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때론 폭력적이고 무자비하다. 꿈을 꾼다는 것은 일정 부분 의식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것이고(팔과 다리가 마비된 것처럼) 몸을 뻗은 채 꿈속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잠든다는 것은 그런 꿈의 침입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잠 역시 누군가에게는 두렵고 피하고 싶은 순간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밤 잠들고 또 언젠가는 영원히 잠들지만 이 세계는 단 한 번도 잠들지 않는다.」
〈거대한 잠〉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다원예술 기획전을 설명하는 글귀에는 섬뜩한 표현이 있다. "세계는 단 한 번도 잠들지 않는다"는 말은 잠을 자야만 살 수 있는 존재에게 세계가 불사조처럼 보이게 한다. 잠들지 않는 "세계"는 꿈의 침입을 받지 않는 것일까. "영원히 잠들지만"이란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잠"은 죽음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공연 소개 글에 대한 다음의 문장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잠 속, 아득하게 먼 시절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잠’의 세계를 바라본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잠 속, 아득하게 먼 시절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잠, 그러니까 죽음을 바라본다.
을지로3가 인쇄골목이 잠들 때
▲ 일요일 오후의 을지로3가 인쇄골목 풍경 ⓒ김은영
다원예술 공연 〈거대한 잠〉은 을지로3가 인쇄골목의 어느 사무 공간에서 열렸다. 대림상가 맞은편 크고 작은 인쇄소들이 늘어선 골목 한쪽에서 제조업 상권인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예술 공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다시 기획전 소개 글을 살펴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을지로3가 인쇄골목이 잠든 일요일 오후, 여러 아티스트의 꿈으로 구성된 새로운 잠의 세계가 열립니다.」
골목의 본래 주인인 인쇄소들이 잠든 일요일, 낯선 이들이 골목을 차지한다. 또 잠과 꿈의 비유를 대입해볼까. 인쇄소들이 골목의 낮이자 의식이라면, 기획전을 펼치는 예술가들은 골목의 밤이자 무의식이 만드는 꿈이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쇄소 기기들과 좁은 길을 오가는 상인의 움직임이 멈추면 골목이 의도치 않은,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예술이라는 꿈이 침입하는 것이다.
▲ 〈거대한 잠〉 전시장 ⓒ김은영
특별할 것 없는 낡은 인쇄소 건물 2층에 들어서자 벽을 뒤덮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흰 페인트를 칠한 거칠고 평범한 벽면이 갤러리의 다듬어진 전시장보다 사진을 더 생생하게 전한다. 벽 하나에 사진 한 점, 모두 다섯 점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출입구를 등진 벽에는 영상이 재생된다. 소리와 언어가 지워진 여러 이미지가 흑과 백, 적과 흑의 대결처럼 펼쳐진다. 손에 음료를 든 관객은 벽 앞에 서서 영상을 감상한다.
전시장 한쪽 테이블에서는 또 다른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다. 참여 예술가들의 프로필에 '투피스(TWOFFICE)'라고 설명된 사람(혹은 어떤 공간)이 진행하는 커피 퍼포먼스다. 「그래픽 디자이너 1인이 운영하는 정체가 불분명한 공간」이라 설명된 투피스(TWOFFICE)라는 곳에서 이번 〈거대한 잠〉 공연 테마에 맞춰 커피를 제조했다고 한다. 작업을 설명하는 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잠들지 않으려고, 또는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마시는 커피를 통해 '거대한 잠'의 영역, 그 뒷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그러고 보니 커피와 잠은 가깝지만 그리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다. 테이블 위에서 커피와 크림을 담은 얼음 모양의 컵이 녹고 있다. 잠에서 깨면 사라지는 꿈처럼, 얼음이 다 녹으면 얼음 속 커피도 흘러 어딘가로 사라질까.
▲ 전시 관람객들과 투피스(TWOFFICE)의 커피 퍼포먼스 ⓒ김은영
하나의 꿈에서 또 다른 꿈으로
조용히 흐르던 전시장의 음악이 멈추더니 실내 불이 꺼진다. 파란 조명이 켜지고 바닥에 푸른 천이 깔린다. 곧이어 한 여자가 천을 가로질러 걸어 나온다. 특별한 소개나 안내 멘트는 없다. 무심히 앞으로 걸어 나온 여자는 전시 사진 앞에 서서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본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낭독을 시작한다.
