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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전국 팔도 인문 문화 이야기

어쩌다보니 활동가가 된 그녀들

땅 속에 오래 머문 풀뿌리는 잔털로 땅의 영역을 넓혀간다

2019.12.17


지난 11월, 대구광역시 대명동 소재 소극장 ‘아트벙커’에서 연극 <만나지 못한 친구>를 관람했다. <만나지 못한 친구>는 전태일의 생전 기록을 토대로 평전을 쓰던 조영래가 그의 삶을 알아 가면서 전태일과 만나지 못한 막역한 친구가 된다는 내용이다. 공연 후반 급작스럽게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불현듯 시대의 지배계급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그의 삶이 와락 달려들면서 서러운 감정에 휩싸였던 것인데, 가능했다면 꺼이꺼이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서럽다니! '서럽다'라는 감정에는 원통함과 분함, 슬픔이 뒤섞여 있는데, 그저 슬픈 것도 아니고 원통하고 분하다는 감정이라니. 이 감정에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단박에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오래 그 속에 살았던 이의 감각이다. 내 몸에 잔류하는 노동자의 피는 전태일의 삶과 아버지의 삶을 오버랩해서 볼 수밖에 없다. 이를 오래 기억하는 것은 그러니까 의무다. 그러나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에 나는 과거를 불러들이고, 현재에 저항하는 문화 본령의 힘을 지지한다. 


영화를 매개로 지속적으로 기억을 소환해 소수자의 영역을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영화제가 있다. 바로 대구여성영화제다. 



영화로 여성주의를 이야기하다 - 대구여성영화제



올해로 여덟 번째를 맞는 대구여성영화제는 지난 10월31일부터 11월 3일까지 나흘간 개최되었다. 매년 북구 지역에서만 열었던 영화제를 올해는 북구와 중구 두 곳의 상영관을 무료로 후원받아 10월 31일에는 롯데시네마칠곡에서 11월1일부터 11월3일까지는 롯데시네마만경관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다. 대구의 중심 중구로의 지역 확장은 대구 전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여성영화제로 거듭나기 위한 도약이다. 또 작년보다 하루 더 늘어난 영화제 일정으로 영화제를 찾는 시민들에게 좀 더 다양한 주제의 영화를 선보일 수 있었다. 


여성영화제 첫날, 서로 손을 모으고 화이팅!

▲ 대구여성영화제 첫날, 서로를 보듬는 그녀들의 손 ⓒ대구여성영화제 


대구여성영화제는 찾아가는 영상제작교실(학교), 주민영상제작교실(주민)을 일 년여 동안 진행하며, 이렇게 완성된 작품을 영화제 기간 동안 상영한다. 또 대구여성영화제는 영화제 기간 외에 찾아가는 상영회나 포럼, 젠더 시네마 학교도 매해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영화 상영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등을 통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찾아가는 영상제작교실 한 장면

▲ 찾아가는 영상제작교실 - "카메라가 따라와요!" ⓒ대구여성영화제 

 

프로그램을 점검하는 운영위원들

▲ 대구성영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프로그램을 점검하는 운영위원들 ⓒ대구여성영화제 


대구여성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변영주, 김소영 감독

▲ 영화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김소영, 변영주 감독 ⓒ대구여성영화제


대구여성영화제 박경희 집행위원장은 ‘4‧16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 행사’에 순전히 ‘엄마’의 마음으로 참여했던 적이 있다. 그저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기 위해 조사를 요구하는, 이 ‘간단한 일’이 왜 실행되지 않는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여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돈을 모아 구립도서관에서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하게 되었다. 그 후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영화 같은 대중에게 친숙한 매개체를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다.


작년까지 풀뿌리 여성연대 부설기관이었던 대구여성영화제는 현재 자매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같다. 대구여성영화제는 예산이나 지원 없이 풀뿌리 여성연대 회원들의 자발적인 각성에서 출발한 영화제다. 영화제를 시작한 2012년 당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북구의 작은 여성단체에서 여성영화제를 시작한다는 말을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다소 싸늘했고 많은 염려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영화제를 준비하는 여성연대 회원들은 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차별에 문제를 제기하며 권리를 찾아가는 여정 중에 그들이 말하는 페미니즘, 즉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범위에 두지 않고 모든 사회적 약자를 함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여성주의의 확장된 정체성을 표방하며 해마다 개최되는 대구여성영화제는 한 해 한 해 이력을 쌓는 동안 대구의 특색 있는 영화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구여성영화제 스탭들 / 문구 : 2019.10.31~11.3 제8회 대구여성영화제

▲ 대구여성영화제를 만드는 사람들 ⓒ대구여성영화제  


대구여성영화제는 메시지가 있는 영화제다. 대구여성영화제는 즐기는 영상축제로 비춰지는 것을 지양한다. 영화제를 찾은 이들이 영화를 본 후 불편한 질문을 하나쯤은 가져가길 바란다. 의문을 품은 자리, 그곳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를 두고 계명대 안숙영 교수는 ‘영화를 매개로 사회적 약자의 삶에 시선을 돌림으로써, 하위 주체들의 공적 대립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대구여성영화제를 평가했다. 


대구여성영화제는 관람료를 받지 않는다. 충분한 예산으로 집행하는 영화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이 다소 의아했다. 그러나 대구여성영화제는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기에, 모든 계층이 함께 누릴 수 있는 무료 관람에 상징적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무료상영을 지속할 계획이라고 했다. 



