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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곳의 뒷면을 상상하기: 디스토피아 SF의 세계

- 장르 문화 속 인문 찾기 -

문지혁

2022-11-22

사이버펑크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가 결합된 말로, 높은 기술과 대비되는 밑바닥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SF의 하위장르다. 주로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사회적 부패와 붕괴와 병치되어 디스토피아의 풍경을 그려내곤 하는데......



세상은 망해가고 있다



불편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진실이다. 우리가 실은 매일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그렇다. 과학자들의 추측처럼 138억 년 전에 우주가 생겨났다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모든 것의 끝이 도래할 날도 올 거라고 예측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 멸망과 파국에 대한 두려움은 오늘날 훨씬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전쟁 때문에, 핵무기 때문에, 기아 때문에, 소행성 때문에, 해수면 상승과 이상 기후와 빙하기 때문에, 좀비 때문에 망할 거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 심지어 음모론을 만들어 전파하고 소비하고 재생산한다. 우리는 왜 세계가 멸망하는 이야기에 열광할까?


문학, 특히 SF에서 이와 같은 파국의 상상력은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이름의 세부장르로 오래전부터 다뤄져 왔다. 디스토피아라는 말은 유토피아에서 왔는데, 유토피아는 모두가 알고 있듯 토머스 모어의 소설에서 나온 개념이다. 없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우’와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가 합쳐진 이 단어의 의미는 다시 말해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의 그림자이자 다크 버전, 다시 말해 ‘없는 곳의 뒷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SF를 통해 드러난 네 가지 형태의 디스토피아를 살펴보려 한다.

 

 

클래식 디스토피아

 

 

왼쪽부터 <강철군화>, <우리들>, <멋진 신세계> 책 표지 (출처: 알라딘)

왼쪽부터 <강철군화>, <우리들>, <멋진 신세계> 책 표지 (출처: 알라딘)



SF에서는 언제부터 디스토피아를 다루기 시작했을까? 20세기 들어 ‘가장 이른 현대적 디스토피아 소설(earliest of the modern dystopian fiction)’로 불리는 것은 잭 런던의 <강철군화>(1908)이지만, 일반적으로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것은 세 작품이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1927),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 그리고 조지 오웰의 <1984>(1949). 자먀찐의 <우리들>은 헉슬리나 오웰의 소설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멋진 신세계>와 <1984>가 펼쳐 보이는 세계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우리들>에 등장하는 ‘은혜로운 분’과 통제, ‘상상력 적출 수술’과 일기 쓰기, 세뇌 등은 <1984>의 ‘빅 브라더’와 전체주의적 세계관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가져온 구절을 반어적인 제목으로 사용한다. 소설의 전반부는 이 ‘멋진 신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인공부화기를 통해 하나의 수정된 난자에서 96명의 태아가 만들어지는 세계. 태어날 때부터 알파-베타-델타-감마-입실론이라는 계급을 부여받는 세계. 촉감 영화, 소마, 자유로운 섹스가 허용되는 세계. 무한한 쾌락과 자유가 주어진 이 세계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당신이 알파로 태어나기만 한다면.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에 야만인 보호구역에 살던 ‘존’이 이 세계로 건너오면서 균열과 의심은 시작된다. 처음에 존은 멋진 신세계를 동경하며 경탄하지만, 그 세계의 실상을 알게 된 이후에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지만 나는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가 과잉된 쾌락과 엄격한 계급제로 구성원들을 기만하는 가짜 세계라면, 조지 오웰의 <1984>는 통제와 금지로 유지되는 세계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속한 이 전체주의적 사회는 특히 언어의 역할을 중요시하는데, 신어(newspeak)라 불리는 이 언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반대와 역설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평화부에서는 전쟁을 담당하고, 풍요부에서는 식량 배급과 기아를 담당하며, 사랑부에서는 고문과 세뇌를 하고 진실부에서는 사실 은폐와 프로파간다를 맡는 식이다. 또 하나는 언어를 단순화시키고 줄이는 것이다. ‘나쁘다(bad), 좋다(good), 훌륭하다(exellent)’라는 서로 다른 세 개의 단어를 신어는 ‘나쁘다(ungood), 좋다(good), 훌륭하다(plusgood)’와 같은 방식으로 단순화시킨다.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오랜 격언을 떠올려 보았을 때, 단어가 줄어들고 축소되는 세계의 내면이란 초라하고 앙상한 공간일 수밖에 없다.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왼쪽부터 책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뉴로맨서> (출처: 알라딘)

