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흔히 우리는 보이는 것을 지각한다고 믿지만 더 본질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이미 지각하고 있는 것들을 본다. 즉 알지 못하는 것은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콜럼버스의 배가 지평선에 나타났을 때 배를 알지 못한 원주민들이 그것을 보고도 보지 못했던 어느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전시를 관람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충무아트센터 갤러리 입구와 전시장 안의 모습 ⓒ 김은영
충무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암흑물질>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덟 명의 여성 작가들은 펜, 실, 흙, 케이블타이 등의 재료를 이용해 조형물을 만들어 선보였다. 이 전시의 타이틀인 '암흑물질'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지의 물질을 뜻한다. 서둘러 말하면 그 암흑물질이란 전시에 참여한 여성 수공예 작가들과 그들의 수공예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전시 안내 글에 따르면 "여성의 수공 노동"은 "우주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미지의 물질"과 같기 때문이다. 즉 여성의 수공 노동은 "관측할 수 없지만 우주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사회 곳곳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가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전시에서 여성은 '알 수 없음', '가려져 있음', '관측할 수 없음'으로 수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암흑물질의 영문 타이틀을 '언노운 매터UNKNOWN MATTER' 라고 표기한 것도 그와 맞닿아 있는 맥락이다. 알 수 없는 물질, 알려지지 않은 존재, 여성, 그리고 여성의 수공예.
대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조은령 작가의 「일상적인-영웅이려던1」(왼쪽)과 정소윤 작가의 「품Ⅱ」과 「품Ⅲ」(오른쪽) ⓒ 김은영
전시장 안은 여덟 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작은 것과 큰 것, 둥근 것과 각진 것이 공간의 네 모퉁이에 비스듬히 놓여 있어 관람객을 위한 길을 만든다. 작품들의 특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일정한 대상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즉 특정 대상을 묘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은령 작가의 「일상적인-희생물들1」과 「일상적인-희생물들2」는 포도 줄기, 토마토 꼭지처럼 대상이 있는 것을 표현한 작품이다. 정소윤 작가의 「품Ⅱ」과 「품Ⅲ」 또한 제목과 걸맞게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는 듯한 사람의 형상이 표현되어 있다.
▲김유정 작가의 「Multi color lights」와 「Blue color lights」(왼쪽), 송승림 작가의 「Sense of Touch series_Filling space」(오른쪽) ⓒ 김은영
반대로 김유정, 송승림 작가의 작품들은 무엇을 표현했는지 그 대상을 분명하게 말하기 곤란하다. 작품은 어떤 대상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 작품의 재료들이 비정형의 형식으로 겹쳐 있거나 흘러가는 동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조형물들은 현실의 사물들을 모티프로 그린 형상보다 구체적이고 물질적으로 다가온다. 이때의 물질적이란 말의 의미는 그 작품들이 전시장의 실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며 우리의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가까이 가면 특유의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이 무엇을 나타냈는지에 대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할 수야 있겠지만 구태여 현실의 어떤 대상과 닮아 있다거나 작가 내면의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명확하게 지칭해야 할 이유는 크지 않아 보인다.
