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시기 이데올로기, 사회 정의와 구분되는 정동, 감정, 감수성, 분노 등 새로운 결을 기반으로 사회관계가 재구성되고
특히 디지털화된 의사소통 수단을 통해 상이한 집단적 정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2010년대 미투운동, 2014년 세월호 참사, 2010년대 성소수자에 대한 찬반논쟁‧운동 등에서
과거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와 다른 방식의 조직화, 집단적 감정이 형성되는 것을 들 수 있다.
‘과거 = Past’인가?
혹자는 흔히 ‘과거=과거의 리얼리티인가?’라고 질문하곤 한다. 하지만 과거는 지나간 사건이 아닌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특정한 경험‧사건‧이야기를 뜻한다. 과거를 이야기‧논쟁하는 행위 자체로, 과거는 우리가 ‘과거에 부여하는 현재의 의미를 둘러싼 문제’를 의미한다. 과거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 경험, 사건 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아울러, 과거는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시해온 과거가 지닌 의미를 공론장에 올려놓아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 이행기 정의와 같은 뜻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 학살, 고문 등 과거사는 피해자‧가해자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만큼 각 입장에서 잊으려 하는 자, 기억하려는 자의 배경, 맥락 등이 상이하고 복잡하다. 이 때문에 과거는 단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패러다임으로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우리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동아시아 연구자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연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사용한 ‘연루’는 비록 내가 사는 시대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의 기억, 과거에 의미가 부여되는 방식, 그리고 과거의 삶과 기억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려고 쓴 용어다. 예를 들어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인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두고 ‘내가 가해자가 아닌데?’라고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을 통해 한국은 냉전 자본주의 체제로 깊숙하게 편입되었고, 이후 민주화나 경제성장, 경제적 안정은 모두 그 전쟁과 무관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트남전쟁과 민간인 학살이란 국가폭력은 현재 나의 삶과 무연한 것이 아니다.
과거사 정리의 긴 역사: 전두환‧노태우 구속투쟁에서 진실‧화해위원회까지
그렇다면 오랫동안 잊혀온 과거사는 어떻게 불려왔을까. 한국에서 과거사 정리, 이행기 정의 실현 등은 과거 권위주의 국가권력의 국가폭력‧범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출발에 1980년 광주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리 잡고 있다. 1980년 이래 제법 오랫동안 광주의 진실은 은폐되거나 금기시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 <김군>에서 지만원이 선동하듯이 광주를 이해하는 시절도 있었다. 반면 광주는 일본, 독일 등에서 제작된 비디오, <너머너머> 등 르포타쥬 등을 매개로 ‘금단의 열매’처럼 퍼져 나아갔고, 1980년대 변혁이란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분노의 소재였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언론과 표현의 자유 등 민주화 이행이 진척된 이후 정치적 개방도 뒤따랐다. 생전 처음 텔레비전에서 광주와 제5공화국 청문회가 방영되는가 하면, 광주를 소재로 한 영화, 노래,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광주, 국가폭력, 과거 현대사의 증언을 현재로 불러오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바로 민주화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국가폭력의 책임자, 가해자 처벌 문제가 공론장에서 논의되고 민주화운동에서 전‧노 구속투쟁 등이 이슈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1988년 김대중의 광주 청산 발언, 1990년 3당 합당 등 과정에서 광주 문제 해결 등이 정치권 내에서 협의되면서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 가해자 처벌,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문제는 ‘역사’라는 미래의 숙제로 남겨지는 듯했다.
1988년 집권한 군부 출신인 노태우 집권 이후, 비로소 민간인이 집권을 한 김영삼 정권 시기에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1990년 과거 민정당이란 군부 권위주의 세력과 연합인 동시에 반호남연합이란 지역주의에 기초한 정치세력이던 민주계 집권 엘리트의 한계는 다시 광주와 과거사 정리를 역사가에 맡기고자 했다. 그러던 1995년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가 본격화되었다. 총독부 건물 폭파 등 내셔널리즘에 기초한 역사 바로세우기의 동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지만, 당시 노태우 비자금 문제를 신호탄으로 신군부의 불법적인 쿠데타에 대한 사법처리가 현실화되고 전두환, 노태우 등 1980년 쿠데타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가해자들은 무기징역 등 사법처리를 받게 된다. 15년 만에 가해자들이 법적 심판대 앞에 서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역사와 화해란 이름으로 가해자들에 대한 사면이 이뤄지는 한편, 과거사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배상‧보상을 위한 법률과 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5‧18특별법을 필두로 민주화운동, 국가폭력 등 각종 과거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배상과 보상, 명예회복 등이 현실화되었다. 민주화 이행 이후 10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이후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종 과거사 관련 법, 위원회, 기구, 조사 인력 및 예산, 피해자 단체 조직화, 배보상 신청 등 적지 않은 인적, 제도적 지원이 이뤄지게 된다. 아마도 과거사 정리의 첫 번째 국면이 아니었나 싶다.