* 대구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영화들

90년대 페미니스트였던 이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우리는 매일매일>

여성인권단체에서 일했던 엄마를 따라다녔던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핑크페미> 

성추행 피해자지만 나서지 못 하는 해미의 갈등을 그린 <해미를 찾아서>

불법 촬영 피해자의 고통을 그린 < k_oo닮음_93년생.avi >

성수대교 붕괴로 죽은 영지 언니를 기억하는 은희 <벌새>

평생 차별에 맞서 싸웠던 미국의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여든이 되어 비로소 학교에 다니는 할머니들 <칠곡가시나들>

여성HIV/AIDS <감염된 여자들>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에서 아이들과 사는 평안 <연락처>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민간인을 학살했던 한국군 <기억의 전쟁> 

청년 사회주의자의 이상과 노년 망명객의 고독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등 



책마실의 그녀들 - 풀뿌리 여성연대 



대구여성영화제를 만드는 풀뿌리 여성연대 회원들의 신념은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고 스터디를 통해 각자의 불편한 마음을 한두 번 말하기 시작했던 책마실 작은 도서관에서 싹텄다. 


책마실은 풀뿌리 여성연대의 부설 도서관이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작은 도서관은 소외된 빈민지역, 즉 가난한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1980년대 초에는 노동운동이나 야학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작은 도서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지만, 가까이 살고 있는 이들이 책을 빌려 읽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라는 점에선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러나 장지은 풀뿌리 여성연대 전 대표는 "작은 도서관은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각각의 역할이 있기 마련이며, 책마실의 경우 책이라는 한정된 범위에만 머무르지 않고 생활정치 등을 실현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책마실 작은 도서관에는 풀뿌리 여성연대 부설기관인 ‘울림’과 ‘품’도 함께 한다. ‘울림’은 여성주의를 알리는 소통기구로 아이들을 대상으로는 성평등 교육을 어른을 대상으로는 고착화된 성차별 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을 진행 중이다. ‘품’은 경상북도 칠곡군 오계산에서 발원하여 대구 팔달동에서 금호강으로 유입되는 팔거천의 생태를 지키기 위해 팔거천 문화제, 하천학교 등을 열고 지역민의 생활과 밀착한 활동들을 이어간다. 학생들의 접근이 많은 지역의 유흥업소에 대한 문제나 문화거리 조성에 따른 지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일들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생활정치를 통해 시민의식을 기를 수 있는 광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책마실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손수정 관장은 작은 도서관이 책을 매개로 지역민과 가깝게 호흡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팔거천에 뿌릴 EM발효액 만들기

▲ 팔거천에 뿌릴 EM발효액을 만드는 아이들 ⓒ풀뿌리여성연대

 

팔거천 생태를 기록하고 있는 '품' 사람들

▲ 팔거천 생태를 관찰하여 기록하는 ‘품’ 멤버들 ⓒ풀뿌리여성연대  


이외에도 책마실 도서관은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와, 책을 읽는 어른들의 모임이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책마실 정규 프로그램 - 그림책 읽기

 ▲ 책마실 정규 프로그램-그림책 읽기 ⓒ풀뿌리 여성연대 


책마실 스터디 '페미인'

▲ 책마실 스터디 - '페미인' ⓒ풀뿌리여성연대 


지난 10월 책마실 도서관이 이전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도서관 지하에 있는 하수구가 역류했다. 그때마다 바닥 장판을 들어내고 신문지로 물을 빨아들여 젖은 물건을 말려야했다. 올해도 여지없이 하수구는 말썽을 일으켰고, 그녀들은 큰 결단을 내려야했다. 도서관을 옮기는 것. 도서관 이전을 위한 지원금을 받기 위해 기획서를 작성하고, 후원 주점을 열고, 회원들과 지역민의 후원금으로 어렵사리 이전 비용을 마련했다. 그런데 월세가 문제. 기존의 임대료보다 세 배나 많은 월세를 충당하기위한 대책을 그녀들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논의 중이다.


2012년 작은도서관진흥법이 통과되었을 때 어렵게 운영되던 전국의 민간 작은 도서관들에게 숨쉴 구멍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이후 작은 도서관들은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또 운영난을 이유로 지속적으로 문을 닫고 있다. 


활동가의 영역도 그렇다. 어쩌다보니, 사람들과 만나 사람을 이야기하고 보다 나은 삶과, 사회를 생각하며 작은 불씨하나 얹어 활동을 이어가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도서관을 비롯한 시민단체에 상주하는 단 한 사람의 임금만 제대로 지원해줘도 단체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어느 날 도서관에 가 손수정 관장을 보니 입술에 포진이 돋아 있었다. 피로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그녀는 웃는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러 책마실에 왔다가 이후 활동가로 살고 있지만, 단체 밖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의 벽을 느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곳에 상주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떤 곳의 내력을 골똘히 바라본다는 것은, 그곳을 헤아려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제 여성은 은유로 읽혀야 할 듯하다. 여성은 소수의 차별받는 자의 고유 명사로 읽혀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만 있던 도서관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모난 돌들이 둥글어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모난 돌들의 대화가 가능한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다. 사회학자 정희진의 말이다. 


○ 공간 정보 

대구 북구 구리로 25-19 2층 


 사진 촬영 

대구여성영화제, 풀뿌리여성연대

장소정보
대구광역시 북구 구리로 25-19 책마실 도서관
활동가 대구광역시 대명동 아트벙커 만나지못한친구 전태일 변영주 여성주의 페미니즘 대구여성영화제 영상제작교실 다이빙벨 하위주체 차별 소외 페미니스트 책마실 팔거천문화제 풀뿌리여성연대 작은도서관
영남권 양현정
인문쟁이 양현정
2019 [인문쟁이 5기]


글로 스스로를 세우고 위로 받았듯 내 글이 누군가를 세우고 위로해 줄 수 있기 바란다 그들의 곁에 서서 바람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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