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광주엔지오센터 행사에 참석하여 멋진 고지도 ‘굿즈’를 기념품으로 받았다. 화려하게 채색된 지도는 1872년에 제작된 <전라좌도 광주지도>였다. 광주읍성과 주요 관공서, 거리, 산세, 물길, 도로가 그려졌기 때문에 조선시대 광주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지도 왼쪽 하단에 옆으로 퍼진 ‘8’자 모양을 한 지형이 눈길을 끈다. 보름달처럼 풍성한 호수인 ‘금교방축(金橋防築)’과 ‘대야(大野)’ 들판을 적시며 흐르는 하류가 있고, 물길이 감싸 안은 평야에 ‘고려왕자태봉(高麗王子胎封)’이라는 산이 그려졌다. 고리처럼 연결된 호수와 산은 반세기 전까지 광주 시내에 실재했던 경양방죽과 태봉산이다.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운명을 함께 했던 두 곳의 사연은 깊고도 오래 됐다.
▲1872년 제작된 <전라좌도 광주지도>, 경양방죽과 태봉산이 그려졌다. ⓒ김지원
개미의 보은으로 만들어진 경양방죽
경양방죽은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과 중흥동 일대에 있었다는 인공호수다. 조선 세종 때 중농정책의 일환으로 축조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축구장 30개가 들어갈 정도로 컸던 호수에는 여러 버전의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견훤의 어머니 남원부인 설화, 김부자와 박경양 설화, 이 씨 개미보은 설화, 김방 개미보은 설화 등이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김방 축조설이다.
▲1940년대 경양방죽, 여름에는 물놀이를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즐겼다. ⓒ광주광역시청
경양방죽 축조를 맡은 김방이 땅을 파다가 개미굴을 발견했는데 개미들을 근처의 무등산 자락으로 옮겨주었다. 그러자 개미들이 은혜를 갚고자 쌀을 가져다주었고 김방은 이 쌀을 방죽 축조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수심이 약 10m에 이르고 면적이 6만여 평이나 되는 호수는 사람의 힘만으로 축조했다고 믿기 어려운 규모였고, 그에 따르는 인건비와 식량을 지급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텐데 그 비용을 어떻게 충당했을까를 생각하다가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몇 세기를 거치며 전승자가 나름의 수식을 덧붙이고 변주했을 것이다.
▲경양방죽이 있던 계림동 일대, 대형슈퍼가 들어섰고 아파트가 세워지고 있다. ⓒ김지원
‘봄물’이 아득하던 호수는 사라지고
한때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경양방죽은 1930년대 후반 택지조성을 위해 1차 매립되었고, 1968년 2차 매립으로 지도에서 사라졌다. 푸른 물이 찰방거리던 곳은 건물이 들어서고 계림동 골목에는 그곳을 기억하기 위한 조형물과 벽화만이 남았다. 정약용이 16세 되던 해, 그의 부친이 화순현감으로 부임할 때 이곳을 지나며 지은 것으로 보이는 <경양의 못가를 지나며(過景陽池)>를 발견했다. 이 시를 통해 조선시대 경양방죽의 자연경관과 관개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잡목은 큰길가에 늘어섰는데
역루의 가까운 곳 저수지 하나
얼굴 비친 봄물은 아득히 멀고
저문 구름 두둥실 한가롭기만
대밭 빽빽해 말 몰기 여의치 않고
연꽃 피어 뱃놀이가 제격이로세
위대하구나, 저수지 관개의 공력
일천 이랑 논들에 물이 넘치네
_ 정약용, <경양의 못가를 지나며>
▲경양방죽 둘레길에 그려진 시화 ⓒ김지원
일대를 걸었지만 안내 표지 없이는 호수가 있었다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위성지도를 보면 부근의 이면도로와 주택가 골목이 반달 형태를 띠고 있어 1차 매립과 2차 매립이 되던 사이의 방죽의 형태를 유추해볼 수 있다. 반달의 절단면 호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고층의 아파트들이 회색빛 몸을 키우고 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기도 하지만 푸른 연못은 회색의 땅이 되기도 한다.
▲경양방죽 둑방길 안내도, 2차 매립 전 반달모양의 제방이 도로와 골목으로 뚜렷이 남았다. ⓒ김지원
‘고려왕자태봉’의 주인은 누구?
태봉산(胎封山)은 왕실의 태(胎)1를 봉하는 산을 일컫는다. 그러니 잘 관리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광주역 근처, 신안동에 있는 태봉산의 경우 그곳에 누구의 태가 묻혔는지 잊히고 태봉이라는 이름만 구전되었다. <전라좌도 광주지도>에는 ‘고려왕자태봉’이라고 기록되어 고려 왕자의 태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1928년 우연한 계기로 주인이 밝혀졌다. 그해 여름 가뭄이 심하게 들었고 농민들은 그 이유가 신성한 땅인 태봉산에 누군가 몰래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동네 아낙들이 호미를 들고 태봉산에 올라 암장한 무덤을 파헤지다가 화강암으로 된 태실을 발견했다. 직경 120cm 크기의 태실 안에서 태지석과 금박, 백자태항아리가 나왔다.
