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 150호로 지정된 익산의 미륵사지는 한국 최대의 사찰로 평가되고 있으며, 유네스코에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등록되어 있는 곳이다.
미륵사의 창건 설화
『삼국유사』에는 미륵사 창건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로도 유명하다.미륵사의 창건 설화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은 어릴 때 홀어머니와 시골에서 마를 캐면서 살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의 ‘맛둥(薯童)’으로 불렀다. 어느 날, 맛둥이가 신라의 공주가 무척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꾀를 내었다. 맛둥이는 마을의 아이들을 마로 매수해 선동과 날조(?)로 가득 찬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가 얼마나 귀에 잘 감겼는지 삽시간에 신라왕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다.(이 노래가 유명한 ‘서동요’다.) 자신의 딸이 밤에 몰래 이런저런 행동을 하고 다녔다는 것에 기가 찼는지, 아니면 왕가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신라왕은 선화공주를 궁에서 쫒아내었다.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맛둥이는 선화공주를 데려오고 자신이 지은 노래를 기정사실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요즘 시대에 이런 일이 애초에 일어나기 만무하지만 옛날이야기니 넘어가자) 이후 여러 사건과 시간이 흘러 맛둥이는 백제의 왕이 되었고 선화공주는 왕비가 되었다. 어느 날 왕과 왕비가 사자사(獅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발견하고는 왕비의 부탁에 따라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과 금당, 회당을 세웠다고 한다.
▲ Ⓒ국립익산박물관 홈페이지<출처: (재)백제세계유산센터>
한국 복원사(史)의 빛과 그림자
절터가 발견될 당시 이 지역에는 마을과 논밭이 있었는데, 마을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이라 학자들은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였으리라. 그리고 ‘1금당 1탑’이라는 종래의 원칙을 과감히 무시하고 ‘3금당 3탑’이라는 혁신적인 형태로 지어진 가람배치는 학자들이 미륵사가 사실 3개의 사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게 만들었다. 미륵사 터에는 목탑, 동탑, 동‧서 금당과 회랑의 터가 있으나 오직 서탑만이 홀로 서 있었다. 학자들은 오랜 연구기간을 거치며 목탑이 무려 60M에 달할 것이라 추측했고 서탑의 비율 등을 참조한다면 9층 석탑이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1991년 당시 거의 모든 문화재위원들이 고증이 불가능하다며 반대했으나, 오직 상상에 맡긴 채 동탑을 복원하였다. 고대에는 일일이 손으로 했을 작업들을 기계를 가지고 일괄적으로 수행하니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작업이 시작된 지 불과 2년만인 1993년, 동탑의 복원을 세상에 알렸다. 복원된 동탑은 매끄러운 화강암과 자로 잰 듯 날렵한 선을 보이며 고대의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을 현대적인 인공미를 뽐내었다. 옆의 투박한 서탑과 함께 있는 모습은 관람하는 사람들에게도 부조화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도 이를 ‘20세기 최악의 복원 사례’로 평가하였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 복원에 있어서는 최고의 반면교사라고 할 수 있겠다.
비판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복원이 필요해진 서탑의 보수는 신중을 기해서 이루어졌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자, 정림사지 5층 석탑과 함께 거의 유일한 백제의 건축물인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9층 목탑의 형식을 띈 석탑이었으나, 벼락을 맞아 크게 훼손되어 6층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에 무너진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보존하였다. (흔히 일본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의 시멘트 처리를 유물훼손이라며 비판하지만 당시의 기술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지적을 받고 1999년에 복원작업을 결정하였다.
▲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동)의 모습 Ⓒ김경민,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서)의 모습 Ⓒ김경민
2001년 본격적인 해체 및 복원 작업을 시작하였다. 동탑의 전적이 있었기에 철저한 고증과 신중을 기한 작업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고, 18년만인 2019년 4월 드디어 민간에게 복원된 모습을 선보였다. 종래 6층만 남아 있던 점을 살려 그 윗부분은 상상으로 채우지 않았으며, 해체 때 나온 기존의 부재를 최대한 사용하여 복원이라는 의미를 크게 살렸다. 서탑의 복원은 세계에서도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되며, 특히 복원이 한창 진행될 때인 2017년에 앙코르 유적 복원 관계자들이 미륵사지를 방문하여 기술을 배워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복원의 좋은 사례와 좋지 않은 사례가 한 곳에 있으니 미륵사지를 복원사의 참된 교실로 봐도 무방하다.
새로 쓰는 잡동산이
익산 미륵사지
인문쟁이 김경민
2019-05-08
사적 제 150호로 지정된 익산의 미륵사지는 한국 최대의 사찰로 평가되고 있으며, 유네스코에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등록되어 있는 곳이다.
