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프랑스의 한 작은 카페. 열차의 움직임을 담은 50초짜리 영상물이 상영됐다. 스크린 속 달려오는 열차를 보고 깜짝 놀라 몸을 피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진다. 움직이는 사진. 마치 마법과 같은 경험. 영화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올해로 한국 영화는 100주년을 맞았다. 1919년 연쇄극 <의리적 구토>로 시작된 한국 영화의 역사는 시대의 질곡을 관통하며 쇠퇴와 부흥을 거듭해왔다. 한 순간의 신기한 경험이 예술 작품이 되고, 탐구해야할 학문이 되고, 약자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확성기가 되었다. 이제 영화는 문화 전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되돌아보고자, 한국 영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그리고 있는 한국영화박물관을 찾았다.
▲ 한국영화박물관 입구 ⓒ김정은
한국영화박물관은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소재의 한국영상자료원 1층에 위치한다.
▲ 상설 전시장 입구 scenes of korea ⓒ김정은
‘Scenes of Korea’라는 타이틀의 상설 전시는 그 시작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역사를 그대로 응축하고 있었다.
‘신기한 경험’에서 ‘작품’으로 (1900s~1940s)
▲ 1901년, 여행가 버튼 홈즈가 촬영한 서울의 모습 ⓒ김정은
<의리적 구토> 이전에, ‘활동사진’이라는 개념을 조선이 경험한 계기가 있었다. 1901년, 미국의 여행가 버튼 홈즈가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한국인들의 일상 풍경을 담아낸 영상을 통해서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활동사진’이 그들에게 선사했을 문화 충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한국영화 최초의 빅 히트작, 나운규의 '아리랑' 관련 사진들 ⓒ김정은
1926년은 다른 의미로 한국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해였다. 수탈과 억압의 시대인 일제 강점기, 항일 정신을 주제로 한 민족 영화 <아리랑>의 등장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세련된 영화 기법을 사용해 성취한 예술적 완성도와, 개봉 당시 몰려든 관객으로 인해 단성사의 문짝이 부서졌다는 일화를 통해, 당시 대중들의 폭발적 반응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의 고통을 스크린에 잘 녹여내 예술적 성취와 더불어 사회적 영향력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한국영화가 ‘신기한 경험’에서 벗어나 하나의 ‘작품’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혼돈의 시기, 새로운 가치를 논하다 (1950s)
▲ 영화 <자유부인>의 무도회 장면 ⓒ김정은
해방과 전쟁. 민족의 운명을 뒤흔든 질곡의 역사가 끝난 후, 혼돈의 시기가 찾아왔다. ‘전통’과 ‘모던’이 충돌해 혼란스럽던 그때, <자유부인 (1956)>은 새로운 가치와 욕망에 대해 논하며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명망 있는 대학교수의 부인이 소위 ‘춤바람’이 나, 불륜을 저지른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당시 가부장제 사회 속 근대적 여성상에 대한 뜨거운 논쟁거리를 던졌다. 그렇게 영화는 파격으로 새로운 가치를 말하기 시작했다.
부흥과 쇠퇴. 그 속에 피어나는 변화의 목소리 (1960s~1980s)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였다. 영화 제작 편 수, 극장 수, 관람객 수 모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가히 영화의 시대였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스펜스 걸작으로 인정받는 김기영의 <하녀>가 개봉했고, 문희, 남정임, 윤정희로 대표되는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가 열렸다. 청춘영화, 신파극, 문예영화, 액션 스릴러 영화 등 다양한 장르가 관객들에게 사랑받았다. 하지만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화계는 침체의 길을 걸었다. 한국영화 침체의 원인에는 ‘안방극장’으로 불리던 TV의 보급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시행된 엄격한 검열시스템 탓이 컸다.
▲ 영화 <바보들의 행진> 검열 의견서 ⓒ김정은
실제로 차내에서 껌을 파는 장면과 여대생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삭제하라고 제안하는 ‘바보들의 행진’ 검열 의견서는 그 시절 영화 창작자에 대한 검열이 매우 삼엄했음을 보여준다.