▲ 오미순 작가의 '내 검은 바다 속의 D' 낭독 ⓒ김은영
'내 검은 바다 속의 D'라는 제목의 글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공연장 안의 관객들에게 스며든다. 정체불명의 손톱이 긴 남자와 겁에 질린 소녀가 낭독자의 목소리를 따라 눈앞에 그려진다. 글 속의 소녀는 낯선 창고에 갇혀 달아나려 애쓰고 있다. 소녀는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을 지독한 상황에 처한 것일까. “창고에 바닷물이 가득 찼다”라고 낭독하자 공연장의 푸른 벽들이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느껴진다. 깊은 바다에 잠긴 소녀는 "할퀴고 찢긴 상처"가 아가미로 변해 물속에서 숨을 쉰다.
소녀가 머리 위로 헤엄쳐가는 'D'에게 손을 뻗는다. 'D'는 아마도 낭독자 뒤에 걸린 사진 속 듀공일 것이다. 사진 속 피사체가 문학 속 캐릭터가 되어 다시 관객에게 다가온다. 하나의 꿈에서 또 다른 꿈으로 옮겨가듯 사진 속 듀공이 소녀의 D가 되어 “빛과 소리와 아픔을 모두 가려주었다.” 그리고 소녀가 잠든다. “아득히 D가 우는 소리가 내 잠의 바다에 흩날렸다”는 문장으로 낭독이 끝나고, 낭독자가 조용히 퇴장한다. 곧이어 또 한 명의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간다. 흰 옷을 입은 맨발의 여인은 담담히 관객 앞에 선다.
▲ 김규리 리코더 연주자의 즉흥 연주 ⓒ김은영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몰입하는 맨발의 연주자. 연주자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자장가를 불러주듯, 먼 곳의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새기듯 연주자는 천천히 흥얼거린다. 불과 1,2미터 남짓이지만 연주자가 서 있는 곳과 관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물결이 흐르는 듯하다. 곧이어 연주자가 리코더 연주를 시작한다. 리코더의 음은 바로 전 연주자가 읊조리던 멜로디를 따라간다. 음과 함께 연주자의 몸이 자연스럽게 흔들리고, 리코더의 끝이 원을 그리듯 움직인다. 높고 가벼운 리코더의 음향이 애처로운 아이의 눈빛처럼 어른거린다. 얼마 뒤, 종이 울리며 하나의 곡이 끝났음을 알린다. 연주자는 다른 악기를 집어 든다. 낯선 생김새의 사각의 관악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악기다.
연주자가 사각의 통과 연결된 파이프에 입술을 대고 연주를 시작한다. 배경 사운드인 전자음 위에 악기의 소리가 덧입혀진다. 파이프를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큰 뿔피리를 부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다 거친 쇳소리가 침입한다. 날갯짓을 하듯 양팔을 움직여 악기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연주자는 어깨를 떨며 소리의 질감에 몰입한다. 다시 종이 울리고, 세 번째 악기 연주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중간 크기의 리코더다. 처음에는 높은 음의 작은 리코더, 다음에는 기묘한 쇳소리를 내는 현대음악 악기. 그리고 다시 중간 크기의 리코더로 이어지는 연주는 마치 혼몽한 꿈에서 깨지 않은 채 이리저리 현실을 헤매는 몽유병자의 발걸음 같다.
모호하게 얼어붙은 '잠'
▲ 〈거대한 잠(The Grandeur of Sleep)〉에 전시된 사진들 ⓒOreo Jung Min Cho
문학 텍스트 낭독과 악기 연주가 끝나고 잠시 인터미션이 주어진다. 두 예술가가 바라본 “잠의 세계”는 서늘하고 음울함이 감도는 공간의 푸른빛처럼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전시된 사진으로 돌아간다. 네 면의 벽과 네 점의 사진. 잠에 빠진 듯(어쩌면 두 번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처럼) 한 쪽 팔을 늘어뜨린 여자가 한쪽 벽을 채우고 있다. 그 옆에는 역시나 잠에 빠진 것처럼 등을 구부린 채 빗살무늬의 빛을 받으며 정지해 있는 물속의 듀공이다. 또 그 옆으로 마치 식물의 줄기처럼 뼈대만 남은 박물관의 공룡 화석이 있다.
