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은 잊히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람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자로 기록을 하거나 때로는 영상이나 사진으로 순간을 남긴다. 사진관은 현재의 순간을 기록하는 곳이다. ‘순간을 영원히’라는 말처럼. 그런데 현재보다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기억을 정리하는 사진관이 있다. 이미 지나가버렸기에 형체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했을 골목과 누군가의 과거를 담는다.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 886번지. 빛바랜 추억 속 골목길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이곳은 1960년대 초 형성되기 시작한 동네다. 골목의 단독주택 철대문들은 세월을 잔뜩 머금고 있다. 여기에 6개 골목이 만나는 일명 ‘육거리’가 있다. 제법 경사가 있는 곳에 낡고 오래된 듯한 사진관이 보인다. 붉은 벽돌로 건축된 단층 건물 위에 ‘사진관 오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언뜻 볼 때 제법 나이든 사진사가 운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풍경이다.
▲ '사진관 오늘'은 태평동 주민의 사랑방이자 놀이터다. ⓒ이재형
오래된 골목길에 자리한 독특한 사진관
사진관은 3면이 통창이다. 이곳은 누구나 안을 들여다볼 수 있고 원한다면 들어가 볼 수도 있다. 한쪽 유리창에는 ‘어제의 이야기들’, ‘오늘을 담는 사진관’이란 글귀가 적혀 있다. 사진관 앞에 주민과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주 서있는 여성이 있다. 이 사진관의 주인 표하연 사진작가다. 그녀는 동네 주민들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한다. 그녀가 먼저 보지 못했어도 일부러 사진관 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하는 주민들이 많다.
이 사진관은 원래 오래된 문방구였다고 한다. 문방구는 떠나고 빈 가게에 표작가가 들어왔다. 육거리 골목 입구에 있는 이 사진관은 태평동의 사랑방이자 놀이터다. 사진관 간판을 달았지만 들어오는 사람들이 모두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다.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 어르신은 물론이고 꼬마들도 스스럼없이 들어와 그냥 놀다간다.
이런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람은 누굴까? 표하연 작가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성남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태평동을 잘 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녔지만 어째서인지 잘 맞지 않았다. 미련 없이 퇴사했다. 그러다 2015년 태평동으로 이사 왔다. 그때부터 태평동 주민들의 모습과 기억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 '사진관 오늘'의 주인 표하연 작가 ⓒ이재형
‘사진관 오늘’은 수입을 목적으로 연 게 아니다. 그녀가 운영하는 사진관은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동네 골목에 대한 추억과 어르신들의 기억을 저장하는 곳이다. 기록과 영상으로 말이다. 그럼 어떤 사람들의 기억을 저장할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는 말이 있잖아요. 유명한 사람만 역사에 나오란 법은 없죠.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이 오히려 더 소중하고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소중한 인생사를 담고 싶다
스마트폰 앱으로 마술 같은 사진을 찍어내는 세상이다. 사진관에서 백일·돌사진, 가족사진을 찍는 이도 별로 없다. 그래서 요즘은 사진으로는 밥벌이가 쉽지 않다. 표작가는 좋아하는 사진의 길을 선택했지만 경제적인 문제가 항상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딱 10년만 카메라를 잡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새 16년차 작가다.
▲ '사진관 오늘' 벽에 붙은 프로젝트 안내문과 골목잔치 포스터 ⓒ이재형
"'사진관 오늘'은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오늘을 기억하는 프로젝트 공간입니다“
사진관 벽 한 곳에 이런 알림장이 붙어 있다. 올해 6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됐다. 사진관과 골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니 다양하다. 우리 동네 사람들 이야기 수집 및 오늘의 모습 촬영, 내 마음 속 사진첩에서 꺼낸 한 장의 사진, 아이들의 사진놀이 골목소리, 동네 청년들의 일회용 사진 등이다. 또 한쪽에는 골목잔치 안내문도 있다.
▲ '사진관 오늘'에서는 종종 마을사람들이 모여 골목잔치도 연다. ⓒ프로젝트 파니
지난 10월 3일 골목잔치가 열렸다. 아이부터 어른, 어르신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주민들이 사진관을 찾았다. 그리고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표작가는 왁자지껄한 골목의 과거는 물론 주민들의 이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태평동을 좋아해서 그 동네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표하연 씨. 참 ‘욕심 많은’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 1960년대와 지금의 태평동 모습이다. ⓒ이재형
“태평동에서 활동하던 중 우연치 않게 경기문화재단의 ‘경기문화생활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기획안을 냈죠. 그런데 운 좋게 채택돼 ‘사진관 오늘’이 문을 열게 된 겁니다”
‘소확행’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내고 싶어
표작가는 동네에 사진관을 연 이후 많은 어르신에게 ‘장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러던 중 한 두 분씩 세상을 떠났다. 그때 이곳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내가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녹취한 기록은 60개가 넘는다. 이런 일은 돈이 되는 기획이 아니다. 그녀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했다. 그것이 태평동에서 ‘사진관 오늘’을 연 진짜 이유다.