2010년대 과거 기억하기: 복수 혹은 혐오?
한편 과거사가 공론장에 등장하고 제도와 법을 통해 가해자였던 국가가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 규명을 하는 과거사 정리의 역설이 진행되던 중, 과거사 정리를 둘러싼 조건이 점차 변화해갔다. 1990년대 중반 지성계를 선도했던 잡지 <당대비평>에서는 가해자인 국가에 의해 과거사 정리가 ‘제도화’되는 위험성에 대한 좌담을 통해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너무 으리으리해진 망월동 신묘역에 대한 위화감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또 각종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를 배‧보상받는 과정에서 피해자 단체들이 조직되고, 다시 가해자 국가가 배‧보상 여부를 결정하고 또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역설적으로 이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조사, 조서 작성, 배‧보상 여부의 결정에 또 다른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갈등
이처럼 과거사 정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수 정부가 등장하기도 하고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우익 집단이 조직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보수정부와 그 주변의 우익 지식인 그룹보다, 피해자 배상과 보상의 진전 과정에서 주목할 두 가지 현상이 있었다.
하나는 ‘복수’라는 감정의 등장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이 만화가 강풀의 작품 <26년>(2006)이었다. 사면복권된 전두환을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찾아내서 살해하는 복수극이 주된 플롯이었다. ‘게으른 애도’라는 사적 복수에 관한 비판에 대한 동의 여부와 별개로 왜 ‘복수’라는 멘털리티가 이 시기에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과거사 정리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현상은 널리 알려진 '일간베스트'의 5‧18 폄훼 발언이다. 2013년을 전후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혐오표현’은 국가폭력 피해자만이 아닌, 소수자 전반에 걸친 것이다. 또 일베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 대한 분노, 적개심, 정부 재원의 공정하지 못한 사용에 대한 분노 등 다양한 형태의 감정적 반응으로 드러나고 있다. 찬반 진영의 진영간 대립이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이런 대중들의 혐오 표현을 과연 잘못된 교육, 온라인에서 역사적 왜곡 양산 때문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
앞서 과거를 불러내는 일이 과거에 대한 리얼리티에 그치는 것이 아닌, 과거에 일어났을 법한 개연성 있는 사건, 경험 등에 대한 현재화된 경험, 이야기, 의미 부여라고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1970~80년대 국가폭력과 연관된 사건, 경험 등이 1990년대나 2000년대의 감성구조와 비슷하게 2010년대에 느껴지고 공감된다고 전제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노동시장의 불안, 취업, 결혼 그리고 가족 형성의 어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정, 이 과정에서 심각한 불평등과 경쟁의 제도화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런 상황에 대한 몰입 등의 조건은 국가폭력‧과거사 정리 등에 대해 1990년대나 각종 위원회가 만들어지던 시기와 매우 다른 태도, 감정구조를 지니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견할 수 있게 한다. 1980~90년대 근과거이자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국가폭력 피해자를 발견할 수 있던 시기와, 피해자라고 불리는 586세대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적 자원을 오랫동안 독점한 결과로 일상적인 삶의 불안정을 인내해야 하는 개인‧집단이 과거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황이 이런데, 제대로 된 현대사 교육을 통한 공론장에서 합리적 토론을 해야 한다는 태도가 2010년대 이후 청년기를 경험해온 집단에게는 ‘꼰대스러운’(혹은 ‘라떼스런’) 반응으로 여겨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네들의 혐오 표현이나 과거사에 대한 다른 감정의 코드(혹은 정동; 情動; affect)를 비합리적인 사고라고 폄하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까, 나는 그렇다고 보긴 어렵다고 본다. 이전 시기 이데올로기, 사회 정의와 구분되는 정동, 감정, 감수성, 분노 등 새로운 결을 기반으로 사회관계가 재구성되고 특히 디지털화된 의사소통 수단을 통해 상이한 집단적 정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2010년대 미투운동, 2014년 세월호 참사, 2010년대 성소수자에 대한 찬반논쟁‧운동 등에서 과거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와 다른 방식의 조직화, 집단적 감정이 형성되는 것을 들 수 있다.