마지막은 비스듬한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듯, 혹은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이마를 숙이고 멈춰 있는 소를 찍은 사진이다. 네 개의 피사체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하룻밤의 잠보다 더 깊이 잠들어 의식 일부분이 죽어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거대한’ 잠일까. 잠의 영역이 거대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는 것일까.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그 음영이 짙다는 것일까, 아니면 색과 소리의 이미지가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거대한 모호함으로 스며들었다는 뜻일까.
▲ 〈거대한 잠(The Grandeur of Sleep)〉에 전시된 사진들 ⓒOreo Jung Min Cho
다시 공연이 시작한다. 고개를 숙인 채 흘러내리는 앞머리로 비스듬히 얼굴을 가린 한 남자가 키보드 앞에 앉아 인사한다. (공연 중 유일하게 관객에게 멘트를 한) 베이스 연주자 송인섭은 이번 공연에서 베이스를 내려놓고 건반 앞에 앉았다고 말한다. 그는 이번 〈거대한 잠〉에 전시된 네 점의 사진을 모티프로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곡을 작곡했으며, 연주 중간에 무용가가 나와 공연할 거라 귀띔한다. 연주를 시작한다. 전자음 배경에 부드럽고 몽환적인 건반의 음색이 더해진다. 멜로디는 맑고 섬세한 몇 개의 구절을 반복한다. 반복되면서도 어딘가로 향해가듯 고양된다. 그리고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 송인섭 뮤지션과 이미진 무용가의 공연 모습 ⓒ김은영
낯선 곳을 살피듯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무용수는 바닥을 미끄러져가며 손을 뻗는다. 가만히 멈춰 있는 자세조차 무언가를 파동 시키듯 강하게 전율한다. 선과 굴곡, 이어짐과 끊김이 건반의 연주 속으로 스며든다. 인간의 팔과 어깨, 허리의 굴곡, 발의 스침이 마치 나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보는 듯 새롭게 다가온다. 공간의 여백을 만지는 듯한 동작과 함께 음악이 흐른다. 음악가는 연주하고, 무용수는 춤을 추고, 관객은 바라본다. 만약 누군가의 꿈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렇게 신비로운 모습일까. 문득 내가 생각했던 잠의 특성이 죽음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깨닫는다. 누군가에게 꿈은 현실이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그리고 바라보지 못한 세계의 비밀스러운 장면을 바라볼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을. 어떤 이는 그 미지의 세계를 불쾌한 침입으로 여기지만 어떤 이들은 명징한 의식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유가 틈입할 수 있는, 잠들지 않는 세계의 알려지지 않은 잠인 것이다.
▲ 송인섭 뮤지션과 이미진 무용가의 공연 모습 ⓒ김은영
이제 공연장은 빠른 비트로 채워진다. 두 명의 디제이가 리듬을 디자인 하듯 디제잉 한다. 관람객들이 몸을 흔든다. 이제부터 자유롭게 공연장을 누비며 그들의 꿈을 몸으로 표현할 차례다. 예술가가 바라본 잠의 세계는 설명을 줄인 낭독과 연주, 그리고 사운드와 몸짓으로 그들 의식 어딘가에 쌓여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감각들은 비슷하지만 다른 이미지로 변주돼 그들의 꿈으로 재생될 것이다.
▲ Deep Circuit의 디제잉 모습과 어두워진 인쇄골목의 풍경 ⓒ김은영
밖으로 나가자 해가 저문 인쇄골목이 보인다. 다시 홀로 되묻는다. 잠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바라본 “잠의 세계”는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나는 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을 잊은 채 잠의 세계로 들어갔다. 나는 너무 깨어 있었던 것이다. 각성 상태에서, 긴장하고 의식한 상태에서 나는 잠을 바라보려 했다. 나는 이완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잠든 이는 무방비하고 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약함'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거대한 잠〉을 바라보는 몽상가들은 어쩌면 가장 약하고 모호하기에 꿈을 꿀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또 강하고 깨어 있기에 자신의 꿈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을지로3가의 인쇄골목, 표면과 냄새와 무게를 가진 수천 장의 물질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곳이기에 그들의 몽상이 더욱 빛난다.