왼쪽부터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뉴로맨서> (출처: 알라딘)


 

 SF와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래 사회의 암울한 밤거리를 상상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의 세계가 이미 우리에게 디스토피아에 관한 클리셰적 이미지를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네온사인 가득한 푸르스름한 거리에 비가 내리면, 어디선가 어두운 표정의 주인공이 담배를 물고 나타난다. 바로 사이버펑크다.


사이버펑크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가 결합된 말로, 높은 기술과 대비되는 밑바닥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SF의 하위장르다. 주로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사회적 부패와 붕괴와 병치되어 디스토피아의 풍경을 그려내곤 하는데, 1960년대와 70년대의 뉴웨이브 SF 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이버펑크에서 가장 유명한 두 작품을 고르자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장편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와 <매트릭스>의 원형이 된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실이란 무엇인가.’


이제는 다소 식상해진 주제지만 ‘인간보다 인간다운 로봇’은 SF의 영원한 테마 중 하나다. 필립 K. 딕의 소설과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주인공 릭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영화에서는 레플리컨트) 사냥꾼으로, 인간인지 안드로이드인지 정체가 의심되는 인물을 잡아 앉혀 두고 ‘보이트-캄프(Voight-Kampff) 테스트’라 불리는 과정을 진행한다. 데커드가 읽고 반응을 살피는 문장들은 대개 기억과 관련된, 그러나 어딘지 조금 이상한 것들이다. 당신은 생일에 송아지 가죽 지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손님들은 생굴을 맛보고 있습니다. 주요리는 속에 쌀을 넣고 푹 삶은 개고기였지요. 데커드는 상대방이 여기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토대로 그가 인간인지 아니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인간인지를 판별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또 한 가지 주제는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현실, 다시 말해 실재(the Real)에 관한 것이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꿈은 현실인가? 사실 꿈이야말로 유사 이래 인간이 경험해온 가장 오래된 가상공간, 사이버 스페이스다. 데커드가 꾸는 꿈에서는 유니콘이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유니콘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다. 이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곧 진짜 현실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진짜 현실이란 없고, 그저 이쪽의 세계와 저쪽의 세계만 있을 뿐일까?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에서는 이러한 사이버 스페이스가 본격화되고, <매트릭스>에서는 대중적인 문법으로 보다 선명하게 그려지며, <인셉션>에서는 꿈 그 자체를 중첩하는 방식으로 변주, 발전된다. 많은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 우리가 도착하는 지점은 장자의 ‘호접몽’이다. 잠에서 깬 나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을 뿐인가? 아니면 지금이야말로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영어덜트 디스토피아

 

 

왼쪽부터 <헝거게임>, <메이즈 러너>, <다이버전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왼쪽부터 <헝거게임>, <메이즈 러너>, <다이버전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최근의 디스토피아 소설과 영화에서 나타나는 흥미로운 흐름 중 하나는 바로 디스토피아와 영어덜트(young adult) 장르가 만나는 경우가 잦다는 점이다. <헝거 게임>, <메이즈 러너>, <다이버전트>는 모두 소설에서 시작해서 여러 편의 시리즈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는 공통점 외에도,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모두 청소년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요한 것은 그들이 다음 세대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미 만들어진 디스토피아는 기성세대의 잘못된 행위와 판단에 의해 생겨난 결과물이므로, 새로운 세대, 어리고 젊은이들에게는 별다른 책임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잘못 만들어진 사회와 시스템의 희생양이고, 따라서 가만히 순응한다면 억울한 피해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혹은 바꾸어야 하는 주체는 바로 ‘영어덜트’인 것이다.