1980년 이후 30여 년간 5‧18이란 국가폭력과 이에 대항한 조직화된 대중‧피해자들의 담론‧이데올로기적 투쟁이 한 시대의 대항 이데올로기였다면, 2010년대 이후 그 양상은 변화했다. 일각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특정 세대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되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여전히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는 강하며, 휠씬 쉽게 정보를 얻고 공감하기도 한다. 반면 젠더, 난민, 이주 등에 대해서 분노를 지니고 ‘국민다움’을 강조하기도 하며, 분노의 정동을 곁에 있는 소수자에게 발산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의 가능성은 세월호 참사 이후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와 공분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 정동의 형성이었지만 아직 비확정적다. 그만큼 과거사를 둘러싼 문제는 단순히 과거가 역사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의미를 갖는지에서 중요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민국가의 역사와 ‘애도’
끝으로 과거사 정리에 있어서 집단적 정동과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는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공식적 역사와 긴장이란 문제이다. 정부, 지자체, 피해자 관련 단체, 유가족 단체 등은 국가폭력과 진상규명과 이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 전시를 위한 제도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역시 애도의 중요한 단계임에는 분명하다.
이행기 정의, 과거사 정리를 통한 진상규명, 명예회복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며, 미경험세대에 대한 교육 문제는 중요하다. 다만 국가폭력과 과거사의 피해자가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구분되고, 이 과정에서 복잡한 과정, 참여자 그리고 배제된 존재들이 단순화되는 ‘공식 역사화’ 과정은 경계해야 한다.
가장 비근한 사례가 영화 <1987>이다. 박종철과 이한열을 주인공으로 하는 1987년 6월 민주화의 서사는 과거사의 일부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니며, 이 영화의 서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만이 피해자나 주역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전형화된 생각은 일종의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며, ‘386건국서사’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전쟁과 국가 주도 자본주의화를 이끌었던 아버지 세대와의 집단적‧세대적 단절을 영상이란 가장 대중적 파급력이 높은 매체로 확산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로부터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 이상한 일일까?
과거 <당대비평>의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일찍이 제기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이라는 분명한 도식 속에 감춰진 배제‧망각의 논리를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를 결했을 때, 과거사 정리는 화석화될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겉보기에 국가폭력‧전쟁범죄 등과 무관한 개인‧집단조차 역사적 연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녀‧그들의 공포, 분노를 느끼고 스스로 ‘속죄’ 의식을 사유할 수 있는 작업이 현재 과거사 정리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덕목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사에 대한 지식의 주입에 의해서가 아닌, 과거사를 역사로 바라보는 개인‧집단의 분노의 정동과 접속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왼쪽부터 영화 <1987>, <친절한 금자씨> (출처: 네이버 영화)
박찬욱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와 피해자 가족이 백 선생에 대한 자신들의 분노를 복수라는 형태로 드러낸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폐교에서 복수를 집행하기 전 피해자 가족들은 소곤거린다. 그녀‧그의 가족들이 자살을 했고 직장을 잃었고 화병으로 죽었다고. 이제 20여 년간 진행된 과거사 정리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과거사와 접속할 여유조차 지니지 못한 개인‧집단의 소근거림과 분노의 정동을 이해할 준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포스트 5‧18 혹는 과거사 정리의 새로운 순환을 고대한다면 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로 전공은 근현대구술사이며, 최근에는 동아시아에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 관한 기억에 관해 연구 중이다. 지은 책으로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87년 6월 항쟁』,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옮긴 책으로 『여공문학』(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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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연루 그리고 포스트 5‧18
- 이달의 답변 -
김원
2023-01-20
이전 시기 이데올로기, 사회 정의와 구분되는 정동, 감정, 감수성, 분노 등 새로운 결을 기반으로 사회관계가 재구성되고
특히 디지털화된 의사소통 수단을 통해 상이한 집단적 정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2010년대 미투운동, 2014년 세월호 참사, 2010년대 성소수자에 대한 찬반논쟁‧운동 등에서
과거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와 다른 방식의 조직화, 집단적 감정이 형성되는 것을 들 수 있다.