미륵사의 창건 설화
『삼국유사』에는 미륵사 창건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로도 유명하다.미륵사의 창건 설화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은 어릴 때 홀어머니와 시골에서 마를 캐면서 살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의 ‘맛둥(薯童)’으로 불렀다. 어느 날, 맛둥이가 신라의 공주가 무척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꾀를 내었다. 맛둥이는 마을의 아이들을 마로 매수해 선동과 날조(?)로 가득 찬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가 얼마나 귀에 잘 감겼는지 삽시간에 신라왕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다.(이 노래가 유명한 ‘서동요’다.) 자신의 딸이 밤에 몰래 이런저런 행동을 하고 다녔다는 것에 기가 찼는지, 아니면 왕가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신라왕은 선화공주를 궁에서 쫒아내었다.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맛둥이는 선화공주를 데려오고 자신이 지은 노래를 기정사실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요즘 시대에 이런 일이 애초에 일어나기 만무하지만 옛날이야기니 넘어가자) 이후 여러 사건과 시간이 흘러 맛둥이는 백제의 왕이 되었고 선화공주는 왕비가 되었다. 어느 날 왕과 왕비가 사자사(獅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발견하고는 왕비의 부탁에 따라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과 금당, 회당을 세웠다고 한다.
▲ Ⓒ국립익산박물관 홈페이지<출처: (재)백제세계유산센터>
한국 복원사(史)의 빛과 그림자
절터가 발견될 당시 이 지역에는 마을과 논밭이 있었는데, 마을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이라 학자들은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였으리라. 그리고 ‘1금당 1탑’이라는 종래의 원칙을 과감히 무시하고 ‘3금당 3탑’이라는 혁신적인 형태로 지어진 가람배치는 학자들이 미륵사가 사실 3개의 사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게 만들었다. 미륵사 터에는 목탑, 동탑, 동‧서 금당과 회랑의 터가 있으나 오직 서탑만이 홀로 서 있었다. 학자들은 오랜 연구기간을 거치며 목탑이 무려 60M에 달할 것이라 추측했고 서탑의 비율 등을 참조한다면 9층 석탑이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1991년 당시 거의 모든 문화재위원들이 고증이 불가능하다며 반대했으나, 오직 상상에 맡긴 채 동탑을 복원하였다. 고대에는 일일이 손으로 했을 작업들을 기계를 가지고 일괄적으로 수행하니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작업이 시작된 지 불과 2년만인 1993년, 동탑의 복원을 세상에 알렸다. 복원된 동탑은 매끄러운 화강암과 자로 잰 듯 날렵한 선을 보이며 고대의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을 현대적인 인공미를 뽐내었다. 옆의 투박한 서탑과 함께 있는 모습은 관람하는 사람들에게도 부조화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도 이를 ‘20세기 최악의 복원 사례’로 평가하였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 복원에 있어서는 최고의 반면교사라고 할 수 있겠다.
비판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복원이 필요해진 서탑의 보수는 신중을 기해서 이루어졌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자, 정림사지 5층 석탑과 함께 거의 유일한 백제의 건축물인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9층 목탑의 형식을 띈 석탑이었으나, 벼락을 맞아 크게 훼손되어 6층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에 무너진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보존하였다. (흔히 일본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의 시멘트 처리를 유물훼손이라며 비판하지만 당시의 기술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지적을 받고 1999년에 복원작업을 결정하였다.
▲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동)의 모습 Ⓒ김경민,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서)의 모습 Ⓒ김경민
2001년 본격적인 해체 및 복원 작업을 시작하였다. 동탑의 전적이 있었기에 철저한 고증과 신중을 기한 작업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고, 18년만인 2019년 4월 드디어 민간에게 복원된 모습을 선보였다. 종래 6층만 남아 있던 점을 살려 그 윗부분은 상상으로 채우지 않았으며, 해체 때 나온 기존의 부재를 최대한 사용하여 복원이라는 의미를 크게 살렸다. 서탑의 복원은 세계에서도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되며, 특히 복원이 한창 진행될 때인 2017년에 앙코르 유적 복원 관계자들이 미륵사지를 방문하여 기술을 배워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복원의 좋은 사례와 좋지 않은 사례가 한 곳에 있으니 미륵사지를 복원사의 참된 교실로 봐도 무방하다.
장소 정보
2019 [인문쟁이 5기]
1994년 6월생. 평소에 역사를 좋아해 '역사 덕후'로도 불리며 그의 가방속에는 항상 역사책이 있다고한다. 현재 '역사콘텐츠제작팀 광희'의 일원으로써 광주,전남의 역사를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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