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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의 시집을 지니고 청파동을 걷다

인문쟁이 김은영

2019-07-02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집

▲ 최승자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 ⓒ김은영

 

 

시인 최승자의 청파동

 

 

청파동은 겨울에 가야 한다.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이야말로 다정했던 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겨울이 아니라면 적어도 봄이 끝나기 전에는 다녀오는 것이 좋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는 봄이라면 청파동 골목을 헤매며 이제는 가버린 너를 그리워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여름, "다정"했던 겨울과 "꽃잎처럼 포개“져 있던 봄이 지나 한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다. 여름날 대낮의 청파동이라니, 어딘가 청파동이 주는 어감과 어울리지 않는다. 청파동을 말할 때 함께 떠오르는 시를 생각하면 그렇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청파동 골목에서 시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를 펼치며 ⓒ김은영

 

최승자 시인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 실린 시인의 말에 의하면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는 1981년 1월부터 6월까지 쓴 시들 중 한 편이다. 1월이었을까, 6월이었을까. 시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 속의 “청파동”이 현실의 그 청파동이 맞는지도 그리 중요한 점은 아니다. 다만 시 속의 “빈 벌판”과 “따뜻한 땅 속”을 청파동에서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을 뿐. 그리하여 한여름의 어느 날,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라는 시를 지닌 채 청파동으로 간다. 

 

 

정오의 청파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소극장 판 국립극단 NATIONAL THEATER COMPANY OF KOREA

▲ 국립극단 입구의 안내판과 극장 외관 ⓒ김은영

 

시작은 숙명여대 입구다. 최승자의 또 다른 시에서 청파동은 “하숙집 아저씨”의 죽음을 알게 되는 곳이고(시 <두 번의 죽음> 中에서), 머리에 꽃 꽂고 신발 벗어던지고 “수유리까지 손가락질하며” 걸어가고 싶은 길의 출발점이다(시 <망제 中>에서). 하지만 시에는 청파동이란 지명만 있을 뿐 지표로 삼을 만한 구체적인 표현은 없다.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는 대낮, 우선 숙명여대 정문에서 마을버스를 타기로 한다. 버스는 언덕길을 올라 효창공원 입구와 만리시장, 배문 중고등학교를 지나 서울역 서부로 간다. 역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자 맞은편에 붉은 박공지붕의 건물이 보인다. 건물은 ‘붉다’는 말로 다 표현이 안 될 만큼 붉다. 이렇게 붉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붉고, 이렇게 온통 붉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붉다. 빨갛다.건물 색을 왜 이토록 붉게 칠했을까. 담쟁이 넝쿨 그늘이 있는 의자에 앉아 붉은 외벽을 바라본다. 


청파동으로 향하며 들고 온 최승자의 시집은 모두 두 권이었다. 한 권은 시인의 첫 시집이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가 실려 있는 『이 시대의 사랑(1981)』이고, 또 다른 한 권은 두 번째 시집인 즐거운 일기(1984)다. 두 권 모두 초판본이며 몹시 아끼는 책이다. 만약 인류에게 재앙이 닥쳐 일 년 내내 꽁꽁 얼어붙은 북극의 날씨가 계속돼 나무도, 석탄도, 석유와 가스도 모조리 바닥나 책들을 찢어 땔감으로 써야 하는 지경에 처한다 해도 최후까지 난롯불 속으로 넣는 것을 망설일 시집. 그러고 보니 최승자 시인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시인 최승자는 어떤 사람인지, 시는 어떠하고, 시집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세심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설명할 능력도 부족하거니와 섣부른 해석이 오히려 시인의 시에 폐가 될지 모르기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시집을 펼쳐 시를 읽어달라는 말밖에. 

 

즐거운 일기 이 시대의 사랑

▲ 공연장 옆 사무공간이 있는 건물과 최승자 시인의 시집 두 권 ⓒ김은영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청파 어린이 공원 청파동 자치회관 구립 청파도서관 머릿돌 준공일 2007.2.16

▲ 국립극단 뒤편에 자리한 청파 어린이공원과 청파 도서관 ⓒ김은영

 

붉은 물감을 쏟아놓은 듯한 국립극단 극장을 지나 뒤편의 주택가로 접어든다. 길을 따라 걷자 ‘청파 어린이 공원’과 ‘청파 도서관’이 나타난다. ‘청파’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들은 어딘가 특별하게 보인다. 더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고, 더 깊숙이 숨겨져 있어야 할 것을 잘못해 들춰낸 것 같기도 하다. 골목 모퉁이 어딘가에서 날선 감각들이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할 것만 같다. 시를 지도로 삼았기 때문일까. 오르막을 오를 때마다 시 속의 구절들이 떠오른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내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찌르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좁은 길을 따라 낮은 지붕의 집들이 이어진다. “여기가 청파동 맞나요?” 조금 가다 묻고, 조금 가다 묻는다. “여긴 청파동, 저 아래는 서계동.” 지나가던 중년의 여인이 대답한다. “어디 가는데요?” 여자가 묻는다. 대답을 망설인다. 특별히 가려는 곳은 없다. 그저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골목과 골목을 걸을 뿐이다. “여기는 바둑판처럼 길이 반듯하지 않은 곳이에요. 구불구불 이어져 있어서 주소가 있어야 찾아요.” 돌아서려던 중년 여인이 한 마디 더 건넨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계단을 오른다. 

 

 

▲ 청파동의 계단과 골목 ⓒ김은영

 

최승자 시인의 “청파동”은 1980년대 초의 청파동이고, 지금 이곳은 2019년의 청파동이다. 둘 사이 거의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십 년 전과 비교해 이곳은 얼마나 변했을까. 땀에 젖은 얼굴로 슈퍼 앞에 앉은 노인들에게 다가가 동네에 대해 묻는다. “여기는 80년대와 별로 달라진 게 없나요?” 노인들 중 한 분이 대답한다. “없지. 일정(일제 강점기) 때 하고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 그런데 옆에 앉은 노인은 다른 대답을 한다. “다 바뀌었지. 집들을 싹 새로 지었는데.” 두 노인의 말이 모두 맞다. 청파동 골목에는 새로 지은 연립주택과 지은 지 반세기가 넘어 보이는 집들이 앞뒤로 붙어 있다. 

 

 

 ▲ 청파동 골목의 집과 슈퍼 앞 의자들 ⓒ김은영

 

두 시간이 넘도록 청파동인지 서계동인지, 아니면 만리동인지 모를 골목을 헤매다 다시 숙대 앞에 다다른다. 오가며 특별한 것은 보지 못했다. 특별한 것이 없어 더 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시인 최승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어쩌면 시를 쓴 시인조차 완전히 알지 못할 “몇 세기 전의 겨울”, 그리고 청파동에 머물렀던 너와 나의 이야기. 청파동에 와 골목을 떠돌면 시에서 묻고 있는 말에 대답할 수 있으리라 조금은 기대했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라고 물을 때, 그 청파동은 무엇일까.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잊었다고 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라고 물을 때 왜 우리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까.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실컷 청파동을 헤매고도 아직 청파동엔 가지 못한 것 같다. 


 

▲ 청파동 골목 풍경 ⓒ김은영

 

 

글, 사진 _ ⓒ김은영 

 

 

장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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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극단
  • 청파어린이공원
  • 청파도서관
인문쟁이 김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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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인문쟁이 5기]


서울에 살며 일하고 글 쓰는 사람. 비와 냉면을 좋아하고 자서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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