1. 태(胎) - 태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 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어졌다. 그것도 신분이 귀한 사람이나 계급이 높은 사람의 가정일수록 죽은 시신과 같은 취급을 받아왔다. 왕실에서는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하게 취급해 전국에서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안태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7년 태봉산, 널따란 평지에 봉긋하게 솟았고 산 아래 집들이 다정하다 ⓒ광주광역시청
지석(誌石)을 통해 밝혀진 태의 주인은 조선 16대 왕인 인조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이었다. 수도권이 아닌 남쪽에 왕자의 태를 묻은 이유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몽진2해 있을 때 왕자가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굳이 광주에 태를 묻은 내력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2. 몽진(蒙塵) -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의 땅
인열왕후 한 씨가 왕자를 낳아 계룡산에 태를 묻었는데 왕자가 시름시름 앓았다. 왕후가 불공을 드리던 중 꿈에 도승이 나와 왕자의 태를 묻은 땅이 사악해서 아기가 아픈 것이니 좋은 터를 골라 다시 묻으면 된다 일러주었다. 사람을 보내 여의주 형상을 한 땅을 찾아 지금의 신안동 산에 태를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용성대군은 만 다섯 살이 되던 해 사망하고 만다. 태가 묻힌 산은 잊히고 심지어 ‘고려왕자태봉’으로 잘못 기록되었다가 20세기 초에야 사실이 밝혀졌다. 출토된 태실은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야외에 전시됐고, 태지석과 백자 태호, 금박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
▲태봉산에서 나온 화강암 태실,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김지원
▲태봉산 태실 안에 있던 백자 태호와 태지,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됐다. ⓒ김지원
1968년, 경양방죽과 태봉산은 지도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경양방죽 매립에 필요한 토사를 얻기 위해 태봉산을 헐었기 때문이다. 경양방죽 안에 태봉산이 잠겨버리고 1Km 거리를 두고 ‘경양방죽터 표지석’과 ‘태봉산 유래비’만이 동그마니 남았다. ‘완전히 매립하였다’는 경양방죽터 표지석 문구가 쓸쓸하다. 수백 년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소중한 유산을 어쩌면 그렇게 한순간에 없애버렸을까. 만약 경양호와 태봉산이 남아있다면 광주는 좀 더 입체적이고 풍성할 것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농업용 저수지인 경양방죽 터다.
1939년 일부를 매립하였고, 1968년 택지 조성을 위해
신안동 태봉산의 흙으로 완전히 매립하였다."
_ 경양방죽터 표지석 내용
▲광주역 인근의 태봉산 유래비, 태봉산이 있었던 도로 건너편을 보고 있다. ⓒ김지원
우리의 아름다운 ‘광주 지도’를 위해
오치동에 사는 김점례 씨(81세)는 열다섯 살부터 광주에 살았는데 경양호와 태봉산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고 했다. 동무들과 ‘하꼬방’이 즐비하고 버드나무가 낭창낭창하게 늘어진 경양방죽 둑길을 거닐었고, 동무들과 태봉산으로 소풍을 갔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때 광주에 거주했던 60대 이상인 사람들은 그곳에 대한 기억 한두 개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살아남았던 경양방죽을 매립한 이유는 방죽으로 유입되는 물의 양이 줄어들어 관개용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그곳에 오물이 쌓이고 악취가 풍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쉽다. 일부에서는 경양방죽과 태봉산을 복원하자고 말하지만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오히려 지금 있는 것들을 보존하고 지켜내는 것이 현실적이다. 최근 몇 년 만 보더라도 광주의 한 국립대학이 오래된 숲을 밀어내고 건물을 세우고 있으며, 광주 시내 녹지와 공원이 없어지는 중이다.
반세기 후 광주의 지도는 지금과는 또 다르게 변할 것이다. 사라진 것들은 아쉽다. 그 대상에 향수를 느끼고 추억을 갖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기억은 간직하고 현재 남은 역사와 자연유산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산과 연못은 또 사라지고, 그곳에 얽힌 추억과 이야기만 유령처럼 지도 위를 헛헛하게 맴돌지도 모른다.