‘과거 = Past’인가?
혹자는 흔히 ‘과거=과거의 리얼리티인가?’라고 질문하곤 한다. 하지만 과거는 지나간 사건이 아닌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특정한 경험‧사건‧이야기를 뜻한다. 과거를 이야기‧논쟁하는 행위 자체로, 과거는 우리가 ‘과거에 부여하는 현재의 의미를 둘러싼 문제’를 의미한다. 과거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 경험, 사건 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아울러, 과거는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시해온 과거가 지닌 의미를 공론장에 올려놓아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 이행기 정의와 같은 뜻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 학살, 고문 등 과거사는 피해자‧가해자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만큼 각 입장에서 잊으려 하는 자, 기억하려는 자의 배경, 맥락 등이 상이하고 복잡하다. 이 때문에 과거는 단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패러다임으로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우리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동아시아 연구자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연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사용한 ‘연루’는 비록 내가 사는 시대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의 기억, 과거에 의미가 부여되는 방식, 그리고 과거의 삶과 기억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려고 쓴 용어다. 예를 들어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인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두고 ‘내가 가해자가 아닌데?’라고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을 통해 한국은 냉전 자본주의 체제로 깊숙하게 편입되었고, 이후 민주화나 경제성장, 경제적 안정은 모두 그 전쟁과 무관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트남전쟁과 민간인 학살이란 국가폭력은 현재 나의 삶과 무연한 것이 아니다.
과거사 정리의 긴 역사: 전두환‧노태우 구속투쟁에서 진실‧화해위원회까지
그렇다면 오랫동안 잊혀온 과거사는 어떻게 불려왔을까. 한국에서 과거사 정리, 이행기 정의 실현 등은 과거 권위주의 국가권력의 국가폭력‧범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출발에 1980년 광주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리 잡고 있다. 1980년 이래 제법 오랫동안 광주의 진실은 은폐되거나 금기시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 <김군>에서 지만원이 선동하듯이 광주를 이해하는 시절도 있었다. 반면 광주는 일본, 독일 등에서 제작된 비디오, <너머너머> 등 르포타쥬 등을 매개로 ‘금단의 열매’처럼 퍼져 나아갔고, 1980년대 변혁이란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분노의 소재였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언론과 표현의 자유 등 민주화 이행이 진척된 이후 정치적 개방도 뒤따랐다. 생전 처음 텔레비전에서 광주와 제5공화국 청문회가 방영되는가 하면, 광주를 소재로 한 영화, 노래,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광주, 국가폭력, 과거 현대사의 증언을 현재로 불러오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바로 민주화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국가폭력의 책임자, 가해자 처벌 문제가 공론장에서 논의되고 민주화운동에서 전‧노 구속투쟁 등이 이슈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1988년 김대중의 광주 청산 발언, 1990년 3당 합당 등 과정에서 광주 문제 해결 등이 정치권 내에서 협의되면서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 가해자 처벌,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문제는 ‘역사’라는 미래의 숙제로 남겨지는 듯했다.
1988년 집권한 군부 출신인 노태우 집권 이후, 비로소 민간인이 집권을 한 김영삼 정권 시기에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1990년 과거 민정당이란 군부 권위주의 세력과 연합인 동시에 반호남연합이란 지역주의에 기초한 정치세력이던 민주계 집권 엘리트의 한계는 다시 광주와 과거사 정리를 역사가에 맡기고자 했다. 그러던 1995년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가 본격화되었다. 총독부 건물 폭파 등 내셔널리즘에 기초한 역사 바로세우기의 동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지만, 당시 노태우 비자금 문제를 신호탄으로 신군부의 불법적인 쿠데타에 대한 사법처리가 현실화되고 전두환, 노태우 등 1980년 쿠데타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가해자들은 무기징역 등 사법처리를 받게 된다. 15년 만에 가해자들이 법적 심판대 앞에 서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역사와 화해란 이름으로 가해자들에 대한 사면이 이뤄지는 한편, 과거사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배상‧보상을 위한 법률과 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5‧18특별법을 필두로 민주화운동, 국가폭력 등 각종 과거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배상과 보상, 명예회복 등이 현실화되었다. 민주화 이행 이후 10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이후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종 과거사 관련 법, 위원회, 기구, 조사 인력 및 예산, 피해자 단체 조직화, 배보상 신청 등 적지 않은 인적, 제도적 지원이 이뤄지게 된다. 아마도 과거사 정리의 첫 번째 국면이 아니었나 싶다.
