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한 총천연색들로 칠해진 벽. 그 위에 그려진 날개, 하트, 꽃 따위의 그림들.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국내 곳곳의 벽화골목을 찾아 사진까지 남기는 이유는, 아마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아름다운 것들이 벽 위를 가득 수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회기동에 산다. 놀랍게도 이곳에도 벽화골목이 있다. 하지만 경희대 정문에서 청량초등학교 근처까지 이어지는 골목을 ‘벽화골목’이라 칭하기에는 어딘가 민망한 구석이 있다. 벽화 대부분이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이곳저곳 지워지고 뜯어진데다, 그마저도 식당 쓰레기통 근처에 있어 가까이 다가가기에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이 골목의 벽화들이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기동 벽화골목에는 분명 특별한 매력이 있다. 이곳엔 ‘보기 좋은’ 그림보다는 ‘보아야 하는’ 그림들이 있다. 청춘의 무기력함, 입시위주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환경오염 문제 등. 불편해서 눈감고 싶은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색을 입고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이 곳. 말하자면 불안하고 날카로워서, 보고 있자면 우울하고 뼈아파서. 그게 꼭 청춘 같아서. 그래서 나는 회기동 벽화골목을 좋아한다.
그렇게도 치열했던 노력의 끝, 다시 시작되는 고민들
▲ 조기교육 열풍을 풍자하는 벽화 ⓒ김정은
<아기공룡 둘리>의 주인공들이 한 데 모인 벽화. 하지만 어쩐지 다들 표정이 씁쓸해 보인다.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도 무시한 채 공부에만 열중하는 아기 희동이와 그를 감시하는 듯한 고길동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과열된 조기교육 열풍을 담아내고 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대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달려온 청년들. 그렇다면 이 과정을 모두 겪어내고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는 이들은 그 노력의 대가를 만끽하고 있을까. 슬프지만 모두 알고 있듯, 이에 대한 대답은 ‘NO’다.
▲ 학사모와 유니폼 모자, 학사모를 쓴 청년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김정은
행복한 얼굴로 학사모를 공중 위로 던지는 남자.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점점 굳고, 날아간 학사모는 패스트푸드점 유니폼 모자가 되어 그의 머리 위에 씌워진다. 이런 현실을 알고 있는 청년은 학사모를 쓴 채 기뻐하기보다는 끝없이 고뇌할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고등교육의 졸업은 끝이 아닌 또 다른 고민의 시작이다.
약자들을 위한 작지만 큰 외침
▲ 바리게이트 앞에서 손을 맞잡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김정은
패스트푸드점 직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마트 직원, 경비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결연한 얼굴로 굳건히 서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처져있는 사회의 벽과 같은 바리게이트. 가슴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굳게 손을 맞잡은 그들의 뜨거운 연대는 내일의 희망을 꿈꾸게 한다.
▲ 다국적 커피기업과 커피노동자 ⓒ김정은
공정 무역 이슈를 다룬 벽화. 4,000원짜리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사도, 다국적 커피기업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제하면 아프리카의 커피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매우 적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 벽화에서 불과 몇 걸음만 걸으면, 다국적 커피 기업의 카페들이 즐비한 대로변이 나온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너, 숨은 쉬고 다니냐?
▲ 산소호흡기를 쓴 갓난 아기 ⓒ김정은
산소호흡기를 쓰고, 그것이 불편한지 뒤척이는듯한 갓난아기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미세먼지 대란’을 떠올리게 한다. 우린 요즘 정말 숨은 쉬고 다니는지, 미래의 아이들에게 이만큼의 숨이라도 전해줄 수 있을는지. 씁쓸한 생각은 깊어간다.
그래도 색 色있는 내일을 꿈꾸는 젊음
▲ 회전목마로부터의 탈출 ⓒ김정은
“그럼에도 우리는 색色있는 내일을 꿈꾼다.”
무채색의 칙칙한 벽화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유독 화사하게 빛나던 이 벽화는 이렇게 외치는듯하다. 매일 같은 자리를 반복해 도는 회전목마 속에 갇히기보다는, 그곳에서 뛰쳐나와 나만의 색을 찾겠다는 젊음의 소리는 힘든 현실에서도 유효하다.
회기동 벽화골목의 그림들은 지난 2009년부터 2012년까지 경희대학교 미대생들의 ‘공공미술프로젝트’ 수업의 일환으로 그려졌다. 4년여간 꾸준히 이어졌던 프로젝트가 멈추고 벽화들이 방치된 지도 어느덧 7년이 지났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외침으로 가득 찬 이 곳. ‘인생 샷’은 못 건져도 ‘인생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 곳. 존재만으로 소중한 회기동 벽화골목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 번 모아지길 바라본다.
