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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라는 세계에서 독자를 기다리며

- 장르 문화 속 인문 찾기 -

김이환

2022-07-20

나는 SF라는 장르를 하나의 세계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글은 우리 주변의 세계를 작가가 자유롭게 재조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사실도 있지만 꿈이나 상상이나 거짓말처럼 사실이 아닌 것도 포함한다.

작가는 세계의 여러 부분을 떼어내 재조합해서 새로운 세계를 글로 완성하며,

어떤 규칙에 따라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창조한 세계의 장르가 결정된다. 

 

 

 

얼마 전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집 <저주 토끼>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는 경사가 있었다. <저주 토끼>는 SF로 분류하긴 하지만 제목은 호러 요소가 강하고 수록작 중에는 판타지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도 있는 다양한 장르가 모인 단편집이다. 다채로운 분위기의 단편을 잘 선별해 ‘저주 토끼’라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묶은 편집이 돋보이는 책이기도 하다. 정보라님은 꽤 많은 수의 단편과 장편을 발표했기 때문에, 정보라라는 작가를 처음 접하고 어떤 작가인지 알고 싶은 독자가 선택할 만한 책으로도 좋은 작품집이다. 좋은 책이라고 계속 생각해왔지만, 부커상 최종 후보까지 오르다니 정말 놀랐다. 정보라 작가는 상당히 많은 장편과 단편을 짧은 시간 동안 발표하면서 그 와중에 번역도 할 만큼 에너지 넘치고, 잘 읽히는 명료한 문장을 쓰는 좋은 작가라고 생각해왔는데 해외에서 인정을 받아 무척 기뻤다.

 

 

저주토끼 책 표지

정보라 소설 <저주토끼> 책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한국 SF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다니 믿어지지 않는 꿈같은 일이다. 다들 한국 SF의 전성기라고 말한다. <저주 토끼>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고, <타워>가 영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고, 정세랑님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제작됐다.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라떼는 말이야’로 들릴까 걱정스러운데, 내가 처음 SF를 썼을 때는 원고를 투고할 출판사도 찾기 어려웠다. SF를 출간하는 출판사도 많지 않아서 원고를 보낼 곳이 없었고, 공모전에서도 장르 소설은 뽑지 않았다. 웹상의 몇몇 사이트에 글을 발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누군가 SF를 알아줄 거라 믿고 같이 글을 쓰던 작가분들과 교류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글을 같이 썼던 정소연, 김보영, 배명훈, 정세랑, 정보라 님이 이제 유명 작가가 되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 모두가 아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 어떤지 설명하려니 무척 어렵다. 기존 SF 작가들의 활발하게 활동할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을 읽고 영향을 받은 2세대 작가들이 나오면서 SF 작가군이 계속 넓어지고 있다. SF 전문 출판사도 있고, 책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정말 많이 나오고, SF 공모전도 따로 있어서 훌륭한 신인 작가를 해마다 계속 배출한다. 너무 좋게만 말하는 것 같은데, 물론 SF라고 해서 출판 시장이 쉬웠던 적은 없다. 출판 시장은 IMF 이후 계속 불황인 곳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SF라는 세계에 모두가 호기심을 보이는 중임은 확실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책 표지

왼쪽부터 김초엽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책 표지 (출처: 교보문고) / <보건교사 안은영> 포스터(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나는 SF라는 장르를 하나의 세계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글은 우리 주변의 세계를 작가가 자유롭게 재조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사실도 있지만 꿈이나 상상이나 거짓말처럼 사실이 아닌 것도 포함한다. 작가는 세계의 여러 부분을 떼어내 재조합해서 새로운 세계를 글로 완성하며, 어떤 규칙에 따라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창조한 세계의 장르가 결정된다. 로맨스는 사랑이라는 규칙이 있고, 판타지는 환상이라는 규칙이 있다. SF는 과학이 세계의 규칙이다. 로맨스 장르는 로맨스의 세계에 판타지 장르는 판타지의 세계에 추리 소설은 추리 소설의 세계에 있으므로 장르가 존재하는 것이라 믿는다(물론 각 세계가 겹치는 경우도 있다). 

