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조선에 머물렀던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집을 일컫는 ‘적산가옥’을 들 수 있다.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2동에 위치한 세칭 ‘삼릉 줄사택’도 그 중 하나다. 삼릉 줄사택은 일제 강점기 일본 중공업 회사 '미쓰비시'의 공장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사택이다.
그런데 왜 ‘삼릉’이라고 불렸을까? 미쓰비시의 한자 발음인 ‘삼릉(三菱)’을 마을 별칭으로 사용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곳 삼릉은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네 부모의 삶의 흔적과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다.
▲ 인천시 부평구 삼릉 줄사택 풍경 ⓒ이재형
▲ 부평역사박물관에 재현해놓은 삼릉 줄사택 모습 ⓒ이재형
부평역사박물관에 재현된 삼릉 줄사택
지난해 5월 인천역사문화재단 초청으로 부평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당시 특별기획전 ‘해방공장’ 전시회 때 삼릉 줄사택의 존재와 역사를 처음 접했다. 마치 옛 청계천에 빽빽히 늘어선 판잣집 모습을 보는 듯했다. 삼릉 줄사택은 그렇게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모습이 여전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재방문의 날을 쉽게 기약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재개발로 곧 철거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고, 나는 서둘러 부평구로 향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어쩌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약 한 시간을 달렸다. 인천1호선으로 환승해 동수역에 내렸다. 동수역에서 삼릉 줄사택 쪽으로 가다가 세탁소에 들러 정확한 위치를 물었다.
세탁소 아주머니는 “예전에는 여기도 다 삼릉 줄사택 촌이었어. 옛날에 일본 x들이 지어서 노동자들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거의 다 헐리고 몇 채 안 남았어.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곧 헐린다고 해서 사람들이 사진 찍으러 많이 와.” 아주머니께서 삼릉 줄사택의 정확한 위치뿐 아니라 이곳의 간략한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신 셈이라 무척 고마웠다.
▲ 삼릉 줄사택에는 아직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재형
세탁소 아주머니 안내에 따라 부평구 삼릉 줄사택에 도착했다. 주택가 한 가운데 남루한 건물 몇 채가 있다. 적산가옥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삼릉 줄사택은 한 지붕 밑에 여러 집이 붙어 있는 단층 건물 형태다. 주변을 기웃거리니 널어놓은 빨래가 보인다. 아직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가옥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한 가구가 차지한 면적이 채 5평이 안되어 보인다. 집 높이도 간신히 어른 키 정도가 될까 말까. ‘세상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줄사택은 찢기고 허물어져, 마치 일제에 의해 핍박당한 강제 징용자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당시 우리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삼릉 줄사택 내부 모습. 천장이 낮고 공간도 비좁다. ⓒ이재형
▲ 삼릉 줄사택 골목 풍경 ⓒ이재형
줄사택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이곳에 사는 한 중년 남자가 힐끗 보더니 궁금하면 들어오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사는 집을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부평역사박물관에서 봤던 딱 그 모습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좁은 부엌 겸 거실과 미닫이문으로 연결된 방 하나가 전부다. 이런 곳에서 강제 징용자들은 아이들 낳고 키우며 살았다. 집이 좁다고 불행한 건 아니다. 행복했을 수도 있다. 다닥다닥 붙은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말이다. 골목에 심어놓은 상추, 고추 등 푸성귀들이 잘 자라고 있다. 강제 징용노동자들도 비록 일본의 핍박을 받았겠지만 어쩌면 이 푸성귀처럼 억척스럽게 시절을 견뎌냈을지도 모른다.
일제 치하 강제 수탈의 현장 삼릉줄사택
부평은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수탈의 대상지였다. 193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로 표현되는 우리 민족의 수난기에 부평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수기지로 변모했다. 1938년 일본계 히로나카상공(弘中商工) 기계제작회사가 사업 확장을 위해 마련한 공장지대가 당시 부천군 관내 부평역 인근 철도변이었다.
▲ 일제 강점 시기 미쓰비시 제강 사택과 양성소 항공사진 ⓒ이재형
이곳에 공장 노동자가 거주할 사택들이 대거 들어섰다. 당시 근무하던 노동자 수는 약 1천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곳이 줄사택이었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히로나카상공은 일본 굴지의 중공업 회사였던 미쓰비시에게 부평공장을 비롯한 인근 사택 부지 및 건물을 매각했다.
일제 강점 아래 부평에는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기계를 만들었던 삼릉 군수공장, 일본 육군의 전쟁 무기를 생산하던 조병창, 조병창 인근의 대규모 군수공장과 하청공장까지 있었다. 우리 조선인은 이곳에 강제 동원되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혹은 일본군 징병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은 군수공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사정을 이규원의 소설 <해방공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천구백사십오년 팔월십오일, 정오.