2010년대 과거 기억하기: 복수 혹은 혐오?
한편 과거사가 공론장에 등장하고 제도와 법을 통해 가해자였던 국가가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 규명을 하는 과거사 정리의 역설이 진행되던 중, 과거사 정리를 둘러싼 조건이 점차 변화해갔다. 1990년대 중반 지성계를 선도했던 잡지 <당대비평>에서는 가해자인 국가에 의해 과거사 정리가 ‘제도화’되는 위험성에 대한 좌담을 통해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너무 으리으리해진 망월동 신묘역에 대한 위화감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또 각종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를 배‧보상받는 과정에서 피해자 단체들이 조직되고, 다시 가해자 국가가 배‧보상 여부를 결정하고 또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역설적으로 이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조사, 조서 작성, 배‧보상 여부의 결정에 또 다른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갈등
이처럼 과거사 정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수 정부가 등장하기도 하고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우익 집단이 조직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보수정부와 그 주변의 우익 지식인 그룹보다, 피해자 배상과 보상의 진전 과정에서 주목할 두 가지 현상이 있었다.
하나는 ‘복수’라는 감정의 등장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이 만화가 강풀의 작품 <26년>(2006)이었다. 사면복권된 전두환을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찾아내서 살해하는 복수극이 주된 플롯이었다. ‘게으른 애도’라는 사적 복수에 관한 비판에 대한 동의 여부와 별개로 왜 ‘복수’라는 멘털리티가 이 시기에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과거사 정리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현상은 널리 알려진 '일간베스트'의 5‧18 폄훼 발언이다. 2013년을 전후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혐오표현’은 국가폭력 피해자만이 아닌, 소수자 전반에 걸친 것이다. 또 일베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 대한 분노, 적개심, 정부 재원의 공정하지 못한 사용에 대한 분노 등 다양한 형태의 감정적 반응으로 드러나고 있다. 찬반 진영의 진영간 대립이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이런 대중들의 혐오 표현을 과연 잘못된 교육, 온라인에서 역사적 왜곡 양산 때문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
앞서 과거를 불러내는 일이 과거에 대한 리얼리티에 그치는 것이 아닌, 과거에 일어났을 법한 개연성 있는 사건, 경험 등에 대한 현재화된 경험, 이야기, 의미 부여라고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1970~80년대 국가폭력과 연관된 사건, 경험 등이 1990년대나 2000년대의 감성구조와 비슷하게 2010년대에 느껴지고 공감된다고 전제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노동시장의 불안, 취업, 결혼 그리고 가족 형성의 어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정, 이 과정에서 심각한 불평등과 경쟁의 제도화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런 상황에 대한 몰입 등의 조건은 국가폭력‧과거사 정리 등에 대해 1990년대나 각종 위원회가 만들어지던 시기와 매우 다른 태도, 감정구조를 지니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견할 수 있게 한다. 1980~90년대 근과거이자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국가폭력 피해자를 발견할 수 있던 시기와, 피해자라고 불리는 586세대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적 자원을 오랫동안 독점한 결과로 일상적인 삶의 불안정을 인내해야 하는 개인‧집단이 과거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황이 이런데, 제대로 된 현대사 교육을 통한 공론장에서 합리적 토론을 해야 한다는 태도가 2010년대 이후 청년기를 경험해온 집단에게는 ‘꼰대스러운’(혹은 ‘라떼스런’) 반응으로 여겨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네들의 혐오 표현이나 과거사에 대한 다른 감정의 코드(혹은 정동; 情動; affect)를 비합리적인 사고라고 폄하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까, 나는 그렇다고 보긴 어렵다고 본다. 이전 시기 이데올로기, 사회 정의와 구분되는 정동, 감정, 감수성, 분노 등 새로운 결을 기반으로 사회관계가 재구성되고 특히 디지털화된 의사소통 수단을 통해 상이한 집단적 정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2010년대 미투운동, 2014년 세월호 참사, 2010년대 성소수자에 대한 찬반논쟁‧운동 등에서 과거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와 다른 방식의 조직화, 집단적 감정이 형성되는 것을 들 수 있다.