▲박수지 작가의 「Flow series」(왼쪽), 박은영 작가의 「Lourd1」과 「Lourd2」(오른쪽) ⓒ 김은영
박수지, 박은영 작가의 작품은 어떨까. 이 작품들은 특정 대상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흙을 구워 만든 도자 재료를 이용한 박수지 작가의 「Flow series」는 작품의 최종 형태보다 그것들을 반복해 겹쳐 놓은 재료의 층이 더 눈에 띈다. 반대로 박은영 작가의 「Drawing」 연작은 무언가를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패턴으로 연결되는 실의 이어짐이 마치 바위나 돌 같은 하나의 형상으로 보이게 한다. 이렇게 되면 앞서 <암흑물질>의 작품들을 분류한 기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상이 있는 작품은 오히려 추상적으로 보이고(가령 조은령 작가의 클로즈업 한 포도 가지처럼) 대상이 없는 것들은 더 구체적인 부피와 질량을 가진 조형물로서 눈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서해영 작가의 「8명의 참여자들을 위한 콤부 손잡이」와 그 작업 과정을 닮은 사진 ⓒ 김은영
분명한 것은 대상이 있든 없든 작품들은 작가의 '손'에서 시작하고 끝났다는 점이다. <암흑물질>의 전시 팸플릿에는 작가들의 그러한 과정을 "노동"이라 표현했다. 관람객 입장에서 나는 노동이란 말 대신 '작업'이란 말이 먼저 떠오른다. 혹은 '만지는 손'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무언가를 계속 만지는 손, 만져지는 물질, 그리고 그것들의 시간과 시간의 축적. 그 시간의 축적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불러일으킨다.
보이는 결과물과 보이지 않는 과정
전시를 관람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작업의 결과물, 즉 완성된 작품이다. 반면에 그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박은영 작가의 「Drawing」과 정소윤 작가의 작업 재료들 ⓒ 김은영
전시 <암흑물질>의 특징 중 하나는 완성된 작품을 과정과 함께 배치했다는 점이다. 박은영 작가의 「Lourd」 연작은 천에 실을 꿰어 만든 작품으로 그 작품 옆에는 마치 영화의 아날로그 필름처럼 작가의 드로잉 작업이 함께 전시돼 있다. 정소윤 작가의 「품」과 「안식처」 연작 역시 작업의 재료가 된 실과 실을 엮어 만든 작은 조형물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수없이 실을 엮고 풀었을 작가의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김유정 작가의 「Weave wave 18-1」과 선반에 놓인 작업 재료들 ⓒ 김은영
수백 개의 케이블타이를 연결해 만든 김유정 작가의 「Weave wave 18-1」의 아래에는 케이블타이와 장갑, 펜치들이 놓여 있다. 이렇듯 <암흑물질>의 작품들은 그 재료와 과정들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일반적으로 전시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 구태여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눈앞에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드러냄의 목적은 아마도 보이지 않은 것들을 보이게 한다는 <암흑물질>의 기획 의도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혼자, 혹은 여러 명이 수없이 반복했던 손작업들. 지금 이 전시장을 차지한 눈에 보이는 작품들은 실은 그 수많은 반복을 쌓아 만든 시간의 결과라는 것을 과정의 조각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낸 누군가의 '손'이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문혜주 작가의 「신당동 큰가마 재임하는 날」 ⓒ 김은영
작품 중 유일하게 영상 매체로 상영된 문혜주 작가의 「신당동 큰가마 재임하는 날」은 그 '보여줌'으로 한 발 더 다가간다. 이 영상은 한 도예가의 작업실 모습을 편집 없이 빠른 배속으로 재생한 것으로 한 자리에 앉아 도예 작업을 하는 작가는 한 자리에서 한 방향을 찍고 있는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긴다. 그를 스쳐가거나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이 퍼포먼스의 일부다. 작가는 "아주 지루하고 사소한 일상을 기록"한 영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반복"과 "일상"에 대해 묻는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작업의 시간, 그러니까 흔히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작업의 과정이야말로 완성되어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물질적 뼈대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 세계의 암흑물질, 또 다른 비유로 여성의 수공예 작업. 그것은 분명하게 존재하며 질량이라는 단위로 측정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빛의 세계에서는 저만큼 가려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해 그것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문장의 앞뒤를 바꾸어 '보는 만큼 안다' 라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전시 <암흑물질>은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콜럼버스의 배가 지평선에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던 원주민들의 샤먼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충무아트센터 전시 <암흑물질>
인문쟁이 김은영
2019-09-10