어르신들은 과거 성남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들고 와 이야기보따리를 쏟아내기도 한다. 덕분에 1960년대 초와 지금의 성남을 한 눈에 비교해볼 수도 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우리네 부모님들 이야기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인생사를 표작가에게 스스럼없이 쏟아낸 것이다.
▲ 표하연 작가는 어르신들의 장수사진을 무료로 찍어준다. ⓒ프로젝트 파니
이 녹취 기록을 어디에 쓸까? 그녀는 수집한 녹취 기록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펴낼 예정이라고 한다. 평범하지만 한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시민들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요즘 ‘소확행’이라 줄여 말한다)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잘 나가는 ‘셀럽’(celebrity, 유명인사) 이야기에만 온통 관심이 쏠린 세상에서 평범한 동네 어르신 얘기들을 수집하는 그녀가 돈키호테처럼 보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수집한 얘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를 들어봤다.
“이곳에 자주 오시는 할머니가 계세요. 옛날에 이 동네는 방직공장, 인형공장이 많았대요. 서른 살부터 50년 넘게 태평동에서 사셨죠. 할머니는 방직공장을 다니면서 돈을 많이 버셨는데요, 지금은 자식들을 다 출가시킨 후 동네 마실 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 분의 인생사는 곧 성남 태평동의 역사잖아요. 이런 얘기들을 누군가 담아두지 않는다면 사라져서 아무도 기억 못하잖아요.”
골목 이야기에 근현대사가 담겨 있어
▲ 태평동 골목에 대한 추억과 어르신 이야기는 책과 영화로 나온다. ⓒ이재형
이런 얘기들은 책으로만 펴내는 게 아니다. 단편영화 ‘오늘을 담는 사진관’(제작 지원 성남미디어센터)으로도 만든다. 11월에 책보다 한발 앞서 단편영화가 나올 예정이다. 이렇게 담은 다큐멘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민초들의 이야기요, 과거의 소중한 기록이 될 것이다.
표작가와 얘기를 나누다보니 태평동 사람들의 얘기는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다. 사진관에 곳곳에 걸린 오래된 사진을 통해 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온 사람들이 쏟아낸 이야기들을 보자. 일제 강점기 일본의 압박에 힘겨워하고 숨죽이며 살던 일, 6.25한국전쟁 중에 한강다리가 폭파되던 순간, 월남으로 파병 가서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던 일, 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날 당시 건설노동자로 가서 돈을 벌던 일 등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다.
▲ 태평동 ‘동네 이야기’는 곧 우리의 근현대사다. ⓒ이재형
“기억에는 세부 묘사가 없다”
- 윤곤강의 시, <추억> 중에서
태평동 노인들이 쏟아낸 이야기는 기억의 편린들이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쏟아낸 삶의 조각들이다. 돌아가시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이야기다. 이런 편린들을 퍼즐 조각 맞추듯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올해 안에 책을 내려던 표작가의 계획이 조금 뒤로 밀렸다. 책이 나온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사진관 오늘’은 기억을 담는 아카이브
마지막으로 표작가에게 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사진관 오늘'에서 하는 일은 동네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저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작가로서 저와 다르지 않은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사진을 찍잖아요. 남을 향한 배려와 이해를 좀 더 깊게 하고 제가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야 더 좋은 사진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표하연다운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 '사진관 오늘'과 표하연 작가 ⓒ이재형
표작가는 태평동으로 이사 온 후 예술가 3명과 함께 ‘프로젝트 파니’(이하 파니)를 결성했다. 파니를 결성한 후 첫 프로젝트로 성남시에 사는 청년들이 각자의 푼그툼(punctum, 사진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나누는 커뮤니티를 통한 도시문화 만들기를 기획했다.
