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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전국 팔도 인문 문화 이야기

[제주] 졸업을 앞둔 늙은 목동, 말테우리에게 배운다

2019.02.15


“나 어릴 적엔, 말테우리(말치기)가 할락산(한라산)에 올람시민(올라가면) 알녁(아래쪽)에서 그것이 훤히 눈에 다 보연.

호끌락한(자그마한) 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 큰 재미라났주게.”


언젠가 동네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내가 사는 제주 중산간 마을에선 한라산이 동네 뒷산처럼 작아 보인다. 미세먼지가 많은 요즘 같은 때엔 더욱 부러워지는 할아버지 머릿속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본적도 없는 풍경이지만, 가끔 수십 마리 말을 몰고 말테우리가 산에 오르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푸른 초원 위로 흩어졌다 모여드는 말들의 점을 그리고 있자면, 눈앞의 미세먼지가 마음속에서나마 활짝 걷히는 듯 상쾌한 기분이 든다.

 

축사 앞에 서 있는 양계원, 김순여 부부, Slazenger



삼백 년이 넘도록 이어온 말테우리


제주시 서쪽 중산간 마을 어음리에서 12대 째 말테우리를 해왔다는 양계원씨(71세)를 만났다. 예상은 했으나 그는 더 이상 말을 기르지 않는다. 제주에 몇 남지 않은 말테우리 중 그가 가장 젊다. 연로하신 할아버지들은 취미로 말을 기르거나 지난날의 말테우리를 재현하며 그것을 후대에 전하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에겐 그럴 겨를이 없다. 젊은 시절 말을 몰아 번 돈으로 2만 평이 넘는 고향 땅을 사들인 그는, 밭을 일구고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사시사철 다양한 밭작물을 기르는 소문난 농사꾼이다. 축사에서 말 대신 소 30여 마리를 기르며 가족들과 함께 바쁘지만 즐거운 인생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12대를 했으니 태어나면서부터 말과 함께 자랐지. 제주 농업고등학교 축산과를 졸업했는데, 부모님들 고생하며 사는 것을 보니 농사는 짓지 말아야지 생각도 들었어. 그런데 그럴 겨를도 없이 촌에서 살다보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말테우리가 말 주인이 되고, 그걸 한 마리 씩 팔아서 땅을 사 농사를 지어 보니까 재미가 있더라고.”


불과 4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제주의 사람들은 가축에 의지해 살았었다. 척박한 제주의 땅을 밭으로 일구기 위해 말과 소의 거름이 필요했고, 거센 바람에 씨앗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밭을 밟고, 수확한 곡식을 탈곡하고,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는 역할까지 가축이 맡아하던 시절이다. 그런 다용도의 말을 길러 인간의 생활과 동물의 삶을 연결하는 것이 말테우리 양계원씨의 전직이었다.


“할아버지 때 까지만 해도 말테우리는 상놈 거지 취급을 받았어. 아버지 시절엔 4.3사건이 일어나서 ‘산사람’으로 낙인찍혀 고통 꽤나 받았고. 조상 대대로 천대받는 직업이었거든. 이를테면 부잣집에 사는 머슴 같은 존재 같은 거지. 부자들은 말이 많아도 기를 줄을 모르니까 월급 주고 재워주면서 말을 기르게 했어. 집집마다 말이나 소가 있어서 농사를 지었는데, 집에서 기르는 것이 아니라 산에 풀어놓고 방목을 했거든. 그러니 집에 말이 있어도 말테우리의 기술 없인 사람들이 살 수가 없던 시절이야.”


