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 펑, 펑! 아이들이 투명한 우산을 쓰고 소나기 속으로 달려들었다. 바로 이거다. 눈동자는 뷰파인더 공간을 정신없이 내달렸고, 손가락은 셔터를 연신 괴롭혔다. 몇 초나 지났을까. 신기루처럼 사라진 풍경 뒤로 문화관광해설사는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정각이 되면 다시 나타날 겁니다.”
▲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전경 ⓒ김세희
이름 모를 소년과 소녀
소설 <소나기> 속 소년은 소녀를 떠올릴 때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주머니 속 물건은 소녀가 던진 조약돌이었다가, 가까운 이웃 동네에서 제일가는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이기도 했다.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은 소년의 시점으로 나열되는 소녀의 흔적들로 채워졌다. 우리의 기억을 몽글몽글 건드리는 장면들이다. 징검다리에서 첫 만남. 가만히 떠올려보니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은 팔과 목덜미가 마냥 희었던 소녀였다. 소설 속 주인공 나이 또래의 요즘 청소년들은 개울가에서 소녀가 했던 세수가 소년을 의식해 했던 행동이라고 농담하기도 한다.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의 송아지 들판 ⓒ김세희
잔망스러운 소녀는 소년에게 산너머로 가보자며 뜻밖의 제안을 한다. ‘도발적인’ 소녀의 제안에 호응이라도 하듯, 소년도 길을 가다가 송아지를 발견하곤 호기롭게 올라탄다. 소녀가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거란 생각에 으쓱해져 내려올 줄 몰랐던 소년. 그것도 잠시, 송아지 주인에게 들켜 혼날까 조마조마한다. 송아지 들판에서 송아지 상을 보고 있자니, 풋풋했던 소설 속 소년소녀의 귀여운 모습이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소년에겐, 싱싱한 꽃 한 옴큼도 따다 안길 줄 알고, 소녀의 다친 무릎 생채기를 빨아낸 후 송진을 문질러주는 자상함도 있었다. 소설에서 의외로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를 피했던 수숫단 오솔길 ⓒ김세희
어린 시절 우리도 ‘함께 맞았던’ 소년과 소녀의 소나기. 덕분에 둘은 더욱 가까워졌다.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던 원두막에서 나와 비좁은 수숫단 움막에서 비를 피했다. 소년이 주었던 꽃묶음도 오그라들었지만,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의지했다. 언제나 그랬듯 소나기도 한 때. 제법 불어버린 도랑을 건너기 위해 소년은 소녀를 업는다. 훗날 다시 재회한 소녀는 소년에게 굳이 분홍 스웨터에 남은 검붉은 진흙물을 보여주며, 너의 등에서 옮은 물이라 말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소녀가 소년에게 업혔던 도랑 ⓒ김세희
이름 하나 모르는 소년과 소녀인데도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지고 생생해졌다. 과거를 담는 시력을 조금씩 회복하는 듯 나의 마음속에 묵혀 있던 이름들도 함께 맴돌았다. 고맙고 애달팠던 사람들. 돌이켜보니 아팠지만 모든 게 이유가 있었던 시간들. 긴 시간이 흘러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마음이 흔들렸던 그 시절에게 더는 빼앗기지 않아도 될 의연함이 어느새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개관 10주년 맞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가세가 기울어 양평으로 이사할 예정이었던 소녀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소녀의 죽음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자기 입은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는 유언과 함께. 황순원문학촌이 양평에 차려진 계기도 소설의 마지막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황순원문학관 곁에는 작가 황순원과 부인 양정길 여사가 함께 잠들어있다. 20세기 격동기, 순수와 절제를 통해 한국문학의 한 극을 이룬 작가 황순원(1915 - 2000)을 기리는 애틋함이 담긴 장소다. 이북에서 태어났기에 고향에 묻히지 못했던 작가 황순원을 위해 그가 재직했던 경희대학교에서 뜻을 모았다. 올해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개관 10주년이다.