▲ 1980년대 대표작 포스터 ⓒ김정은
1980년대, 신군부는 3S 정책을 시행하며 성에 대한 검열을 완화했다. 그에 발맞춰 우후죽순 제작된 ‘에로영화’들은 관객의 호응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영화를 침체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장호는 <바보선언(1983)>을 연출하며 군부독재와 산업화의 이면을 비판했고, 임권택은 <씨받이(1986)>를 통해 해외 영화제에서 좋은 성과를 얻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소재의 제약이 다소간 완화되면서, 훗날 코리안 뉴웨이브라 불린 박광수, 정지영 등의 젊은 감독들의 작품은 한국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눈을 뜨고 지켜보기 힘든 사회의 밑바닥, 개인의 영혼을 파괴하는 전쟁의 참상, 국가에 의해 외곽지대로 밀려나는 경제적 약자들. 이 시기의 영화는 차마 마주하기 힘든 사회의 어두운 영역을 관찰하고 고발하면서, 이에 대한 공동체의 성찰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영화, 거대한 산업이 되다 (1990s~)
▲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의 포스터 ⓒ김정은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초록 물고기(1997)>, <넘버3(1997)> 등의 웰메이드 영화의 흥행과 함께 점차 부활하던 한국 영화는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인 <쉬리(1998)>가 제작되면서 새로운 분기점을 맞았다. 이는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맞물리며, 한국 영화를 거대한 산업으로 탈바꿈시켰을 뿐 아니라 관객들이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즈음부터 소위 ‘1000만 영화’가 속속 등장하며, 한국영화 제2의 전성기는 시작된다.
마셜 맥루언은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에서 영화를 ‘통조림에 담긴 꿈’이라는 말로 비유했다. 기계적인 공정에 크게 의존하며 만들어지는 상품이면서도, 꿈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표방하는 영화의 모순적 특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2019년 한국 사회 속 계급간의 갈등과 충돌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은 CJ가 배급하며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산업이자, 예술이자, 여가이자, 유흥이자, 학문이자, 고발의 수단이기도 한 영화. 영화는 그 모순적 특성을 통해 진실에 한걸음 다가가고, 시대의 변화와 나란히 호흡하며 깊이를 확보한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되물어본다. 영화, 너의 의미는 무엇이니?
아는 것이 꽤 있고 모르는 것은 정말 많은, 가끔 어른스럽고 대개 철이 없는 스물넷. 말이 좀 많고 생각은 더 많다. 이유없이 들뜨고 가슴이 설렐 때, 조급함과 불안감에 가슴이 답답할 때 모두 글을 쓴다. 때때로 물안개같이 느껴지는 삶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글을 쓸 때의 내가 가장 사람답다는 것.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람다워지고싶어 인문쟁이에 지원했다.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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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너의 의미
한국영화박물관
인문쟁이 김정은
2019-10-08
1895년 프랑스의 한 작은 카페. 열차의 움직임을 담은 50초짜리 영상물이 상영됐다. 스크린 속 달려오는 열차를 보고 깜짝 놀라 몸을 피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진다. 움직이는 사진. 마치 마법과 같은 경험. 영화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올해로 한국 영화는 100주년을 맞았다. 1919년 연쇄극 <의리적 구토>로 시작된 한국 영화의 역사는 시대의 질곡을 관통하며 쇠퇴와 부흥을 거듭해왔다. 한 순간의 신기한 경험이 예술 작품이 되고, 탐구해야할 학문이 되고, 약자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확성기가 되었다. 이제 영화는 문화 전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되돌아보고자, 한국 영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그리고 있는 한국영화박물관을 찾았다.
▲ 한국영화박물관 입구 ⓒ김정은
한국영화박물관은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소재의 한국영상자료원 1층에 위치한다.
▲ 상설 전시장 입구 scenes of korea ⓒ김정은
‘Scenes of Korea’라는 타이틀의 상설 전시는 그 시작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역사를 그대로 응축하고 있었다.
‘신기한 경험’에서 ‘작품’으로 (1900s~1940s)
▲ 1901년, 여행가 버튼 홈즈가 촬영한 서울의 모습 ⓒ김정은
<의리적 구토> 이전에, ‘활동사진’이라는 개념을 조선이 경험한 계기가 있었다. 1901년, 미국의 여행가 버튼 홈즈가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한국인들의 일상 풍경을 담아낸 영상을 통해서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활동사진’이 그들에게 선사했을 문화 충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한국영화 최초의 빅 히트작, 나운규의 '아리랑' 관련 사진들 ⓒ김정은
1926년은 다른 의미로 한국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해였다. 수탈과 억압의 시대인 일제 강점기, 항일 정신을 주제로 한 민족 영화 <아리랑>의 등장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세련된 영화 기법을 사용해 성취한 예술적 완성도와, 개봉 당시 몰려든 관객으로 인해 단성사의 문짝이 부서졌다는 일화를 통해, 당시 대중들의 폭발적 반응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의 고통을 스크린에 잘 녹여내 예술적 성취와 더불어 사회적 영향력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한국영화가 ‘신기한 경험’에서 벗어나 하나의 ‘작품’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혼돈의 시기, 새로운 가치를 논하다 (1950s)
▲ 영화 <자유부인>의 무도회 장면 ⓒ김정은
해방과 전쟁. 민족의 운명을 뒤흔든 질곡의 역사가 끝난 후, 혼돈의 시기가 찾아왔다. ‘전통’과 ‘모던’이 충돌해 혼란스럽던 그때, <자유부인 (1956)>은 새로운 가치와 욕망에 대해 논하며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명망 있는 대학교수의 부인이 소위 ‘춤바람’이 나, 불륜을 저지른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당시 가부장제 사회 속 근대적 여성상에 대한 뜨거운 논쟁거리를 던졌다. 그렇게 영화는 파격으로 새로운 가치를 말하기 시작했다.