 

주제 사마라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쓸 때 사람들이 모두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세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인과관계에 따라 글을 풀어냈다고 말한다. <승리호>에서는 로봇의 정체가 이야기가 어떻게 풀려나가는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SF 소설 소재가 꼭 과학이어야 하진 않지만, 인과는 과학의 논리여야 한다. 많은 SF 소설에 드래곤이 등장하거나,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타임머신이나 중력 발생 장치, 시공간을 제약을 받지 않는 통신 장치를 사용한다.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소재를 사용하더라도 과학의 논리로 구성하는 세계가 바로 SF다.

 

 

승리호 포스터

<승리호> 포스터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이런 세계를 접한 독자가 어렵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낯선 장소에 가면 어색하고 싫거나 괜히 무서울 수도 있듯이 말이다. SF가 아닌 문단문학에 익숙한 독자라면 인물 내면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익숙할 것이다. SF의 논리가 과학이라면, 문단문학의 세계는 인물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가가 세계를 구성하는 논리다. 이 세계에 익숙한 사람은 SF라는 세계에 오면 당연히 낯설 것이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청소년 소설을 많이 썼는데, SF에 익숙하지 않은 편집자들이 내 원고를 접하고 비슷한 반응을 보일 때가 간혹 있다. 청소년 소설은 지금 한국 청소년이 생활하면서 겪는 고민을 담고 주인공의 내면을 밀도 깊게 묘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 소설인데 너무 어렵다’거나 ‘인물에 몰입이 안 된다’거나 ‘너무 장르적이다’라는 대답을 듣는다. 하지만 내 소설은 SF니까 그렇고, SF니까 그래야 한다. 편집자에게 내 글은 과학의 논리가 작품의 중심임을 설득해야 한다. 출판사가 나 같은 SF 작가를 선택한 이유도, 기존의 청소년 소설 작가들이 다루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글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

 

다른 해결 방법도 있다. 세계와 인물 모두 중요하게 다뤄서 문단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도 만족시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유명 SF 작가님의 베스트셀러는 인물과 세계 양쪽 모두 깊은 훌륭히 성취해낸 글이다. 이렇게 절충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반대로 그래서 싫다는 SF 독자도 드물지만 있다. 한국 SF는 영미권 SF와 달리 과학기술보다 인물을 중요하게 다뤄서 SF답지 않아 싫다는 독자가 있다. 사실 이런 불평을 하는 독자는 꽤 오랫동안 있었는데, 내가 처음 SF를 쓸 때는 이런 SF보다 완성도가 떨어지고 SF답지 않아 싫다는 독자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는 다양한 작가가 다양한 작품을 쓰고 있고, 그들을 만족시킬 만한 하드 SF도 있으므로 이런 독자도 언젠가 한국 SF에 만족하리라 믿는다. 

 

 

유령해마 책 표지

문복하 소설 <유령해마>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여기서 잠시 소설 <유령 해마>를 인용하고 싶다. SF가 어떤 세계인지 설명하는 좋은 이미지라고 생각해서 저 문장을 골랐다. 

나는 기분 좋게 함수에게 다가갔다. 논리 함수가 내게 물었다. 

[참입니까 거짓입니까?] 

[무한입니다.] 

앙으로 돌아올 때마다 매번 나누는 문답이다. 

건강한 해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질문과 답을 잊지 않는다. 

 

 

‘함수니, 무한이니, 해마니, 조금 어려운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잠시 진정하고, 이 세계를 상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만나는 존재에게 참인지 거짓인지 묻고, 상대방이 무한이라고 대답하는 세계를 그려낸 저 짧은 문장에서 나는 지금의 한국 SF가 주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뛰어난 한국 작가들이 한국 SF라는 세계를 열었다. 한국 SF는 정말 빠른 속도로 그리고 아주 정교하게 발전하고 있다. 같은 현장에서 같은 장르를 쓰고 있는 나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이 빠르다. <유령 해마>는 한국이 배경이고 한국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전에 SF를 쓸 때는 주인공을 한국 사람으로 하고 배경도 한국이면 어딘가 이상하게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낯설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사람이 주인공이어도 어색하지 않으며 소설뿐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도 이 벽을 넘었다. 