서울과 인천을 이어놓은 식민도로 - 말하기를 산업도로를 앞에 끼고
부평평야에 풍덩 주저앉은 이 군수공장은 거무하에 들여올 역사적 통곡도로 모르고
압박과 착취의 고역을 계속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_ 이규원 소설 <해방공장> 중
강제동원 흔적 부수지 말고 보존해야
▲ 삼릉 줄사택 주변은 아직도 ‘삼릉’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재형
해방 후 삼릉공장 징용 노동자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다. 줄사택은 민간에 매각되었고 그 중 일부가 현재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줄사택 지역은 한자 발음 ‘삼릉’(三菱)으로 계속 불리고 있다. 인천 동수역 이름이 자칫 삼릉역이 될 뻔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3.1운동 100주년이 됐지만 부평구 부영로 21-127번지 일대는 ‘삼릉’으로 불리는, 어쩌면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공간이다. 떡방앗간, 반찬가게 등이 아직도 삼능(삼릉)이란 상호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이곳은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국내 강제동원 흔적을 간직한 유일한 곳이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는 줄사택들은 재개발 사업으로 곧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다. 따라서 현재 남겨진 노동자와 근대 문화유산으로 줄사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줄사택을 어떻게 다뤄야할까?
▲ 부평공원에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상 ⓒ이재형
적산가옥에는 일제 강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부끄러운 역사적 공간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부수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서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이곳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기억하기 위해 일부 줄사택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물론 전면 철거 후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다. 2017년 8월에는 미쓰비시 제강 공장이 있었던 부평공원에 국내 최초의 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어두운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삼능 줄사택을 한두 채 정도 남겨두면 어떨까?
취재를 하는 동안 삼릉 줄사택 좁은 골목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하며 노는 아이들 소리가 내내 들리는 듯했다. 이곳에 살며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는 힘들게 자식들을 키웠다. 이런 곳이 개발 논리에 밀려 하나씩 헐려버린다면 우리의 아픈 역사와 빛바랜 추억도 그만큼의 속도로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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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 그 잊혀져가는 아픔을 찾아서
인천 부평구 삼릉 줄사택
인문쟁이 이재형
2019-06-11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조선에 머물렀던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집을 일컫는 ‘적산가옥’을 들 수 있다.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2동에 위치한 세칭 ‘삼릉 줄사택’도 그 중 하나다. 삼릉 줄사택은 일제 강점기 일본 중공업 회사 '미쓰비시'의 공장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사택이다.
그런데 왜 ‘삼릉’이라고 불렸을까? 미쓰비시의 한자 발음인 ‘삼릉(三菱)’을 마을 별칭으로 사용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곳 삼릉은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네 부모의 삶의 흔적과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다.
▲ 인천시 부평구 삼릉 줄사택 풍경 ⓒ이재형
▲ 부평역사박물관에 재현해놓은 삼릉 줄사택 모습 ⓒ이재형
부평역사박물관에 재현된 삼릉 줄사택
지난해 5월 인천역사문화재단 초청으로 부평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당시 특별기획전 ‘해방공장’ 전시회 때 삼릉 줄사택의 존재와 역사를 처음 접했다. 마치 옛 청계천에 빽빽히 늘어선 판잣집 모습을 보는 듯했다. 삼릉 줄사택은 그렇게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모습이 여전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재방문의 날을 쉽게 기약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재개발로 곧 철거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고, 나는 서둘러 부평구로 향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어쩌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약 한 시간을 달렸다. 인천1호선으로 환승해 동수역에 내렸다. 동수역에서 삼릉 줄사택 쪽으로 가다가 세탁소에 들러 정확한 위치를 물었다.
세탁소 아주머니는 “예전에는 여기도 다 삼릉 줄사택 촌이었어. 옛날에 일본 x들이 지어서 노동자들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거의 다 헐리고 몇 채 안 남았어.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곧 헐린다고 해서 사람들이 사진 찍으러 많이 와.” 아주머니께서 삼릉 줄사택의 정확한 위치뿐 아니라 이곳의 간략한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신 셈이라 무척 고마웠다.