부흥과 쇠퇴. 그 속에 피어나는 변화의 목소리 (1960s~1980s)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였다. 영화 제작 편 수, 극장 수, 관람객 수 모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가히 영화의 시대였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스펜스 걸작으로 인정받는 김기영의 <하녀>가 개봉했고, 문희, 남정임, 윤정희로 대표되는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가 열렸다. 청춘영화, 신파극, 문예영화, 액션 스릴러 영화 등 다양한 장르가 관객들에게 사랑받았다. 하지만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화계는 침체의 길을 걸었다. 한국영화 침체의 원인에는 ‘안방극장’으로 불리던 TV의 보급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시행된 엄격한 검열시스템 탓이 컸다.
▲ 영화 <바보들의 행진> 검열 의견서 ⓒ김정은
실제로 차내에서 껌을 파는 장면과 여대생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삭제하라고 제안하는 ‘바보들의 행진’ 검열 의견서는 그 시절 영화 창작자에 대한 검열이 매우 삼엄했음을 보여준다.
▲ 1980년대 대표작 포스터 ⓒ김정은
1980년대, 신군부는 3S 정책을 시행하며 성에 대한 검열을 완화했다. 그에 발맞춰 우후죽순 제작된 ‘에로영화’들은 관객의 호응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영화를 침체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장호는 <바보선언(1983)>을 연출하며 군부독재와 산업화의 이면을 비판했고, 임권택은 <씨받이(1986)>를 통해 해외 영화제에서 좋은 성과를 얻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소재의 제약이 다소간 완화되면서, 훗날 코리안 뉴웨이브라 불린 박광수, 정지영 등의 젊은 감독들의 작품은 한국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눈을 뜨고 지켜보기 힘든 사회의 밑바닥, 개인의 영혼을 파괴하는 전쟁의 참상, 국가에 의해 외곽지대로 밀려나는 경제적 약자들. 이 시기의 영화는 차마 마주하기 힘든 사회의 어두운 영역을 관찰하고 고발하면서, 이에 대한 공동체의 성찰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영화, 거대한 산업이 되다 (1990s~)
▲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의 포스터 ⓒ김정은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초록 물고기(1997)>, <넘버3(1997)> 등의 웰메이드 영화의 흥행과 함께 점차 부활하던 한국 영화는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인 <쉬리(1998)>가 제작되면서 새로운 분기점을 맞았다. 이는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맞물리며, 한국 영화를 거대한 산업으로 탈바꿈시켰을 뿐 아니라 관객들이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즈음부터 소위 ‘1000만 영화’가 속속 등장하며, 한국영화 제2의 전성기는 시작된다.
▲ 대표적인 한국 영화들의 장면을 보여주는 공간 ⓒ김정은
영화, 통조림에 담긴 꿈
▲ 영화 <기생충>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마셜 맥루언은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에서 영화를 ‘통조림에 담긴 꿈’이라는 말로 비유했다. 기계적인 공정에 크게 의존하며 만들어지는 상품이면서도, 꿈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표방하는 영화의 모순적 특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2019년 한국 사회 속 계급간의 갈등과 충돌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은 CJ가 배급하며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산업이자, 예술이자, 여가이자, 유흥이자, 학문이자, 고발의 수단이기도 한 영화. 영화는 그 모순적 특성을 통해 진실에 한걸음 다가가고, 시대의 변화와 나란히 호흡하며 깊이를 확보한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되물어본다. 영화, 너의 의미는 무엇이니?
○ 공간 정보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400 한국영상자료원 1층, 한국영화박물관
○ 사진 촬영_김정은
장소 정보
2019 [인문쟁이 5기]
아는 것이 꽤 있고 모르는 것은 정말 많은, 가끔 어른스럽고 대개 철이 없는 스물넷. 말이 좀 많고 생각은 더 많다. 이유없이 들뜨고 가슴이 설렐 때, 조급함과 불안감에 가슴이 답답할 때 모두 글을 쓴다. 때때로 물안개같이 느껴지는 삶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글을 쓸 때의 내가 가장 사람답다는 것.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람다워지고싶어 인문쟁이에 지원했다.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길 소망한다.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영화, 너의 의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사람이 만든 디자인, 사람을 만드는 디자인
인문쟁이 조온윤
대학로에서 레트로 감성을 찾다
인문쟁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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