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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 유성 온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유성 봉명동 유성온천축제

인문쟁이 노예찬

2019-07-04


2019 유성온천문화축제

▲ 유성온천축제 입구 ⓒ노예찬


온천이 인근에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 지역의 대표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특별한 홍보가 없어도 입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예산의 덕산 온천, 창녕의 부곡 온천, 아산의 온양 온천, 아산·도고 온천, 충주의 수안보 온천은 그 대표적인 예다. 특히 충남 지역 온천은 수도권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다.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도 있다. 충남 아산의 온천과 비교해 현재 이용자 수는 줄었지만, 대전에도 오래전부터 이름을 알린 온천이 있다. 바로 대전광역시 유성구 봉명동의 유성 온천이다.


물론 이 지역이 처음부터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유성 온천의 개발이 시작되면서 지금은 유성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들과 숲이 많았다. 그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부엉이가 찾아와 울던 지역이라고 해서 봉1명동(鳳鳴洞)이라 불렸다. 


1. 鳳은 봉황 봉으로 읽히지만, 부엉이의 ‘봉황- 봉황’하고 우는 울음소리를 봉황새라고 여기기도 했다. 봉명동뿐만 아니라 鳳자가 붙은 지명에는 봉황뿐만 아니라 부엉이 관련 이야기가 많다. 대표적으로 군위군의 소보면 봉황리(鳳凰里)의 경우 “옛날 두모국의 왕이 적국 장사에게 쫓기다 환심고개에서 붙잡혔는데, 장사의 날래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짐승에 비유하여 부엉이라고 불렀다 한다”는 민담이 전해진다.


 

▲ 유성온천축제 ⓒ노예찬


전설에 따르면 유성 온천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고 하나 이를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사료는 없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상류층이 유성 온천을 이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는 남아 있다. 유성구 상대동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대규모 객사터가 그 증거다. 이 객사터는 관야(옛 유성현 치소)보다 크게 지어졌는데, 유성 온천을 방문하는 관리가 묵어가는 처소였기 때문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평주, 유성, 온양, 동래 등 10개의 지역의 온천이 기록되어 있다. 


병든 부모를 위해 온천을 방문하는 관리에게 휴가를 주었다는 『고려사』(선종宣宗, 1049~1094)의 기록2을 보아, 당시 이미 유성 온천이 많은 이에게 알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자연 분출 온천을 개발하고 근대적 온천장 시설을 마련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 “선종 5년(1088)에 명을 내려 관리(官吏)의 병든 부모가 온천에 목욕하러 갈 때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타산하여 휴가를 주게 하다.” 

    _ 『고려사』(卷84, 志38, 刑法1 公式 官吏給暇)



온천에 흐르는 전설과 축제



 

▲ 학 모형과 온천 ⓒ노예찬


초창기 대전 유성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성 온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전설을 품고 있음에도 관광특구로 지정했을 뿐, 지역 홍보를 위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유성 온천이라는 명성에 기댄 ‘무(無) 마케팅’은 점차 관광객의 감소를 불러왔다. 전국에서 이용 시설이 가장 많은 온천이지만 정작 이용자 수는 그 숫자를 따르지 못했다. 이런 기형적인 지표에 유성은 손을 쓰기 시작했고, 그 목적으로 유성온천축제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온천과 축제, 이 조합은 특수했다. 일단 온천물에 직접 발을 담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음악과 공연 등의 다채로운 이벤트를 준비해 즐길 만한 축제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노력은  설화 속 학(鶴)의 활용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백제 의자왕 때 신라군들은 차츰 백제 땅을 침범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백제 땅의 젊은이들은 모두 군사로 뽑혀가게 되었다. 유성 땅에 살고 있던 한 어머니도 아들 하나만 믿고 살고 있었으나, 아들이 군문에 뽑혀 들어가게 되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 어머니는 고목나무에 물을 떠 놓고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아들은 적과 매일 같이 싸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붙잡혀 포로가 되었고 노역을 하게 되었다. (···) 


어머니는 싸움은 끝났는데 자식이 돌아오지 않자, 항상 사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그만 병들어 눕게 되었다. (···) 그런데 집으로 기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맨발로 달려갔다. 아들임을 확신하고 어머니는 아들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갔다. 거기엔 아들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그는 집에 와서 치료를 하게 되었다. 


(···) 집 앞을 지나 논길을 걷는데 다친 학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고통스럽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떨어진 학 곁에 가보니 학이 떨어진 자리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고 있다. 학이 떨어져서 뜨거운 물에 몸을 비비고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생각했다. 학은 뜨거운 물로 한쪽 날개를 자꾸 적시더니 파닥거리다가 하늘로 날아갔다. (···) 


상처를 따뜻한 물로 씻기자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만 감고 누워 있었다. 그러기를 며칠, 이상하게도 바깥 상처에 딱정이가 앉기 시작했고, 저절로 딱지가 떨어지더니 언제 앓았느냐는 듯이 홀가분하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후 그의 어머니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에 움막을 짓고 여러 가지 병을 앓는 사람을 여기에 와서 목욕하도록 했다."


발 씻는 곳

 

태음인 발 씻는 곳

▲ 온천을 즐기는 시민들 ⓒ노예찬

 

설화의 주인공은 어머니와 아들이지만 축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학인 것 같다. 동물이 지닌 장점일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유성 온천의 위치를 알려준 동물이기도 하니까 이를 상징화해서 나타내고자 한 것 아닐까? 이 설화의 활용은 학의 구조물에서 시작되어 인형극으로 완성된다. 인형극은 유성문화원에서 직접 기획하고 이번 축제에서도 부스를 활용해 홍보하기도 했다.



마무리



 

▲ 축제 대공연장 야간 공연 ⓒ노예찬


유성온천축제는 온천을 맘껏 누릴 수 있다는 게 최고의 장점이겠지만, 수많은 먹거리와 거리를 색색으로 수놓는 야경 역시 즐길 만하다. 특히 야경은 주최 측에서 많이 신경 쓴 느낌이 들었다. 곳곳에 설치된 구조물들은 낮에 보면 큰 매력을 느낄 수 없지만, 밤에는 ‘이게 이런 빛을 내는구나!’하는 감탄이 나온다.


 

▲ 밤의 유성온천축제 풍경 ⓒ노예찬


축제와 함께 활기를 되찾은 유성 온천은 그 명성에 걸맞게 빛났다. 하지만 축제를 즐길 공간이 좁다는 단점은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방문객은 많은데 공간이 이를 수용하기에 부족한 느낌이 강했다. 주차 공간도 일부 호텔의 주차장을 활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공간과 관련된 문제는 향후에도 해결되기가 상당히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온천이라는 특수한 관광 자원과 전설의 내용이 잘 결합된 개성 가득한 축제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해가 거듭될수록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축제를 기반으로 유성 온천이 옛 명성을 되찾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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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쟁이 노예찬

2019 [인문쟁이 5기]


오늘도 초심을 잡는다. 나는 왼쪽이 현저하게 부족했지만, 그것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왼손은 조금씩 나의 오른손을 파고들었다. 나의 두 손이 깍지를 낀 것 처럼, 아무런 느낌없이. 처음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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