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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제주 말로 제주 옛적을 그리다

제주어르신그림책 원화전 <제주 삼춘들>

민소연

2019-07-03

 

 

“나, 살앙 처음 붓 잡아 봠쪄”


 

그림책만큼 직관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있을까? 책장을 펼치면 한가득,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이룬 장면과 그 이야기 속으로 단번에 빠져든다. 그런 이유로 어린이가 주로 보지만 어른을 위한 그림책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림책을 직접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장편소설처럼 막대한 양이 아니고, 인문서처럼 전문적일 필요도 딱히 없기에, 도전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도 같다. 어린 시절 그림일기를 그렸던 기억도 새삼 소환된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는 제주 말로 삼춘,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직접 그림책을 그리고 쓰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설문대어린이도서관이 2016년에 시작한 이 사업은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제주 지역 노인들의 삶과 기억이 깃든 그림책을 펴내고 있다. 올해에는 제주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울에서도 그림책 원화전을 열었다. 지난 6월 16일 서울혁신파크에서 열린 ‘제주어로 진행하는 그림책 콘서트’에서는 그림책의 두 저자가 직접 책을 낭송하고, 제주어 퀴즈를 풀어보는 등 다채로운 시간을 가졌다. 


 

▲ 화기애애한 북콘서트가 끝나고 모두 함께 기념 촬영 ⓒ이중일


“지금 제주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우선 중국인 관광객이 대거 유입되고 있고, 서울 등 뭍에서도 전에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습니다. 최근에는 난민 관련 이슈도 있었고요. 다른 국가, 다른 문화에서 비롯한 새로운 외부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제주 고유의 문화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먼저 언어예요. 제주의 독특한 언어는 이제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제주의 아이들에게 제주어를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직까지 제주어를 사용하는, 나이 지긋한 노인 세대가 그들의 언어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 강영미 설문대어린이도서관 관장(출판사 책여우 대표) ⓒ이중일

 

설문대어린이도서관 강영미 관장은 사라지고 있는 제주어를 어린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고민 끝에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를 기획하고 운영 중이다. 진행할수록 점점 사명감이 생긴다는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맑았다. 그림책을 배우고 있는 제주 어르신은 대부분 학교를 처음 다닌다. 그래서 그림책 학교에는 진짜 학교처럼 교장선생님도 있고 때가 되면 수학여행도 간다. 수학여행으로 그림책 전시관을 방문해 세상에 어떤 그림책이 있는지 배우고 둘러본다. 그림책 작가도 직접 만나보았다고. 


“처음에는 ‘내가 어떵 그림책 그리쿠과? 못하쿠다!’ 하면서 못 그린다고 자신 없어 하셨지만 나중에 책으로 나오고, 그림을 액자에 넣어 전시도 하면 엄청난 성취감을 느끼십니다. 학교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주로 듣고,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을 떼어내 그림책으로 만드는 것을 도울 뿐이죠. 삼춘들은 대부분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 등교하십니다. 그 일을 일 년 내내 하십니다. 멀리 성산포에서 오고가시는 삼춘도 계셨지요. 연습하느라 달력 뒷장을 한가득 오리 그림으로 채우는 열정도 보았습니다. 뭉클하지요. 그림책이 나오는 과정 그 자체가, 어르신들께는 어떤 치유의 시간인 것 같아요. 평생 누구에게도 풀어놓지 못했던 말을 꺼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지요.”


호박동그래기 대죽부루기 대장공주 행복한 지금 몰방동네 다섯 악동 내 나이 열여덟 나는 토림꾼 나의 사 삶 이렇게 좋은 날 구두미 바당 여자 삼대 이야기

▲ 제주 삼춘들이 직접 쓰고 그린 그림책들 ⓒ이중일

 

제주 삼춘들의 그림책은 표지만 보아도 웃음이 나왔다. 알록달록한 색감, 인물의 표정이 생생하다. 알쏭달쏭한 제주어로 된 제목 역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23권의 그림책들은 표지만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열여덟 살에 출가한 해녀 이야기, 몰방동네를 떠들썩하게 한 악동들, 4·3사건의 애달픈 기억 등 제주가 가진 특수한 환경과 역사가 만들어낸 다양한 면모를 고스란히 담고있다. <나는 토림꾼>은 ‘토림꾼’(기장이가 그릇을 만들기 전에 재료 밑 작업을 했던)이라는, 지금껏 알지도 못했고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렇게 제주어르신그림책은 사라지는 우리 옛 문화와 가치를 세상에 전하는 중요한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 <호박 동그래기>를 낭독 중인 김정란 작가 ⓒ이중일