아는 것이 꽤 있고 모르는 것은 정말 많은, 가끔 어른스럽고 대개 철이 없는 스물넷. 말이 좀 많고 생각은 더 많다. 이유없이 들뜨고 가슴이 설렐 때, 조급함과 불안감에 가슴이 답답할 때 모두 글을 쓴다. 때때로 물안개같이 느껴지는 삶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글을 쓸 때의 내가 가장 사람답다는 것.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람다워지고싶어 인문쟁이에 지원했다.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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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고 날카로운, 그래서 청춘
회기동 벽화골목
인문쟁이 김정은
2019-05-14
알록달록한 총천연색들로 칠해진 벽. 그 위에 그려진 날개, 하트, 꽃 따위의 그림들.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국내 곳곳의 벽화골목을 찾아 사진까지 남기는 이유는, 아마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아름다운 것들이 벽 위를 가득 수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회기동에 산다. 놀랍게도 이곳에도 벽화골목이 있다. 하지만 경희대 정문에서 청량초등학교 근처까지 이어지는 골목을 ‘벽화골목’이라 칭하기에는 어딘가 민망한 구석이 있다. 벽화 대부분이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이곳저곳 지워지고 뜯어진데다, 그마저도 식당 쓰레기통 근처에 있어 가까이 다가가기에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이 골목의 벽화들이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기동 벽화골목에는 분명 특별한 매력이 있다. 이곳엔 ‘보기 좋은’ 그림보다는 ‘보아야 하는’ 그림들이 있다. 청춘의 무기력함, 입시위주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환경오염 문제 등. 불편해서 눈감고 싶은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색을 입고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이 곳. 말하자면 불안하고 날카로워서, 보고 있자면 우울하고 뼈아파서. 그게 꼭 청춘 같아서. 그래서 나는 회기동 벽화골목을 좋아한다.
그렇게도 치열했던 노력의 끝, 다시 시작되는 고민들
▲ 조기교육 열풍을 풍자하는 벽화 ⓒ김정은
<아기공룡 둘리>의 주인공들이 한 데 모인 벽화. 하지만 어쩐지 다들 표정이 씁쓸해 보인다.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도 무시한 채 공부에만 열중하는 아기 희동이와 그를 감시하는 듯한 고길동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과열된 조기교육 열풍을 담아내고 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대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달려온 청년들. 그렇다면 이 과정을 모두 겪어내고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는 이들은 그 노력의 대가를 만끽하고 있을까. 슬프지만 모두 알고 있듯, 이에 대한 대답은 ‘NO’다.
▲ 학사모와 유니폼 모자, 학사모를 쓴 청년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김정은
행복한 얼굴로 학사모를 공중 위로 던지는 남자.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점점 굳고, 날아간 학사모는 패스트푸드점 유니폼 모자가 되어 그의 머리 위에 씌워진다. 이런 현실을 알고 있는 청년은 학사모를 쓴 채 기뻐하기보다는 끝없이 고뇌할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고등교육의 졸업은 끝이 아닌 또 다른 고민의 시작이다.
약자들을 위한 작지만 큰 외침
▲ 바리게이트 앞에서 손을 맞잡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김정은
패스트푸드점 직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마트 직원, 경비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결연한 얼굴로 굳건히 서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처져있는 사회의 벽과 같은 바리게이트. 가슴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굳게 손을 맞잡은 그들의 뜨거운 연대는 내일의 희망을 꿈꾸게 한다.
▲ 다국적 커피기업과 커피노동자 ⓒ김정은
공정 무역 이슈를 다룬 벽화. 4,000원짜리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사도, 다국적 커피기업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제하면 아프리카의 커피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매우 적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 벽화에서 불과 몇 걸음만 걸으면, 다국적 커피 기업의 카페들이 즐비한 대로변이 나온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너, 숨은 쉬고 다니냐?
▲ 산소호흡기를 쓴 갓난 아기 ⓒ김정은
산소호흡기를 쓰고, 그것이 불편한지 뒤척이는듯한 갓난아기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미세먼지 대란’을 떠올리게 한다. 우린 요즘 정말 숨은 쉬고 다니는지, 미래의 아이들에게 이만큼의 숨이라도 전해줄 수 있을는지. 씁쓸한 생각은 깊어간다.
그래도 색 色있는 내일을 꿈꾸는 젊음
▲ 회전목마로부터의 탈출 ⓒ김정은
“그럼에도 우리는 색色있는 내일을 꿈꾼다.”
무채색의 칙칙한 벽화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유독 화사하게 빛나던 이 벽화는 이렇게 외치는듯하다. 매일 같은 자리를 반복해 도는 회전목마 속에 갇히기보다는, 그곳에서 뛰쳐나와 나만의 색을 찾겠다는 젊음의 소리는 힘든 현실에서도 유효하다.
회기동 벽화골목의 그림들은 지난 2009년부터 2012년까지 경희대학교 미대생들의 ‘공공미술프로젝트’ 수업의 일환으로 그려졌다. 4년여간 꾸준히 이어졌던 프로젝트가 멈추고 벽화들이 방치된 지도 어느덧 7년이 지났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외침으로 가득 찬 이 곳. ‘인생 샷’은 못 건져도 ‘인생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 곳. 존재만으로 소중한 회기동 벽화골목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 번 모아지길 바라본다.
○ 공간 정보
위치 : 서울 회기동 경희대 정문에서 회기역 방향으로 가는 일대
○ 사진 촬영_김정은
2019 [인문쟁이 5기]
아는 것이 꽤 있고 모르는 것은 정말 많은, 가끔 어른스럽고 대개 철이 없는 스물넷. 말이 좀 많고 생각은 더 많다. 이유없이 들뜨고 가슴이 설렐 때, 조급함과 불안감에 가슴이 답답할 때 모두 글을 쓴다. 때때로 물안개같이 느껴지는 삶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글을 쓸 때의 내가 가장 사람답다는 것.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람다워지고싶어 인문쟁이에 지원했다.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길 소망한다.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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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잡동산이
인문쟁이 김경민
‘그림의 본으로 삶의 본이 되다’
인문쟁이 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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