▲ 작가 황순원과 부인 양정길 여사의 묘소 ⓒ김세희
황순원문학관은 크게 4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생전 작가의 유품과 영상들로 꾸며진 ‘1. 작가와의 만남’, 비주얼 체험으로 <독 짓는 늙은이>, <별>, <목넘이 마을의 개>, <학>, <카인의 후예> 등 작가의 대표작을 살펴볼 수 있는 ‘2. 작품 속으로’, 초등학교 교실 같은 공간에서 소나기 뒷이야기를 애니매이션으로 볼 수 있는 ‘3. 남폿불 영상실’, 황순원 작가의 작품을 종이나 전자책으로 감상할 수 있는 ‘4. 마타리꽃 사랑방’이다.
▲ 작가의 대표작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황순원문학관 ⓒ김세희
<소나기>의 순수한 사랑 외에도 주목할 만한 황순원의 작품은 많다. 작가는 <목넘이 마을의 개>의 ‘신둥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나타내기도 하고, <학>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남북의 이념대립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는 스토리를 그리기도 했다. 작가 황순원의 부친은 3.1운동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그 역시 일제의 압박 속에서 흔들리지 않은 채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잡문이나 연재소설을 쓰지 않은 작가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신조를 우직하게 지켜나갔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작가와의 만남’에 마련된 황순원의 서재 ⓒ김세희
우리는 여전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완성해 나간 그의 문학 세계를 사랑하고 있다. 올해 황순원 문학제는 소나기마을 인근에서 9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린다. 강연과 백일장, 원작 영화 상영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지난 7월 마감한 ‘나의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 또한 흥미롭다. 한 명의 문인이 이룩한 문학 세계가 후대의 창작 세계에도 큰 영향과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아무리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문학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김세희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여행 콘텐츠 에디터로서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발빠르게 노마드의 삶을 걷고 있다.
낯선 이가 우리의 인문 기억에 놀러오는 일은 생각만 해도 설레고 두근거린다.
더 많은 것을 꿈꾸고 소망하고 함께 응원하는 온기를 뼈 마디마디에 불어넣고 싶다.
어떤 바람도 어떤 파도도 잔잔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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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내릴 때마다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인문쟁이 김세희
2019-08-08
펑, 펑, 펑! 아이들이 투명한 우산을 쓰고 소나기 속으로 달려들었다. 바로 이거다. 눈동자는 뷰파인더 공간을 정신없이 내달렸고, 손가락은 셔터를 연신 괴롭혔다. 몇 초나 지났을까. 신기루처럼 사라진 풍경 뒤로 문화관광해설사는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정각이 되면 다시 나타날 겁니다.”
▲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전경 ⓒ김세희
이름 모를 소년과 소녀
소설 <소나기> 속 소년은 소녀를 떠올릴 때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주머니 속 물건은 소녀가 던진 조약돌이었다가, 가까운 이웃 동네에서 제일가는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이기도 했다.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은 소년의 시점으로 나열되는 소녀의 흔적들로 채워졌다. 우리의 기억을 몽글몽글 건드리는 장면들이다. 징검다리에서 첫 만남. 가만히 떠올려보니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은 팔과 목덜미가 마냥 희었던 소녀였다. 소설 속 주인공 나이 또래의 요즘 청소년들은 개울가에서 소녀가 했던 세수가 소년을 의식해 했던 행동이라고 농담하기도 한다.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의 송아지 들판 ⓒ김세희
잔망스러운 소녀는 소년에게 산너머로 가보자며 뜻밖의 제안을 한다. ‘도발적인’ 소녀의 제안에 호응이라도 하듯, 소년도 길을 가다가 송아지를 발견하곤 호기롭게 올라탄다. 소녀가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거란 생각에 으쓱해져 내려올 줄 몰랐던 소년. 그것도 잠시, 송아지 주인에게 들켜 혼날까 조마조마한다. 송아지 들판에서 송아지 상을 보고 있자니, 풋풋했던 소설 속 소년소녀의 귀여운 모습이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소년에겐, 싱싱한 꽃 한 옴큼도 따다 안길 줄 알고, 소녀의 다친 무릎 생채기를 빨아낸 후 송진을 문질러주는 자상함도 있었다. 소설에서 의외로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를 피했던 수숫단 오솔길 ⓒ김세희
