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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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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근대화의 상징인 ‘전차’, 하지만 서로 달랐던 존엄의 무게

부산 전차의 흔적을 뒤쫓다 만난 불편한 진실

2020.01.02


부산 서구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앞에 전시되어 있는 미국산 전차.

 ▲부산 서구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앞에 전시되어 있는 미국산 전차. 

길이 14m, 너비 2.8m로 총 24개의 좌석이 있다. 

1952년 ICA(국제 협력국) 원조자금으로 도입한 40대의 전차 중 한 대다. ⓒ강태호


전차에 부착된 산업화시대 부산 경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광고판. / 문구 : 말표신발 태화고무

 전차에 부착된 산업화시대 부산 경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광고판  ⓒ강태호

 

부산에도 전차의 흔적이 있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밀린 나머지 과거 구석구석에 망각된 크고 작은 사건이 존재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이기도 한 전차, 그 이면에도 지금은 잊힌 여러 일제강점기 시절의 아픔이 자리하고 있다.


사고가 잦았다. 지금도 종종 발생하는 문제지만 당시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새로움’이 주는 것은 편리함만이 아니다. 누군가는 불편을 겪었고, 누군가는 분개해야 했다. 일제강점기 사람들은 전차의 등장에 놀라고 환호했지만 이내 ‘돌’을 던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급히 출발하는 전차에 “다쳐”



"1925년 8월 5일 11시경 시내 수정동 전차정류소에서는 전차에서 내리던 한 사람이 떨어져 약 3주간이나 치료할 중상을 당하였다. (중략) 내릴 때에 출발 신호도 하지 않고 급히 출발하는 전차에 떨어져 중상을 당해 인사불성이다."


_ 『시대일보』 1925년 8월 11일 기사


1916년 3월 부산은 전차 시대를 맞이했다. 1909년 이후 궤도 노선과 혼용을 거듭하다 1916년을 기점으로 전차 전용선으로 바뀌었다. 당시 노선을 운영한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는 4만 5천엔이라는 거금을 들였다.

부산우편국을 중심으로 오가는 전차는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차별은 물론이고, ‘미개한’ 인종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멸시와 냉대가 뚜렷이 존재했다. 위 사건의 중상자는 공원 여학원 학생이었다. 어린 학생이 다쳤음에도 본체만체하고 지나간 전차 기관사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 - 1910년 일본 귀족원 의원이었던 마츠다이라 마사나오[松平正直] 등이 부산 지역의 전차 운행, 독점적인 전등 가설 및 가스[와사(瓦斯)] 공급을 위하여 설립하였다.(출처-부산향토문화백과)


안타깝게도 당시 이 같은 사고가 빈번했다. 대부분의 전차 사고는 충돌과 탈선이었다. 그 원인은 전차가 아니라 사람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사고의 피해자는 주로 조선인이었다. 한 번은 전차라는 신문물에 호기심을 갖고 접근한 어떤 노인이 노선 안으로 들어와 전차를 구경하다 크게 다친 사건도 있었다. 느릿하게 운행되는 전차가 멈추지 않았던 것도 이상하다. 하물며 탈선으로 사고를 냈음에도 일본인 기관사의 운행 잘못을 거론하진 않았다. 당시 매년 등장했던 사고의 내용은 대게 이와 비슷하다.


온천장 전차 종점을 상징하는 고바우 상

 온천장 전차 종점을 상징하는 고바우 상. 두루마기에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모자를 쓰고 있다. 

유럽풍 복식을 즐기던 일본 남성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또한 온천장은 노선이 바뀌어도 항상 종점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온천을 중요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입욕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용권과 전차표를 함께 판매했다. ⓒ강태호



1,000여 명의 부산 시민 전차를 “엎어”



1916년 9월 13일 밤, 범일동 근처에서 전차와 시민이 충돌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사자 1명이 숨지고, 3명이 다치는 사고는 부산 시민을 분노케 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닥치는대로 던지며 전차를 공격했다. 이들은 사고를 수습하러 순사를 태우고 온 전차도 엎어버렸다. 이 사건으로 조선인 39명이 검거됐으며, 주모자 4명은 징역 1년 미만의 형을 선고받았다.


반면 일본인 운전사는 벌금 200원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또한 일본 언론은 ‘조선인 특유의 느긋함이 원인’이라며 기관사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에 책임을 돌리는 입장을 취한다. ‘부산 항일 전차 시위’로 알려진 이 사건에는 당시 일본이 조선인을 대하는 제국주의적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화난 민중이 전차를 “굴려”



1918년 여름 영가대 언덕길에서 좌천동으로 내려오던 전차가 한국인 어부를 치어 즉사했으나, 일본인 기관사는 그냥 운전해 달아나 버렸다. 그후 며칠이 지나도 회사측에서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자 울분에 쌓여 있던 한국인들은 어느 날 영가대에 정차 중이던 전차로 몰려가 전차에 로프를 매어 여러 사람이 언덕 아래에서 당겨 굴러 떨어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_ 『부산 전차운행의 발자취를 찾아서』 표응수 저, 81p


‘뺑소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본체만체 지나간 기관사도 비슷한 맥락이다. 통상 당시 전차는 일본인 기관사에 조선인 차장을 고용했다. 그럼에도 그냥 ‘지나친 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죽음의 무게가 같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부산 영도구 남항사거리에 있는 영도 전차 종점 표식

 부산 영도구 남항사거리에 있는 영도 전차 종점 표식. 

1934년 준공한 영도다리로 이듬해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강태호


일본의 제국주의는 우리를 다치게 했다. 도시를 발전시킨다는 명목이었지만 대부분의 희생은 조선인의 몫이었다. 운영 수익금은커녕 사과 한 번 하지 않은 태도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경제가 성장하고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취지의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에 전적으로 찬성할 수 없는 이유는 역사의 세부에 있다. 당시 연이어 발생한 사건사고를 대하는 책임자의 태도와 사고 처리방식, 그로 인해 마음속 깊은 곳에 울분을 담고 살았던 당시 조선인의 감정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역사관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단 전차뿐만이 아니다. 앞으로도 그들이 남긴 명과 암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싶다.




참고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부산 전차’ 

- 도서 『니 이 이바구 들어봤나?』부산진구청 저

- 도서 『부산 전차운행의 발자취를 찾아서』표응수 저

- 부산역사문화전자대전 자료 ‘전차 타먹기와 생활’ 

- 국제신문 기사 ‘일제강점기 전차와 교통사고’ 

부산 전차 일제시대 일제강점기 역사 시대일보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 표응수 뺑소니 영도 민중 제국주의 근대화 식민지근대화론
영남권 강태호
인문쟁이 강태호
2019 [인문쟁이 5기]


강태호는 인문학집필연구소 한주서가 대표 작가이다. 제10회 해양문학상에 입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입상작인 중편소설 <바다 몬스터>는 문장 아래 문장을 숨겨놓았다며 호평을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천 만 영화 속 부산을 걷는다》가 있으며 기획출판, 첨삭, 글쓰기 강의 등으로 ‘글’의 매력을 알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 또한 관광, 인권, 문화제 등 공기관에서 주관하는 SNS 기자단에 참여하며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자 노력 중이다. 망각된 역사를 알리려는 의지가 강해 인문학적으로 어떤 해석을 풀어낼지 앞으로가 기대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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