‘파니’는 ‘아무 일 없이 노는 모양새’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지금 표작가가 하는 일은 아무 일 없이 노는 모양새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표하연 작가의 '사진관 오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네 부모님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또 다른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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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오늘이 빛나는 어제로
성남시 태평동 ‘사진관 오늘’
인문쟁이 이재형
2019-11-12
▲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 '사진관 오늘' ⓒ이재형
옛것은 잊히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람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자로 기록을 하거나 때로는 영상이나 사진으로 순간을 남긴다. 사진관은 현재의 순간을 기록하는 곳이다. ‘순간을 영원히’라는 말처럼. 그런데 현재보다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기억을 정리하는 사진관이 있다. 이미 지나가버렸기에 형체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했을 골목과 누군가의 과거를 담는다.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 886번지. 빛바랜 추억 속 골목길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이곳은 1960년대 초 형성되기 시작한 동네다. 골목의 단독주택 철대문들은 세월을 잔뜩 머금고 있다. 여기에 6개 골목이 만나는 일명 ‘육거리’가 있다. 제법 경사가 있는 곳에 낡고 오래된 듯한 사진관이 보인다. 붉은 벽돌로 건축된 단층 건물 위에 ‘사진관 오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언뜻 볼 때 제법 나이든 사진사가 운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풍경이다.
▲ '사진관 오늘'은 태평동 주민의 사랑방이자 놀이터다. ⓒ이재형
오래된 골목길에 자리한 독특한 사진관
사진관은 3면이 통창이다. 이곳은 누구나 안을 들여다볼 수 있고 원한다면 들어가 볼 수도 있다. 한쪽 유리창에는 ‘어제의 이야기들’, ‘오늘을 담는 사진관’이란 글귀가 적혀 있다. 사진관 앞에 주민과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주 서있는 여성이 있다. 이 사진관의 주인 표하연 사진작가다. 그녀는 동네 주민들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한다. 그녀가 먼저 보지 못했어도 일부러 사진관 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하는 주민들이 많다.
이 사진관은 원래 오래된 문방구였다고 한다. 문방구는 떠나고 빈 가게에 표작가가 들어왔다. 육거리 골목 입구에 있는 이 사진관은 태평동의 사랑방이자 놀이터다. 사진관 간판을 달았지만 들어오는 사람들이 모두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다.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 어르신은 물론이고 꼬마들도 스스럼없이 들어와 그냥 놀다간다.
이런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람은 누굴까? 표하연 작가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성남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태평동을 잘 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녔지만 어째서인지 잘 맞지 않았다. 미련 없이 퇴사했다. 그러다 2015년 태평동으로 이사 왔다. 그때부터 태평동 주민들의 모습과 기억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 '사진관 오늘'의 주인 표하연 작가 ⓒ이재형
‘사진관 오늘’은 수입을 목적으로 연 게 아니다. 그녀가 운영하는 사진관은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동네 골목에 대한 추억과 어르신들의 기억을 저장하는 곳이다. 기록과 영상으로 말이다. 그럼 어떤 사람들의 기억을 저장할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는 말이 있잖아요. 유명한 사람만 역사에 나오란 법은 없죠.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이 오히려 더 소중하고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소중한 인생사를 담고 싶다
스마트폰 앱으로 마술 같은 사진을 찍어내는 세상이다. 사진관에서 백일·돌사진, 가족사진을 찍는 이도 별로 없다. 그래서 요즘은 사진으로는 밥벌이가 쉽지 않다. 표작가는 좋아하는 사진의 길을 선택했지만 경제적인 문제가 항상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딱 10년만 카메라를 잡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새 16년차 작가다.
▲ '사진관 오늘' 벽에 붙은 프로젝트 안내문과 골목잔치 포스터 ⓒ이재형
"'사진관 오늘'은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오늘을 기억하는 프로젝트 공간입니다“
사진관 벽 한 곳에 이런 알림장이 붙어 있다. 올해 6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됐다. 사진관과 골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니 다양하다. 우리 동네 사람들 이야기 수집 및 오늘의 모습 촬영, 내 마음 속 사진첩에서 꺼낸 한 장의 사진, 아이들의 사진놀이 골목소리, 동네 청년들의 일회용 사진 등이다. 또 한쪽에는 골목잔치 안내문도 있다.
▲ '사진관 오늘'에서는 종종 마을사람들이 모여 골목잔치도 연다. ⓒ프로젝트 파니
지난 10월 3일 골목잔치가 열렸다. 아이부터 어른, 어르신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주민들이 사진관을 찾았다. 그리고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표작가는 왁자지껄한 골목의 과거는 물론 주민들의 이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태평동을 좋아해서 그 동네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표하연 씨. 참 ‘욕심 많은’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 1960년대와 지금의 태평동 모습이다. ⓒ이재형
“태평동에서 활동하던 중 우연치 않게 경기문화재단의 ‘경기문화생활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기획안을 냈죠. 그런데 운 좋게 채택돼 ‘사진관 오늘’이 문을 열게 된 겁니다”
‘소확행’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내고 싶어
표작가는 동네에 사진관을 연 이후 많은 어르신에게 ‘장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러던 중 한 두 분씩 세상을 떠났다. 그때 이곳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내가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녹취한 기록은 60개가 넘는다. 이런 일은 돈이 되는 기획이 아니다. 그녀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했다. 그것이 태평동에서 ‘사진관 오늘’을 연 진짜 이유다.