거대한 잠과 몽상가들
을지로3가 인쇄골목이 잠들 때
인문쟁이 김은영
2019-08-01
▲ 거대한 잠(The Grandeur of Sleep) ⓒOreo Jung Min Cho
몇 개의 문장으로부터
꿈은 때론 폭력적이고 무자비하다. 꿈을 꾼다는 것은 일정 부분 의식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것이고(팔과 다리가 마비된 것처럼) 몸을 뻗은 채 꿈속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잠든다는 것은 그런 꿈의 침입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잠 역시 누군가에게는 두렵고 피하고 싶은 순간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밤 잠들고 또 언젠가는 영원히 잠들지만 이 세계는 단 한 번도 잠들지 않는다.」
〈거대한 잠〉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다원예술 기획전을 설명하는 글귀에는 섬뜩한 표현이 있다. "세계는 단 한 번도 잠들지 않는다"는 말은 잠을 자야만 살 수 있는 존재에게 세계가 불사조처럼 보이게 한다. 잠들지 않는 "세계"는 꿈의 침입을 받지 않는 것일까. "영원히 잠들지만"이란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잠"은 죽음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공연 소개 글에 대한 다음의 문장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잠 속, 아득하게 먼 시절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잠’의 세계를 바라본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잠 속, 아득하게 먼 시절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잠, 그러니까 죽음을 바라본다.
을지로3가 인쇄골목이 잠들 때
▲ 일요일 오후의 을지로3가 인쇄골목 풍경 ⓒ김은영
다원예술 공연 〈거대한 잠〉은 을지로3가 인쇄골목의 어느 사무 공간에서 열렸다. 대림상가 맞은편 크고 작은 인쇄소들이 늘어선 골목 한쪽에서 제조업 상권인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예술 공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다시 기획전 소개 글을 살펴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을지로3가 인쇄골목이 잠든 일요일 오후, 여러 아티스트의 꿈으로 구성된 새로운 잠의 세계가 열립니다.」
골목의 본래 주인인 인쇄소들이 잠든 일요일, 낯선 이들이 골목을 차지한다. 또 잠과 꿈의 비유를 대입해볼까. 인쇄소들이 골목의 낮이자 의식이라면, 기획전을 펼치는 예술가들은 골목의 밤이자 무의식이 만드는 꿈이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쇄소 기기들과 좁은 길을 오가는 상인의 움직임이 멈추면 골목이 의도치 않은,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예술이라는 꿈이 침입하는 것이다.
▲ 〈거대한 잠〉 전시장 ⓒ김은영
특별할 것 없는 낡은 인쇄소 건물 2층에 들어서자 벽을 뒤덮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흰 페인트를 칠한 거칠고 평범한 벽면이 갤러리의 다듬어진 전시장보다 사진을 더 생생하게 전한다. 벽 하나에 사진 한 점, 모두 다섯 점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출입구를 등진 벽에는 영상이 재생된다. 소리와 언어가 지워진 여러 이미지가 흑과 백, 적과 흑의 대결처럼 펼쳐진다. 손에 음료를 든 관객은 벽 앞에 서서 영상을 감상한다.
전시장 한쪽 테이블에서는 또 다른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다. 참여 예술가들의 프로필에 '투피스(TWOFFICE)'라고 설명된 사람(혹은 어떤 공간)이 진행하는 커피 퍼포먼스다. 「그래픽 디자이너 1인이 운영하는 정체가 불분명한 공간」이라 설명된 투피스(TWOFFICE)라는 곳에서 이번 〈거대한 잠〉 공연 테마에 맞춰 커피를 제조했다고 한다. 작업을 설명하는 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잠들지 않으려고, 또는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마시는 커피를 통해 '거대한 잠'의 영역, 그 뒷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커피와 잠은 가깝지만 그리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다. 테이블 위에서 커피와 크림을 담은 얼음 모양의 컵이 녹고 있다. 잠에서 깨면 사라지는 꿈처럼, 얼음이 다 녹으면 얼음 속 커피도 흘러 어딘가로 사라질까.
▲ 전시 관람객들과 투피스(TWOFFICE)의 커피 퍼포먼스 ⓒ김은영
하나의 꿈에서 또 다른 꿈으로
조용히 흐르던 전시장의 음악이 멈추더니 실내 불이 꺼진다. 파란 조명이 켜지고 바닥에 푸른 천이 깔린다. 곧이어 한 여자가 천을 가로질러 걸어 나온다. 특별한 소개나 안내 멘트는 없다. 무심히 앞으로 걸어 나온 여자는 전시 사진 앞에 서서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본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낭독을 시작한다.