▲전시 <암흑물질>의 포스터 이미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흔히 우리는 보이는 것을 지각한다고 믿지만 더 본질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이미 지각하고 있는 것들을 본다. 즉 알지 못하는 것은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콜럼버스의 배가 지평선에 나타났을 때 배를 알지 못한 원주민들이 그것을 보고도 보지 못했던 어느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전시를 관람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충무아트센터 갤러리 입구와 전시장 안의 모습 ⓒ 김은영
충무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암흑물질>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덟 명의 여성 작가들은 펜, 실, 흙, 케이블타이 등의 재료를 이용해 조형물을 만들어 선보였다. 이 전시의 타이틀인 '암흑물질'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지의 물질을 뜻한다. 서둘러 말하면 그 암흑물질이란 전시에 참여한 여성 수공예 작가들과 그들의 수공예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전시 안내 글에 따르면 "여성의 수공 노동"은 "우주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미지의 물질"과 같기 때문이다. 즉 여성의 수공 노동은 "관측할 수 없지만 우주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사회 곳곳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가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전시에서 여성은 '알 수 없음', '가려져 있음', '관측할 수 없음'으로 수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암흑물질의 영문 타이틀을 '언노운 매터UNKNOWN MATTER' 라고 표기한 것도 그와 맞닿아 있는 맥락이다. 알 수 없는 물질, 알려지지 않은 존재, 여성, 그리고 여성의 수공예.
대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조은령 작가의 「일상적인-영웅이려던1」(왼쪽)과 정소윤 작가의 「품Ⅱ」과 「품Ⅲ」(오른쪽) ⓒ 김은영
전시장 안은 여덟 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작은 것과 큰 것, 둥근 것과 각진 것이 공간의 네 모퉁이에 비스듬히 놓여 있어 관람객을 위한 길을 만든다. 작품들의 특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일정한 대상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즉 특정 대상을 묘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은령 작가의 「일상적인-희생물들1」과 「일상적인-희생물들2」는 포도 줄기, 토마토 꼭지처럼 대상이 있는 것을 표현한 작품이다. 정소윤 작가의 「품Ⅱ」과 「품Ⅲ」 또한 제목과 걸맞게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는 듯한 사람의 형상이 표현되어 있다.
▲김유정 작가의 「Multi color lights」와 「Blue color lights」(왼쪽), 송승림 작가의 「Sense of Touch series_Filling space」(오른쪽) ⓒ 김은영
반대로 김유정, 송승림 작가의 작품들은 무엇을 표현했는지 그 대상을 분명하게 말하기 곤란하다. 작품은 어떤 대상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 작품의 재료들이 비정형의 형식으로 겹쳐 있거나 흘러가는 동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조형물들은 현실의 사물들을 모티프로 그린 형상보다 구체적이고 물질적으로 다가온다. 이때의 물질적이란 말의 의미는 그 작품들이 전시장의 실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며 우리의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가까이 가면 특유의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이 무엇을 나타냈는지에 대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할 수야 있겠지만 구태여 현실의 어떤 대상과 닮아 있다거나 작가 내면의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명확하게 지칭해야 할 이유는 크지 않아 보인다.
▲박수지 작가의 「Flow series」(왼쪽), 박은영 작가의 「Lourd1」과 「Lourd2」(오른쪽) ⓒ 김은영
박수지, 박은영 작가의 작품은 어떨까. 이 작품들은 특정 대상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흙을 구워 만든 도자 재료를 이용한 박수지 작가의 「Flow series」는 작품의 최종 형태보다 그것들을 반복해 겹쳐 놓은 재료의 층이 더 눈에 띈다. 반대로 박은영 작가의 「Drawing」 연작은 무언가를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패턴으로 연결되는 실의 이어짐이 마치 바위나 돌 같은 하나의 형상으로 보이게 한다. 이렇게 되면 앞서 <암흑물질>의 작품들을 분류한 기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상이 있는 작품은 오히려 추상적으로 보이고(가령 조은령 작가의 클로즈업 한 포도 가지처럼) 대상이 없는 것들은 더 구체적인 부피와 질량을 가진 조형물로서 눈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서해영 작가의 「8명의 참여자들을 위한 콤부 손잡이」와 그 작업 과정을 닮은 사진 ⓒ 김은영
분명한 것은 대상이 있든 없든 작품들은 작가의 '손'에서 시작하고 끝났다는 점이다. <암흑물질>의 전시 팸플릿에는 작가들의 그러한 과정을 "노동"이라 표현했다. 관람객 입장에서 나는 노동이란 말 대신 '작업'이란 말이 먼저 떠오른다. 혹은 '만지는 손'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무언가를 계속 만지는 손, 만져지는 물질, 그리고 그것들의 시간과 시간의 축적. 그 시간의 축적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불러일으킨다.