삼백 년이 넘도록 이어온 말테우리



산과 마을, 사람과 동물 사이를 유랑하던 자유로운 영혼


그의 말에 의하면 말테우리는 그저 말을 모는 것이 아니라, 산악지대와 농경지대를 오가며 자연과 마을을 잇는 역할도 했었다. 이를테면, 오름 하나를 통째로 불사르는 장관으로 유명한 제주의 ‘새별오름 들불축제’도 실은 말테우리를 중심으로 생겨난 문화다. 말의 먹이가 될 새 풀을 자라게 하고 진드기를 죽이기 위해 오름의 건초를 태웠던 것이 들불축제의 기원이었다고 그가 설명했다. 산에 불을 놓는 것이 위험하다 하여 새마을 운동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것은 사실 조상대대로 자연을 이용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지혜다. 또한, 말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제주도를 크게 상중하로 나누어 둘레의 경계마다 사람 키만큼의 높은 돌담을 쌓는 일도 했다. 건축에 필요한 나무와 땔감에 필요한 나무는 높이에 따라 다르게 분포하는데, 필요한 만큼 공동으로 이용하던 한라산의 나무를 관리하고 그것을 실어 나르는 역할도 말테우리의 역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스스로 기후를 예견하고 먹이를 찾아 한라산 언저리를 떠도는 야생의 마소는 사람보다 영리하다고 그는 말한다. 동물의 본능을 인간의 지혜로써 활용해 온 말테우리는 항시 말과 상생의 관계에 있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자연이 주는 소중한 것들은 항시 모두의 것이란 생각으로, 사람들은 지속가능하게 그 자원을 공유하고 보전해왔다. 하지만 1970년에 한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마소의 방목이 금지되며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그는 회상한다. 자연 생태계와 마을의 살림, 인간과 동물의 삶 속을 오가며 살던 말테우리의 유랑은, 섬 이곳저곳에 생겨난 또렷한 경계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 땅 남 땅의 구분 없이 자유로이 산을 누비던 시절을 떠올리던 양계원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상놈이라 했지만, 말테우리는 다들 신사야. 말을 몰고 산으로 올라가면 가끔 다른 동네 말테우리를 만나. 그러면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하지. 혹여나 말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함께 찾기도 하고. 들판에 앉아서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끼리만 아는 담소를 나누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 참 멋진 양반들이 많았어.”



땅이 살아있지 않으면 땅에 의존해 살 수 없다


말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그들은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농사꾼으로 성공을 할 수 있던 이유는 말테우리로써의 경험 덕택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땅에 기대어 생명을 일구는 기술을 연마해 온 수백 년의 세월 덕에, 고향 어음리의 땅은 농지로써의 훌륭한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농업여건이 바뀌며 사람들은 농기계를 쓰고 화학비료를 뿌리지만, 아직도 그는 손수 먹여 기른 소의 분뇨를 최고의 거름으로 여긴다. 자신이 기른 양배추 씨알이 두 배로 굵고, 수박도 비트도 꿀을 넣은 듯 달콤한 것은 여전히 그 비결이 가축에게서 오는 것이라 강조하는 그다.


땅이 살아있지 않으면 땅에 의존해 살 수 없다


“대대로 말테우리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땅의 여건을 만들어 놓는 일이야. 여건이 안 되면 농사도 시작을 못해. 땅이 살아있지 않으면 땅에 의존해 살 수가 없거든. 비록 말테우리라는 직업은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지만, 조상들하고 함께 만들어 놓은 그 여건은 앞으로도 쭉 대대손손 이어지는 거야. 가문의 마지막 말테우리로써 결국엔 내가 장원을 먹고 이제 졸업한다고 나는 생각을 해. 졸업 때 까지 부지런히 일하는 거야.(웃음)”


양계원, 김순여 부부, Slazenger, DASHING


광활한 바다 위로 우뚝 솟은 커다란 화산암이 제주도이고, 그 섬의 정상이 한라산이다. 한라산 꼭대기에서부터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바닷가는 하나로 연결된 커다란 운명공동체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골프장과 건물이 들어서며 난개발의 희생양이 된 제주 중산간 지대는, 불과 사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 사람을 먹여 살리던 제주의 심장이었다. 푸름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는 오름과 곶자왈에 조용히 숨겨진 말테우리의 흔적과 오늘도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여 땅을 일구는 양계원씨의 일상 속에서, 앞으로도 쭉 이 땅에 기대어 살아가야 할 우리가 갖추어야 할 힘이 어떤 것인지를 배운다. 사라진 자들이 남기고 간 유산은 그것의 소중한 가치를 아는 자들에게만 대물림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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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신지
정신지
제주할망 전문 인터뷰 작가. ‘할망은 희망’(가르스연구소 2018) 저자.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2년간 지역연구학을 배웠다. 2012년 귀향하여 제주 노인들을 만나고 만남의 기록을 나누며 시간여행 중이다. 노인은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시대에 ‘할망의 희망’을 전파하고자 하는 자칭 ‘제주할망 광신론자’. facebook.com/mayasinjijung (정신지의 제주 아카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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