 

이전 SF 영화는 <설국열차>와 <옥자>처럼 배경이 한국이 아니고 인물도 다국적이어야 했다. 지금은 <승리호>나 <고요의 바다>처럼 한국 사람들이 주인공이어도 관객이 낯설게 여기지 않는다. 아주 많은 사람이 한국 SF라는 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에 어색하지 않게 창조하고 소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설과 영화 말고 웹툰이나 게임 역시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세계를 재창조하고 덧칠하고 외연을 넓히고 있다. SF의 전성기라는 말은 세계가 뜨겁게 확장되고 있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설국열차 스틸컷

영화 <설국열차>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너무 긍정적으로만 말하는 것 같긴 하다. 실제로 출판 시장은 늘 어렵기 때문이다. 소설책은 많이 팔리지 않는다. SF가 2차 저작권이 팔리는 일이 많아서 기쁘지만, 좋은 소설이 독자의 반응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한 성취가 아니라는 상황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대박을 쳐야’만 작가에게 좋은 일인 상황이 아쉽다. 하지만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출판 시장은 어렵고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로 확장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까. 웹소설 같은 경우는 소설로 이미 돈을 많이 벌고 있어서 영상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매체에 종속되지 않는 창작 환경이라면 작품도 다르게 나올지 궁금하다. 웹소설에도 SF가 많이 있는데 다른 창작 환경에서 작가들이 더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최근 능력 있는 작가가 한꺼번에 아주 많이 등장하고 많은 작품을 쓰고 있어서, 잊히는 작품이 나올까 봐 걱정이다. 출판사에서도 공모전에서도 놓친 좋은 작품이 있을 것 같고, 출간된 작품 모두가 적극적인 해석을 받지 못하는 오고 있어서 조바심이 난다. 그중에 내 작품도 들어가면 더 슬플 것이다. 작가와 출판사의 홍보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SF 평론이 더 필요한 시점인 듯하다. 작품이 많으니 어느 작품이 어떤지 설명하는 큐레이션이 중요한 시점이다. 각 작품이 지닌 장점을 정교한 언어로 포착할 수 있는 평론가와 리뷰가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평론은 SF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일정 수준 이상 쌓이면 평론도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서 등장하리라고 믿는다. SF 세계 안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작품과 독자의 중간에서 서로를 연결해줄 평론을 기다린다. 

 

나도 SF라는 세계에서 열심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다. 장르의 팬으로서 발전 중인 모습을 보니 즐겁기도 하고, 다른 작가들이 열심히 앞서고 있는 동안 나는 가만히 있는 것 같아 초조하기도 하다. 장르 독자도 기대치가 높으므로, 그에 맞는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다. 이럴 때는 추상적인 대답이긴 하지만 열심히 쓰는 수밖에 없다. SF라는 세계에 좋은 세계를 추가하려면 열심히 더 고민해서 머릿속에서 놀라운 것을 창조해내는 방법밖에 없다.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SF라는 세계에 들어와 내 글을 찾아주길 바란다. 세계가 낯설어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견을 갖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가 가지 않아도 걱정하지 말고, 아무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화를 내지 말고, 세계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즐기길 바란다. SF라는 세계는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리드문




[장르문화 속 인문 찾기] SF라는 세계에서 독자를 기다리며

- 지난 글: [장르문화 속 인문 찾기] 가장 직관적 판타지의 발현, 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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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환 작가 사진
김이환

작가
판타지, SF, 동화, 추리, 미스터리, 문단 문학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거나 재조합해서 소설을 쓴다. 《절망의 구》 《초인은 지금》, 《엉망진창 우주선을 타고》 등을 지었고, 《취미는 악플, 특기는 막말》 《어쩌다 초능력》 《2035 SF 미스터리》 《팬데믹》 등 공동단편집을 출간했다. 2009년 멀티문학상, 2011년 젊은작가상 우수상, 2017년 SF 어워드 장편소설 우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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