보이는 결과물과 보이지 않는 과정
전시를 관람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작업의 결과물, 즉 완성된 작품이다. 반면에 그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박은영 작가의 「Drawing」과 정소윤 작가의 작업 재료들 ⓒ 김은영
전시 <암흑물질>의 특징 중 하나는 완성된 작품을 과정과 함께 배치했다는 점이다. 박은영 작가의 「Lourd」 연작은 천에 실을 꿰어 만든 작품으로 그 작품 옆에는 마치 영화의 아날로그 필름처럼 작가의 드로잉 작업이 함께 전시돼 있다. 정소윤 작가의 「품」과 「안식처」 연작 역시 작업의 재료가 된 실과 실을 엮어 만든 작은 조형물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수없이 실을 엮고 풀었을 작가의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김유정 작가의 「Weave wave 18-1」과 선반에 놓인 작업 재료들 ⓒ 김은영
수백 개의 케이블타이를 연결해 만든 김유정 작가의 「Weave wave 18-1」의 아래에는 케이블타이와 장갑, 펜치들이 놓여 있다. 이렇듯 <암흑물질>의 작품들은 그 재료와 과정들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일반적으로 전시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 구태여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눈앞에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드러냄의 목적은 아마도 보이지 않은 것들을 보이게 한다는 <암흑물질>의 기획 의도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혼자, 혹은 여러 명이 수없이 반복했던 손작업들. 지금 이 전시장을 차지한 눈에 보이는 작품들은 실은 그 수많은 반복을 쌓아 만든 시간의 결과라는 것을 과정의 조각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낸 누군가의 '손'이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문혜주 작가의 「신당동 큰가마 재임하는 날」 ⓒ 김은영
작품 중 유일하게 영상 매체로 상영된 문혜주 작가의 「신당동 큰가마 재임하는 날」은 그 '보여줌'으로 한 발 더 다가간다. 이 영상은 한 도예가의 작업실 모습을 편집 없이 빠른 배속으로 재생한 것으로 한 자리에 앉아 도예 작업을 하는 작가는 한 자리에서 한 방향을 찍고 있는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긴다. 그를 스쳐가거나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이 퍼포먼스의 일부다. 작가는 "아주 지루하고 사소한 일상을 기록"한 영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반복"과 "일상"에 대해 묻는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작업의 시간, 그러니까 흔히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작업의 과정이야말로 완성되어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물질적 뼈대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 세계의 암흑물질, 또 다른 비유로 여성의 수공예 작업. 그것은 분명하게 존재하며 질량이라는 단위로 측정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빛의 세계에서는 저만큼 가려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해 그것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문장의 앞뒤를 바꾸어 '보는 만큼 안다' 라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전시 <암흑물질>은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콜럼버스의 배가 지평선에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던 원주민들의 샤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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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인문쟁이 5기]
서울에 살며 일하고 글 쓰는 사람. 비와 냉면을 좋아하고 자서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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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알지 못한 틈을 메우는 일
인문쟁이 강태호
청년들은 어디에 사는가
인문쟁이 조온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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