▲ 삼릉 줄사택에는 아직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재형
세탁소 아주머니 안내에 따라 부평구 삼릉 줄사택에 도착했다. 주택가 한 가운데 남루한 건물 몇 채가 있다. 적산가옥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삼릉 줄사택은 한 지붕 밑에 여러 집이 붙어 있는 단층 건물 형태다. 주변을 기웃거리니 널어놓은 빨래가 보인다. 아직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가옥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한 가구가 차지한 면적이 채 5평이 안되어 보인다. 집 높이도 간신히 어른 키 정도가 될까 말까. ‘세상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줄사택은 찢기고 허물어져, 마치 일제에 의해 핍박당한 강제 징용자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당시 우리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삼릉 줄사택 내부 모습. 천장이 낮고 공간도 비좁다. ⓒ이재형
▲ 삼릉 줄사택 골목 풍경 ⓒ이재형
줄사택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이곳에 사는 한 중년 남자가 힐끗 보더니 궁금하면 들어오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사는 집을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부평역사박물관에서 봤던 딱 그 모습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좁은 부엌 겸 거실과 미닫이문으로 연결된 방 하나가 전부다. 이런 곳에서 강제 징용자들은 아이들 낳고 키우며 살았다. 집이 좁다고 불행한 건 아니다. 행복했을 수도 있다. 다닥다닥 붙은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말이다. 골목에 심어놓은 상추, 고추 등 푸성귀들이 잘 자라고 있다. 강제 징용노동자들도 비록 일본의 핍박을 받았겠지만 어쩌면 이 푸성귀처럼 억척스럽게 시절을 견뎌냈을지도 모른다.
일제 치하 강제 수탈의 현장 삼릉줄사택
부평은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수탈의 대상지였다. 193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로 표현되는 우리 민족의 수난기에 부평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수기지로 변모했다. 1938년 일본계 히로나카상공(弘中商工) 기계제작회사가 사업 확장을 위해 마련한 공장지대가 당시 부천군 관내 부평역 인근 철도변이었다.
▲ 일제 강점 시기 미쓰비시 제강 사택과 양성소 항공사진 ⓒ이재형
이곳에 공장 노동자가 거주할 사택들이 대거 들어섰다. 당시 근무하던 노동자 수는 약 1천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곳이 줄사택이었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히로나카상공은 일본 굴지의 중공업 회사였던 미쓰비시에게 부평공장을 비롯한 인근 사택 부지 및 건물을 매각했다.
일제 강점 아래 부평에는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기계를 만들었던 삼릉 군수공장, 일본 육군의 전쟁 무기를 생산하던 조병창, 조병창 인근의 대규모 군수공장과 하청공장까지 있었다. 우리 조선인은 이곳에 강제 동원되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혹은 일본군 징병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은 군수공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사정을 이규원의 소설 <해방공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천구백사십오년 팔월십오일, 정오.
서울과 인천을 이어놓은 식민도로 - 말하기를 산업도로를 앞에 끼고
부평평야에 풍덩 주저앉은 이 군수공장은 거무하에 들여올 역사적 통곡도로 모르고
압박과 착취의 고역을 계속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_ 이규원 소설 <해방공장> 중
강제동원 흔적 부수지 말고 보존해야
▲ 삼릉 줄사택 주변은 아직도 ‘삼릉’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재형
해방 후 삼릉공장 징용 노동자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다. 줄사택은 민간에 매각되었고 그 중 일부가 현재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줄사택 지역은 한자 발음 ‘삼릉’(三菱)으로 계속 불리고 있다. 인천 동수역 이름이 자칫 삼릉역이 될 뻔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3.1운동 100주년이 됐지만 부평구 부영로 21-127번지 일대는 ‘삼릉’으로 불리는, 어쩌면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공간이다. 떡방앗간, 반찬가게 등이 아직도 삼능(삼릉)이란 상호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이곳은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국내 강제동원 흔적을 간직한 유일한 곳이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는 줄사택들은 재개발 사업으로 곧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다. 따라서 현재 남겨진 노동자와 근대 문화유산으로 줄사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줄사택을 어떻게 다뤄야할까?
▲ 부평공원에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상 ⓒ이재형
적산가옥에는 일제 강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부끄러운 역사적 공간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부수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서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이곳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기억하기 위해 일부 줄사택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물론 전면 철거 후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다. 2017년 8월에는 미쓰비시 제강 공장이 있었던 부평공원에 국내 최초의 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어두운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삼능 줄사택을 한두 채 정도 남겨두면 어떨까?
취재를 하는 동안 삼릉 줄사택 좁은 골목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하며 노는 아이들 소리가 내내 들리는 듯했다. 이곳에 살며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는 힘들게 자식들을 키웠다. 이런 곳이 개발 논리에 밀려 하나씩 헐려버린다면 우리의 아픈 역사와 빛바랜 추억도 그만큼의 속도로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 공간 정보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영로 21-127번지
인천 1호선 동수역에서 약 330미터 도보 이동
○ 관련 링크
부평역사박물관 미쓰비시 줄사택 전시
인천광역시 부평구 굴포로 151
홈페이지 : http://www.bphm.or.kr/
개관시간 : 09:00~18:00 (관람료 : 무료)
사진 촬영_ⓒ이재형
2018, 2019 [인문쟁이 4,5기]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삼릉, 그 잊혀져가는 아픔을 찾아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미술관 속 심리학- 평면에 움직임을 담다
인문쟁이 김민정
사라봉에서 만난 100년 등대이야기
인문쟁이 배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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