 문화 현상과 관련된 철학적 사유의 화두로 작동하는 데에서 찾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하위의 혼종적 특징을 섣부르고 도식적으로 비하해 생산함으로써 가성비 좋은 호환성을 최대 장점으로 설정하는. 말 그대로 보급형 작품을 하위문화로 등식화시키는 악순환이 작동된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하위는 중의적 의미를 띈다. ‘구별 짓기’로부터 비롯된 문화 계급이 그 자체로 예술지상주의.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뒤, 리그에 편입되지 못하는 문화 현상을 하위문화를 부를 경우. 이때의 하위문화로서의 장르문학은 오히려 작품의 치열함이나 미학적 특수성을 존중하고 무엇보다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태로 기능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지상주의 엘리티즘(elitism)에 관한 저항과 별도로 말초적 문화 소비 차원에서 생산되는 함량 미달의 동어반복, 끊임없는 표절 시비, 작품의 현저한 질적 하락, 전형적인 클리셰 남발 등을 일삼는 ‘하위’는 문자 그대로 함량 미달이란 뜻으로서의 ‘하위’로 사용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필자는 위의 맹점 또한 순문학의 영역이 온전히 면죄부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또한, 그 맹점이 필연적으로 장르문화에서만 나타나는 맹점이라고 등식화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것은 문화를 대하는 태도 일반에 관한 쟁점이지, 순문화와 장르문화의 계급적 차이에서 태동된 문제의식으로 보는 것 역시 순문화에서만 작품다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또 하나의 엘리티즘의 산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장르문학에 나타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
앞서 살핀 것처럼 엘리트 의식의 관점에서 문화 현상을 들여다보고 그와 관련된 현상 진단이나 대안을 도출하는 것이 그 역시 오해에서 발전된 순수문학의 철학적 탐색이라 본다면 장르문학에서 도출되는 문화 현상의 진단과 대안 모색은 그 기본 전제에서부터 다른 지점을 점유하고 있다고 볼 필요가 충분하다.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 물화(物化)된 자본주의 가치 체계의 한복판에서 생산, 유통, 향유되는 장르문학은 그 태생적 특성 자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발표된 작품의 안팎을 살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장르적 재미와 아울러 지속하는 안팎의 사회학적 현상을 살펴보고, 대중과 소비 주체가 어떤 측면에서 물화된 현실을 추종하거나 배제하려 하는지 살피도록 하는 힘을 장르문학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는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리해보자. 이제는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이라는 구별짓기가 더는 예술성이나 미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유효하지 않다는 전제임을 긍정해야 한다. 그 긍정의 시작점에서 다시, 다르게 보는 장르문화를 통해 본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은 분명 새로울 것이다.
[장르문화 속 인문 찾기] 장르문학에 스며든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
- 지난 글: [장르문화 속 인문 찾기] 타임슬립을 한다면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소설가,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
- 서울에서 태어나 2009년부터 소설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열외인종 잔혹사』를 비롯해 장편소설 『메이드 인 강남』 『서초동 리그』 『반인간선언』 『크리스마스 캐럴』 『망루』 『너머의 세상』 『광신자들』, 청소년 소설 『아지트』 『주유천하 탐정기』, 에세이 『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 평론집 『성역과 바벨』 등을 썼으며 번역서로 『원전으로 읽는 탈무드』가 있다. 2017년 tvN 드라마 〈아르곤〉 집필, 2019년 OCN 드라마 〈모두의 거짓말〉 기획집필을 진행했으며, 2022년 작가의 동명소설 영화 『크리스마스 캐럴』의 각색작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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