 

그림책 콘서트에서 <대죽부루기>의 양달성 작가, <호박 동그래기>의 김정란 작가가 직접 읽어준 이야기 역시 사랑스럽다. 옥수수를 뜻하는 <대죽부루기>는 양달성 어르신의 어린 시절을 담아냈다. 가난하고 늘 배고팠던 시절, 가족과 함께 키운 옥수수를 유혹에 못 이겨 훔쳐 먹은 에피소드가 소박하게 펼쳐진다. 제목도 귀여운 <호박 동그래기>는 오매불망 아들을 바랐던 딸부잣집에 또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벌어지는, 사랑스럽고도 찡한 사연이다. ‘호박 동그래기’는 어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태어난 여동생의 애칭. 긴 시간에 걸쳐 이어진 어린 딸들의 연대가 이야기 안팎에 따스하게 담겨있다.


호박동그래기 글 그림 김정란 대죽부루기 글 그림 양달성

 

어머니께서 이웃집에서 얻어온 모종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하나씩 뭘 줭 키우라 서쪽 울타리를 따라 첫째 둘째 대는 아버지 셋째와 넷째는 어머니 다섯째는 나 여섯째는 큰 누이 일곱 번째는 셋누이 여덟 번째는 말잿 누이 아홉 번째는 막내 누이 몫으로 정해 주셨다


 아기의 걸음마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우리 자매들에게 호미와 망치 빨래 방망이를 주시면서 마당에 있는 풀뿌리와 돌맹이를 모두 뽑고 다지라고 말씀하셨다. 아부지 무사 이ㅊ록 햄수과? 아기가 걸령 넘어지지 안 허느냐? 그럼 아기가 아프커냐 안 아프커냐? 우리는 돌부리와 돌맹이를 캐고 난 다음 그 자리를 망치와 빨래 방망이로 두들겨 마당을 평지로 만들었다. 호박동글래기도 그 작은 발로 토닥토닥 마당을 다졌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양자를 들이라고 말씀 하실 때마다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이시곤 했었다. 나는 이틀이 필요 없다. 나는 너희들만 건강하게 자라주면 돼! 그런 아버지셨는데.. 마당 정리를 하라며 야단하시는 아버지는 다른 분 같아 보였다. *이ㅊ록: 이렇게 *호박둥글래기:동글동글한 작은호박

▲ <호박 동그래기>와 <대죽부르기> 표지 및 내지 일부 ⓒ책여우

 

두 작가는 부부다. 부부가 함께 그림책을 낸 것은 제주 어르신 그림책 학교에서도 그리 흔치는 않은 일. 제주어로 거침없이 책을 읽어주는 그들에게 건강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호박동그래기 대죽부루기

▲ 양달성, 김정란 부부 작가와 강영미 관장 ⓒ이중일


“처음에는 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옛 이야기를 책으로 만든다는 게 좋았고 의미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1년 동안 계속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니까 뭔가 보이더군요.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생전 처음 작가 소리도 듣고요. 그런데 작가님이란 소리는 역시 부끄럽습니다. 우리 책은 나왔으니 이제 됐고, 다음 기수에 하는 노인분들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제각기 다른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있고, 그걸 사라지지 않게 남기는 게 얼마나 큰 보람인지 모릅니다.” 


양달성 어르신은 다음 책은 언제 나올까라는 질문에, 책을 만들려면 돈도 많이 들고 여러 도움을 받아야 하니 다른 삼춘에게 양보하겠다고 답했다. 대신 책을 만드는 것을 꼭 도와주고 싶다고.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빛나는 청춘과도 같았다. 제주 삼춘들의 그 아름다운 그림책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기회가 된다면 나 역시 제주어를 배우고 또 익혀보고도 싶었다.


사진 ⓒ이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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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공간, 그리고 그들에 깃든 이야기를 보고 들어 글을 쓴다. 언젠가 충분히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 이미지_ⓒ오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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