그 산과 호수가 정말 거기 있었을까
경양방죽과 태봉산
인문쟁이 김지원
2019-11-14
작년에 광주엔지오센터 행사에 참석하여 멋진 고지도 ‘굿즈’를 기념품으로 받았다. 화려하게 채색된 지도는 1872년에 제작된 <전라좌도 광주지도>였다. 광주읍성과 주요 관공서, 거리, 산세, 물길, 도로가 그려졌기 때문에 조선시대 광주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지도 왼쪽 하단에 옆으로 퍼진 ‘8’자 모양을 한 지형이 눈길을 끈다. 보름달처럼 풍성한 호수인 ‘금교방축(金橋防築)’과 ‘대야(大野)’ 들판을 적시며 흐르는 하류가 있고, 물길이 감싸 안은 평야에 ‘고려왕자태봉(高麗王子胎封)’이라는 산이 그려졌다. 고리처럼 연결된 호수와 산은 반세기 전까지 광주 시내에 실재했던 경양방죽과 태봉산이다.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운명을 함께 했던 두 곳의 사연은 깊고도 오래 됐다.
▲1872년 제작된 <전라좌도 광주지도>, 경양방죽과 태봉산이 그려졌다. ⓒ김지원
개미의 보은으로 만들어진 경양방죽
경양방죽은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과 중흥동 일대에 있었다는 인공호수다. 조선 세종 때 중농정책의 일환으로 축조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축구장 30개가 들어갈 정도로 컸던 호수에는 여러 버전의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견훤의 어머니 남원부인 설화, 김부자와 박경양 설화, 이 씨 개미보은 설화, 김방 개미보은 설화 등이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김방 축조설이다.
▲1940년대 경양방죽, 여름에는 물놀이를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즐겼다. ⓒ광주광역시청
경양방죽 축조를 맡은 김방이 땅을 파다가 개미굴을 발견했는데 개미들을 근처의 무등산 자락으로 옮겨주었다. 그러자 개미들이 은혜를 갚고자 쌀을 가져다주었고 김방은 이 쌀을 방죽 축조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수심이 약 10m에 이르고 면적이 6만여 평이나 되는 호수는 사람의 힘만으로 축조했다고 믿기 어려운 규모였고, 그에 따르는 인건비와 식량을 지급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텐데 그 비용을 어떻게 충당했을까를 생각하다가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몇 세기를 거치며 전승자가 나름의 수식을 덧붙이고 변주했을 것이다.
▲경양방죽이 있던 계림동 일대, 대형슈퍼가 들어섰고 아파트가 세워지고 있다. ⓒ김지원
‘봄물’이 아득하던 호수는 사라지고
한때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경양방죽은 1930년대 후반 택지조성을 위해 1차 매립되었고, 1968년 2차 매립으로 지도에서 사라졌다. 푸른 물이 찰방거리던 곳은 건물이 들어서고 계림동 골목에는 그곳을 기억하기 위한 조형물과 벽화만이 남았다. 정약용이 16세 되던 해, 그의 부친이 화순현감으로 부임할 때 이곳을 지나며 지은 것으로 보이는 <경양의 못가를 지나며(過景陽池)>를 발견했다. 이 시를 통해 조선시대 경양방죽의 자연경관과 관개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잡목은 큰길가에 늘어섰는데
역루의 가까운 곳 저수지 하나
얼굴 비친 봄물은 아득히 멀고
저문 구름 두둥실 한가롭기만
대밭 빽빽해 말 몰기 여의치 않고
연꽃 피어 뱃놀이가 제격이로세
위대하구나, 저수지 관개의 공력
일천 이랑 논들에 물이 넘치네
_ 정약용, <경양의 못가를 지나며>
▲경양방죽 둘레길에 그려진 시화 ⓒ김지원
일대를 걸었지만 안내 표지 없이는 호수가 있었다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위성지도를 보면 부근의 이면도로와 주택가 골목이 반달 형태를 띠고 있어 1차 매립과 2차 매립이 되던 사이의 방죽의 형태를 유추해볼 수 있다. 반달의 절단면 호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고층의 아파트들이 회색빛 몸을 키우고 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기도 하지만 푸른 연못은 회색의 땅이 되기도 한다.
▲경양방죽 둑방길 안내도, 2차 매립 전 반달모양의 제방이 도로와 골목으로 뚜렷이 남았다. ⓒ김지원
‘고려왕자태봉’의 주인은 누구?
태봉산(胎封山)은 왕실의 태(胎)1를 봉하는 산을 일컫는다. 그러니 잘 관리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광주역 근처, 신안동에 있는 태봉산의 경우 그곳에 누구의 태가 묻혔는지 잊히고 태봉이라는 이름만 구전되었다. <전라좌도 광주지도>에는 ‘고려왕자태봉’이라고 기록되어 고려 왕자의 태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1928년 우연한 계기로 주인이 밝혀졌다. 그해 여름 가뭄이 심하게 들었고 농민들은 그 이유가 신성한 땅인 태봉산에 누군가 몰래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동네 아낙들이 호미를 들고 태봉산에 올라 암장한 무덤을 파헤지다가 화강암으로 된 태실을 발견했다. 직경 120cm 크기의 태실 안에서 태지석과 금박, 백자태항아리가 나왔다.