로이스 로리의 <기억전달자>(1993)는 이러한 영어덜트 디스토피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열두 살의 주인공 조너스가 사는 세계는 일종의 마을 공동체로, 겉으로는 너무나 평온하고 안정된 미래 사회다. 하지만 곧 독자는 이 세계가 실은 ‘위장된 유토피아’라는 것을 알게 되고, 실상은 <멋진 신세계>와 <1984>가 결합된 끔찍한 디스토피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 역시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이 세계의 진실에 다가가고, ‘늘 같음 상태(sameness)’를 유지해야만 하는 마을의 절대적 규칙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과 모험을 감행한다.


이러한 영어덜트 디스토피아는 필연적으로 기존 세계의 해체와 균열, 주인공의 도전과 반항, 결과적으로 찾아오는 성장과 변화를 담게 된다. 이것은 이 이야기들의 실질적 독자일 청소년들에게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며, 자신이 속한 세계에 관한 의문과 의심을 해소하고, 더 나아가 전형적이지 않은 방식의 교양소설(Bildungsroman)로 기능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청소년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디스토피아이기 때문에, 청소년 독자들, 그리고 한때 청소년이었던 성인 독자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이 지나고 있는 혼란한 내면의 풍경이 낯선 디스토피아의 형식으로 펼쳐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디스토피아와 가장 많은 짝을 이루는 단어 두 개를 찾자면 아마도 아포칼립스(apocalypse)와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일 것이다. 아포칼립스는 본래 고대 그리스어 ‘apok£lupsis’에서 온 것으로, 닫혀 있던 것이 열리는 것(disclosure/revelation), 곧 신이 계시를 통해 진리를 나타내는 묵시(默示)를 의미한다. 성경의 <다니엘서> 후반부나 <요한계시록> 등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데, 문학 장르로서의 아포칼립스는 거대한 재앙이 일어나는 순간과 그 과정을 그리는 반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종말과 붕괴 이후의 세계를 다룬다.


영화 <워터월드>, <매드맥스>, <나는 전설이다>, <설국열차>, <부산행>, <컨테이젼> 등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아포칼립스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를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이 망할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그래서 때로는 ‘무엇 때문에, 어떻게 망하느냐’가 영화 사이의 주된 변별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 중에서는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예로 들고 싶은데,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는 세상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망했는지’를 전혀 이야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로드>에서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그는 어린 아들과 함께 어디론가 여행 중이며, 아내이자 엄마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은 이미 ‘망해’ 있는데(포스트 아포칼립스), 가장 중요한 ‘붕괴의 이유’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이 세계는 동식물이 멸종했고, 먹을 것이 없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 횡행하는 시대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 가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래된 지도를 들고 배낭 두 개만이 들어 있는 쇼핑 카트를 밀면서 바다를 향해 남쪽으로 조금씩 이동한다.


오직 동물적 생존만을 위해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죽음을 앞두고 아들과 자신을 모두 죽이려 했던 남자는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말한다. 넌 계속 가야 돼. 나는 같이 못 가. 하지만 넌 계속 가야 돼. 끝내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길을 떠난다. 그들이 그토록 도달하려 했던 바다는 회색빛이고, 아들에게는 새로운 동행이 생긴다. 길을 걸으며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계속해서 떠올린다. 너는 불을 운반해야 돼.


이 이야기의 결말은 아버지와 아들이 도착했던 회색빛 바다만큼이나 절망적이지만, 그들의 여정은 우리의 미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아니 어떤 모습이면 결코 안될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맺으며



없는 곳의 뒷면을 살펴보는 일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지도를 상상해 보는 일과 같다. 우리가 지나온 길과 지금의 현실을 토대로 다가올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일견 불가능하거나 불완전해 보이지만, 모든 지도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하고 진동하는 무엇이다. 지금 우리 손에 쥐어진 세계지도가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려 나가는 미래의 지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앞에는 어떤 디스토피아가 놓여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록 피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지도를 가진 사람에게 그 길은 조금 더 친절할 것이다.

  


 

 

 

[장르문화 속 인문 찾기] 없는 곳의 뒷면을 상상하기: 디스토피아 SF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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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

소설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전문사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에서 인문사회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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