1980년 이후 30여 년간 5‧18이란 국가폭력과 이에 대항한 조직화된 대중‧피해자들의 담론‧이데올로기적 투쟁이 한 시대의 대항 이데올로기였다면, 2010년대 이후 그 양상은 변화했다. 일각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특정 세대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되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여전히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는 강하며, 휠씬 쉽게 정보를 얻고 공감하기도 한다. 반면 젠더, 난민, 이주 등에 대해서 분노를 지니고 ‘국민다움’을 강조하기도 하며, 분노의 정동을 곁에 있는 소수자에게 발산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의 가능성은 세월호 참사 이후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와 공분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 정동의 형성이었지만 아직 비확정적다. 그만큼 과거사를 둘러싼 문제는 단순히 과거가 역사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의미를 갖는지에서 중요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민국가의 역사와 ‘애도’
끝으로 과거사 정리에 있어서 집단적 정동과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는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공식적 역사와 긴장이란 문제이다. 정부, 지자체, 피해자 관련 단체, 유가족 단체 등은 국가폭력과 진상규명과 이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 전시를 위한 제도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역시 애도의 중요한 단계임에는 분명하다.
이행기 정의, 과거사 정리를 통한 진상규명, 명예회복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며, 미경험세대에 대한 교육 문제는 중요하다. 다만 국가폭력과 과거사의 피해자가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구분되고, 이 과정에서 복잡한 과정, 참여자 그리고 배제된 존재들이 단순화되는 ‘공식 역사화’ 과정은 경계해야 한다.
가장 비근한 사례가 영화 <1987>이다. 박종철과 이한열을 주인공으로 하는 1987년 6월 민주화의 서사는 과거사의 일부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니며, 이 영화의 서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만이 피해자나 주역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전형화된 생각은 일종의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며, ‘386건국서사’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전쟁과 국가 주도 자본주의화를 이끌었던 아버지 세대와의 집단적‧세대적 단절을 영상이란 가장 대중적 파급력이 높은 매체로 확산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로부터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 이상한 일일까?
과거 <당대비평>의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일찍이 제기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이라는 분명한 도식 속에 감춰진 배제‧망각의 논리를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를 결했을 때, 과거사 정리는 화석화될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겉보기에 국가폭력‧전쟁범죄 등과 무관한 개인‧집단조차 역사적 연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녀‧그들의 공포, 분노를 느끼고 스스로 ‘속죄’ 의식을 사유할 수 있는 작업이 현재 과거사 정리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덕목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사에 대한 지식의 주입에 의해서가 아닌, 과거사를 역사로 바라보는 개인‧집단의 분노의 정동과 접속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왼쪽부터 영화 <1987>, <친절한 금자씨> (출처: 네이버 영화)
박찬욱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와 피해자 가족이 백 선생에 대한 자신들의 분노를 복수라는 형태로 드러낸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폐교에서 복수를 집행하기 전 피해자 가족들은 소곤거린다. 그녀‧그의 가족들이 자살을 했고 직장을 잃었고 화병으로 죽었다고. 이제 20여 년간 진행된 과거사 정리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과거사와 접속할 여유조차 지니지 못한 개인‧집단의 소근거림과 분노의 정동을 이해할 준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포스트 5‧18 혹는 과거사 정리의 새로운 순환을 고대한다면 말이다.
1월 [이달의 답변] 과거사, 연루 그리고 포스트 5‧18
- 지난 글: 1월 [이달의 질문] 과거사 정리는 왜 필요한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로 전공은 근현대구술사이며, 최근에는 동아시아에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 관한 기억에 관해 연구 중이다. 지은 책으로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87년 6월 항쟁』,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옮긴 책으로 『여공문학』(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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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정리는 왜 필요한가?
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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