1. 태(胎) - 태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 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어졌다. 그것도 신분이 귀한 사람이나 계급이 높은 사람의 가정일수록 죽은 시신과 같은 취급을 받아왔다. 왕실에서는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하게 취급해 전국에서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안태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7년 태봉산, 널따란 평지에 봉긋하게 솟았고 산 아래 집들이 다정하다 ⓒ광주광역시청
지석(誌石)을 통해 밝혀진 태의 주인은 조선 16대 왕인 인조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이었다. 수도권이 아닌 남쪽에 왕자의 태를 묻은 이유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몽진2해 있을 때 왕자가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굳이 광주에 태를 묻은 내력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2. 몽진(蒙塵) -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의 땅
인열왕후 한 씨가 왕자를 낳아 계룡산에 태를 묻었는데 왕자가 시름시름 앓았다. 왕후가 불공을 드리던 중 꿈에 도승이 나와 왕자의 태를 묻은 땅이 사악해서 아기가 아픈 것이니 좋은 터를 골라 다시 묻으면 된다 일러주었다. 사람을 보내 여의주 형상을 한 땅을 찾아 지금의 신안동 산에 태를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용성대군은 만 다섯 살이 되던 해 사망하고 만다. 태가 묻힌 산은 잊히고 심지어 ‘고려왕자태봉’으로 잘못 기록되었다가 20세기 초에야 사실이 밝혀졌다. 출토된 태실은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야외에 전시됐고, 태지석과 백자 태호, 금박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
▲태봉산에서 나온 화강암 태실,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김지원
▲태봉산 태실 안에 있던 백자 태호와 태지,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됐다. ⓒ김지원
1968년, 경양방죽과 태봉산은 지도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경양방죽 매립에 필요한 토사를 얻기 위해 태봉산을 헐었기 때문이다. 경양방죽 안에 태봉산이 잠겨버리고 1Km 거리를 두고 ‘경양방죽터 표지석’과 ‘태봉산 유래비’만이 동그마니 남았다. ‘완전히 매립하였다’는 경양방죽터 표지석 문구가 쓸쓸하다. 수백 년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소중한 유산을 어쩌면 그렇게 한순간에 없애버렸을까. 만약 경양호와 태봉산이 남아있다면 광주는 좀 더 입체적이고 풍성할 것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농업용 저수지인 경양방죽 터다.
1939년 일부를 매립하였고, 1968년 택지 조성을 위해
신안동 태봉산의 흙으로 완전히 매립하였다."
_ 경양방죽터 표지석 내용
▲광주역 인근의 태봉산 유래비, 태봉산이 있었던 도로 건너편을 보고 있다. ⓒ김지원
우리의 아름다운 ‘광주 지도’를 위해
오치동에 사는 김점례 씨(81세)는 열다섯 살부터 광주에 살았는데 경양호와 태봉산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고 했다. 동무들과 ‘하꼬방’이 즐비하고 버드나무가 낭창낭창하게 늘어진 경양방죽 둑길을 거닐었고, 동무들과 태봉산으로 소풍을 갔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때 광주에 거주했던 60대 이상인 사람들은 그곳에 대한 기억 한두 개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살아남았던 경양방죽을 매립한 이유는 방죽으로 유입되는 물의 양이 줄어들어 관개용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그곳에 오물이 쌓이고 악취가 풍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쉽다. 일부에서는 경양방죽과 태봉산을 복원하자고 말하지만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오히려 지금 있는 것들을 보존하고 지켜내는 것이 현실적이다. 최근 몇 년 만 보더라도 광주의 한 국립대학이 오래된 숲을 밀어내고 건물을 세우고 있으며, 광주 시내 녹지와 공원이 없어지는 중이다.
반세기 후 광주의 지도는 지금과는 또 다르게 변할 것이다. 사라진 것들은 아쉽다. 그 대상에 향수를 느끼고 추억을 갖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기억은 간직하고 현재 남은 역사와 자연유산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산과 연못은 또 사라지고, 그곳에 얽힌 추억과 이야기만 유령처럼 지도 위를 헛헛하게 맴돌지도 모른다.
○ 공간 정보
국립광주박물관: 광주 북구 하서로 110
○ 관련 링크
국립광주박물관 홈페이지: https://gwangju.museum.go.kr
○ 사진 촬영 및 출처: 김지원, 광주광역시청
○ 참고 자료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경양방죽과 태봉산』, 2018
광주광역시청 홈페이지 내 '광주의 역사'
장소 정보
2019 [인문쟁이 5기]
쓰는 사람이다. 소설의 언어로 세상에 말을 건네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살고 싶은 마음과 길가 돌멩이처럼 살고픈 바람 사이에서 매일을 기꺼이 산다.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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