▲ 오미순 작가의 '내 검은 바다 속의 D' 낭독 ⓒ김은영
'내 검은 바다 속의 D'라는 제목의 글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공연장 안의 관객들에게 스며든다. 정체불명의 손톱이 긴 남자와 겁에 질린 소녀가 낭독자의 목소리를 따라 눈앞에 그려진다. 글 속의 소녀는 낯선 창고에 갇혀 달아나려 애쓰고 있다. 소녀는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을 지독한 상황에 처한 것일까. “창고에 바닷물이 가득 찼다”라고 낭독하자 공연장의 푸른 벽들이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느껴진다. 깊은 바다에 잠긴 소녀는 "할퀴고 찢긴 상처"가 아가미로 변해 물속에서 숨을 쉰다.
소녀가 머리 위로 헤엄쳐가는 'D'에게 손을 뻗는다. 'D'는 아마도 낭독자 뒤에 걸린 사진 속 듀공일 것이다. 사진 속 피사체가 문학 속 캐릭터가 되어 다시 관객에게 다가온다. 하나의 꿈에서 또 다른 꿈으로 옮겨가듯 사진 속 듀공이 소녀의 D가 되어 “빛과 소리와 아픔을 모두 가려주었다.” 그리고 소녀가 잠든다. “아득히 D가 우는 소리가 내 잠의 바다에 흩날렸다”는 문장으로 낭독이 끝나고, 낭독자가 조용히 퇴장한다. 곧이어 또 한 명의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간다. 흰 옷을 입은 맨발의 여인은 담담히 관객 앞에 선다.
▲ 김규리 리코더 연주자의 즉흥 연주 ⓒ김은영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몰입하는 맨발의 연주자. 연주자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자장가를 불러주듯, 먼 곳의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새기듯 연주자는 천천히 흥얼거린다. 불과 1,2미터 남짓이지만 연주자가 서 있는 곳과 관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물결이 흐르는 듯하다. 곧이어 연주자가 리코더 연주를 시작한다. 리코더의 음은 바로 전 연주자가 읊조리던 멜로디를 따라간다. 음과 함께 연주자의 몸이 자연스럽게 흔들리고, 리코더의 끝이 원을 그리듯 움직인다. 높고 가벼운 리코더의 음향이 애처로운 아이의 눈빛처럼 어른거린다. 얼마 뒤, 종이 울리며 하나의 곡이 끝났음을 알린다. 연주자는 다른 악기를 집어 든다. 낯선 생김새의 사각의 관악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악기다.
연주자가 사각의 통과 연결된 파이프에 입술을 대고 연주를 시작한다. 배경 사운드인 전자음 위에 악기의 소리가 덧입혀진다. 파이프를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큰 뿔피리를 부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다 거친 쇳소리가 침입한다. 날갯짓을 하듯 양팔을 움직여 악기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연주자는 어깨를 떨며 소리의 질감에 몰입한다. 다시 종이 울리고, 세 번째 악기 연주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중간 크기의 리코더다. 처음에는 높은 음의 작은 리코더, 다음에는 기묘한 쇳소리를 내는 현대음악 악기. 그리고 다시 중간 크기의 리코더로 이어지는 연주는 마치 혼몽한 꿈에서 깨지 않은 채 이리저리 현실을 헤매는 몽유병자의 발걸음 같다.
모호하게 얼어붙은 '잠'
▲ 〈거대한 잠(The Grandeur of Sleep)〉에 전시된 사진들 ⓒOreo Jung Min Cho
문학 텍스트 낭독과 악기 연주가 끝나고 잠시 인터미션이 주어진다. 두 예술가가 바라본 “잠의 세계”는 서늘하고 음울함이 감도는 공간의 푸른빛처럼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전시된 사진으로 돌아간다. 네 면의 벽과 네 점의 사진. 잠에 빠진 듯(어쩌면 두 번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처럼) 한 쪽 팔을 늘어뜨린 여자가 한쪽 벽을 채우고 있다. 그 옆에는 역시나 잠에 빠진 것처럼 등을 구부린 채 빗살무늬의 빛을 받으며 정지해 있는 물속의 듀공이다. 또 그 옆으로 마치 식물의 줄기처럼 뼈대만 남은 박물관의 공룡 화석이 있다.