어린 시절 우리도 ‘함께 맞았던’ 소년과 소녀의 소나기. 덕분에 둘은 더욱 가까워졌다.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던 원두막에서 나와 비좁은 수숫단 움막에서 비를 피했다. 소년이 주었던 꽃묶음도 오그라들었지만,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의지했다. 언제나 그랬듯 소나기도 한 때. 제법 불어버린 도랑을 건너기 위해 소년은 소녀를 업는다. 훗날 다시 재회한 소녀는 소년에게 굳이 분홍 스웨터에 남은 검붉은 진흙물을 보여주며, 너의 등에서 옮은 물이라 말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소녀가 소년에게 업혔던 도랑 ⓒ김세희
이름 하나 모르는 소년과 소녀인데도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지고 생생해졌다. 과거를 담는 시력을 조금씩 회복하는 듯 나의 마음속에 묵혀 있던 이름들도 함께 맴돌았다. 고맙고 애달팠던 사람들. 돌이켜보니 아팠지만 모든 게 이유가 있었던 시간들. 긴 시간이 흘러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마음이 흔들렸던 그 시절에게 더는 빼앗기지 않아도 될 의연함이 어느새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개관 10주년 맞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가세가 기울어 양평으로 이사할 예정이었던 소녀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소녀의 죽음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자기 입은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는 유언과 함께. 황순원문학촌이 양평에 차려진 계기도 소설의 마지막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황순원문학관 곁에는 작가 황순원과 부인 양정길 여사가 함께 잠들어있다. 20세기 격동기, 순수와 절제를 통해 한국문학의 한 극을 이룬 작가 황순원(1915 - 2000)을 기리는 애틋함이 담긴 장소다. 이북에서 태어났기에 고향에 묻히지 못했던 작가 황순원을 위해 그가 재직했던 경희대학교에서 뜻을 모았다. 올해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개관 10주년이다.
▲ 작가 황순원과 부인 양정길 여사의 묘소 ⓒ김세희
황순원문학관은 크게 4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생전 작가의 유품과 영상들로 꾸며진 ‘1. 작가와의 만남’, 비주얼 체험으로 <독 짓는 늙은이>, <별>, <목넘이 마을의 개>, <학>, <카인의 후예> 등 작가의 대표작을 살펴볼 수 있는 ‘2. 작품 속으로’, 초등학교 교실 같은 공간에서 소나기 뒷이야기를 애니매이션으로 볼 수 있는 ‘3. 남폿불 영상실’, 황순원 작가의 작품을 종이나 전자책으로 감상할 수 있는 ‘4. 마타리꽃 사랑방’이다.
▲ 작가의 대표작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황순원문학관 ⓒ김세희
<소나기>의 순수한 사랑 외에도 주목할 만한 황순원의 작품은 많다. 작가는 <목넘이 마을의 개>의 ‘신둥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나타내기도 하고, <학>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남북의 이념대립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는 스토리를 그리기도 했다. 작가 황순원의 부친은 3.1운동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그 역시 일제의 압박 속에서 흔들리지 않은 채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잡문이나 연재소설을 쓰지 않은 작가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신조를 우직하게 지켜나갔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작가와의 만남’에 마련된 황순원의 서재 ⓒ김세희
우리는 여전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완성해 나간 그의 문학 세계를 사랑하고 있다. 올해 황순원 문학제는 소나기마을 인근에서 9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린다. 강연과 백일장, 원작 영화 상영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지난 7월 마감한 ‘나의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 또한 흥미롭다. 한 명의 문인이 이룩한 문학 세계가 후대의 창작 세계에도 큰 영향과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아무리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문학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 황순원의 작품을 통해 창작이 피어나는 ‘마타리꽃 사랑방’ ⓒ김세희
○ 사진 촬영_김세희
장소 정보
2019 [인문쟁이 3기, 4기, 5기]
김세희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여행 콘텐츠 에디터로서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발빠르게 노마드의 삶을 걷고 있다. 낯선 이가 우리의 인문 기억에 놀러오는 일은 생각만 해도 설레고 두근거린다. 더 많은 것을 꿈꾸고 소망하고 함께 응원하는 온기를 뼈 마디마디에 불어넣고 싶다. 어떤 바람도 어떤 파도도 잔잔해질 수 있도록.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소나기 내릴 때마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년, 생각해볼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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