어르신들은 과거 성남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들고 와 이야기보따리를 쏟아내기도 한다. 덕분에 1960년대 초와 지금의 성남을 한 눈에 비교해볼 수도 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우리네 부모님들 이야기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인생사를 표작가에게 스스럼없이 쏟아낸 것이다.
▲ 표하연 작가는 어르신들의 장수사진을 무료로 찍어준다. ⓒ프로젝트 파니
이 녹취 기록을 어디에 쓸까? 그녀는 수집한 녹취 기록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펴낼 예정이라고 한다. 평범하지만 한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시민들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요즘 ‘소확행’이라 줄여 말한다)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잘 나가는 ‘셀럽’(celebrity, 유명인사) 이야기에만 온통 관심이 쏠린 세상에서 평범한 동네 어르신 얘기들을 수집하는 그녀가 돈키호테처럼 보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수집한 얘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를 들어봤다.
“이곳에 자주 오시는 할머니가 계세요. 옛날에 이 동네는 방직공장, 인형공장이 많았대요. 서른 살부터 50년 넘게 태평동에서 사셨죠. 할머니는 방직공장을 다니면서 돈을 많이 버셨는데요, 지금은 자식들을 다 출가시킨 후 동네 마실 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 분의 인생사는 곧 성남 태평동의 역사잖아요. 이런 얘기들을 누군가 담아두지 않는다면 사라져서 아무도 기억 못하잖아요.”
골목 이야기에 근현대사가 담겨 있어
▲ 태평동 골목에 대한 추억과 어르신 이야기는 책과 영화로 나온다. ⓒ이재형
이런 얘기들은 책으로만 펴내는 게 아니다. 단편영화 ‘오늘을 담는 사진관’(제작 지원 성남미디어센터)으로도 만든다. 11월에 책보다 한발 앞서 단편영화가 나올 예정이다. 이렇게 담은 다큐멘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민초들의 이야기요, 과거의 소중한 기록이 될 것이다.
표작가와 얘기를 나누다보니 태평동 사람들의 얘기는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다. 사진관에 곳곳에 걸린 오래된 사진을 통해 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온 사람들이 쏟아낸 이야기들을 보자. 일제 강점기 일본의 압박에 힘겨워하고 숨죽이며 살던 일, 6.25한국전쟁 중에 한강다리가 폭파되던 순간, 월남으로 파병 가서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던 일, 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날 당시 건설노동자로 가서 돈을 벌던 일 등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다.
▲ 태평동 ‘동네 이야기’는 곧 우리의 근현대사다. ⓒ이재형
“기억에는 세부 묘사가 없다”
- 윤곤강의 시, <추억> 중에서
태평동 노인들이 쏟아낸 이야기는 기억의 편린들이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쏟아낸 삶의 조각들이다. 돌아가시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이야기다. 이런 편린들을 퍼즐 조각 맞추듯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올해 안에 책을 내려던 표작가의 계획이 조금 뒤로 밀렸다. 책이 나온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사진관 오늘’은 기억을 담는 아카이브
마지막으로 표작가에게 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사진관 오늘'에서 하는 일은 동네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저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작가로서 저와 다르지 않은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사진을 찍잖아요. 남을 향한 배려와 이해를 좀 더 깊게 하고 제가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야 더 좋은 사진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표하연다운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 '사진관 오늘'과 표하연 작가 ⓒ이재형
표작가는 태평동으로 이사 온 후 예술가 3명과 함께 ‘프로젝트 파니’(이하 파니)를 결성했다. 파니를 결성한 후 첫 프로젝트로 성남시에 사는 청년들이 각자의 푼그툼(punctum, 사진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나누는 커뮤니티를 통한 도시문화 만들기를 기획했다.
‘파니’는 ‘아무 일 없이 노는 모양새’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지금 표작가가 하는 일은 아무 일 없이 노는 모양새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표하연 작가의 '사진관 오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네 부모님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또 다른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 공간 정보
주소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2동 886번지
홈페이지 - http://www.projectpani.org
전화번호 - 031-753-7411
○ 사진 촬영_ⓒ이재형
장소 정보
2018, 2019 [인문쟁이 4,5기]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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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 속 신들의 고향
인문쟁이 성기낭
그 산과 호수가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인문쟁이 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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