마지막은 비스듬한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듯, 혹은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이마를 숙이고 멈춰 있는 소를 찍은 사진이다. 네 개의 피사체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하룻밤의 잠보다 더 깊이 잠들어 의식 일부분이 죽어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거대한’ 잠일까. 잠의 영역이 거대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는 것일까.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그 음영이 짙다는 것일까, 아니면 색과 소리의 이미지가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거대한 모호함으로 스며들었다는 뜻일까.
▲ 〈거대한 잠(The Grandeur of Sleep)〉에 전시된 사진들 ⓒOreo Jung Min Cho
다시 공연이 시작한다. 고개를 숙인 채 흘러내리는 앞머리로 비스듬히 얼굴을 가린 한 남자가 키보드 앞에 앉아 인사한다. (공연 중 유일하게 관객에게 멘트를 한) 베이스 연주자 송인섭은 이번 공연에서 베이스를 내려놓고 건반 앞에 앉았다고 말한다. 그는 이번 〈거대한 잠〉에 전시된 네 점의 사진을 모티프로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곡을 작곡했으며, 연주 중간에 무용가가 나와 공연할 거라 귀띔한다. 연주를 시작한다. 전자음 배경에 부드럽고 몽환적인 건반의 음색이 더해진다. 멜로디는 맑고 섬세한 몇 개의 구절을 반복한다. 반복되면서도 어딘가로 향해가듯 고양된다. 그리고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 송인섭 뮤지션과 이미진 무용가의 공연 모습 ⓒ김은영
낯선 곳을 살피듯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무용수는 바닥을 미끄러져가며 손을 뻗는다. 가만히 멈춰 있는 자세조차 무언가를 파동 시키듯 강하게 전율한다. 선과 굴곡, 이어짐과 끊김이 건반의 연주 속으로 스며든다. 인간의 팔과 어깨, 허리의 굴곡, 발의 스침이 마치 나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보는 듯 새롭게 다가온다. 공간의 여백을 만지는 듯한 동작과 함께 음악이 흐른다. 음악가는 연주하고, 무용수는 춤을 추고, 관객은 바라본다. 만약 누군가의 꿈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렇게 신비로운 모습일까. 문득 내가 생각했던 잠의 특성이 죽음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깨닫는다. 누군가에게 꿈은 현실이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그리고 바라보지 못한 세계의 비밀스러운 장면을 바라볼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을. 어떤 이는 그 미지의 세계를 불쾌한 침입으로 여기지만 어떤 이들은 명징한 의식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유가 틈입할 수 있는, 잠들지 않는 세계의 알려지지 않은 잠인 것이다.
▲ 송인섭 뮤지션과 이미진 무용가의 공연 모습 ⓒ김은영
이제 공연장은 빠른 비트로 채워진다. 두 명의 디제이가 리듬을 디자인 하듯 디제잉 한다. 관람객들이 몸을 흔든다. 이제부터 자유롭게 공연장을 누비며 그들의 꿈을 몸으로 표현할 차례다. 예술가가 바라본 잠의 세계는 설명을 줄인 낭독과 연주, 그리고 사운드와 몸짓으로 그들 의식 어딘가에 쌓여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감각들은 비슷하지만 다른 이미지로 변주돼 그들의 꿈으로 재생될 것이다.
▲ Deep Circuit의 디제잉 모습과 어두워진 인쇄골목의 풍경 ⓒ김은영
밖으로 나가자 해가 저문 인쇄골목이 보인다. 다시 홀로 되묻는다. 잠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바라본 “잠의 세계”는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나는 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을 잊은 채 잠의 세계로 들어갔다. 나는 너무 깨어 있었던 것이다. 각성 상태에서, 긴장하고 의식한 상태에서 나는 잠을 바라보려 했다. 나는 이완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잠든 이는 무방비하고 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약함'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거대한 잠〉을 바라보는 몽상가들은 어쩌면 가장 약하고 모호하기에 꿈을 꿀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또 강하고 깨어 있기에 자신의 꿈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을지로3가의 인쇄골목, 표면과 냄새와 무게를 가진 수천 장의 물질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곳이기에 그들의 몽상이 더욱 빛난다.
2019 [인문쟁이 5기]
서울에 살며 일하고 글 쓰는 사람. 비와 냉면을 좋아하고 자서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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