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라는 노래 가사처럼 다수의 지역을 방문할 때 거쳐 가는 대전은 그야말로 철도의 심장부라 할 만하다. 대전시민의 역사와 애환, 추억을 담고 오늘날까지 성장해온 대전역. 바로 이곳에서 대전시민의 추억과 지역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진행 중이다. 대전역의 탄생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는 전시 ‘1905년 대전역을 만나다’를 통해 1905년 당시의 대전역을 2019년도에 생생히 만나볼 수 있다.
▲2004년 대전역광장 (대전시청)
▲1905년 대전역을 만나다 전시
도시의 변천사와 함께해온 대전역
조선의 대유학자 송시열의 남간정사, 동춘당 등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증명하듯 조선 시대 충청지방을 대표하는 도시는 회덕(현재 대전시 대덕구)이었다. 대전은 삼대 하천으로 둘러싸여 비가 많이 오면 침수되는 일이 잦았고,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지형으로 조선 시대까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살던 도시가 아니었다.
대전역은 일본 철도공사 종사자들이 대전역 주변에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다. 역 건설과 동시에 이곳에는 근대화의 움직임이 움텄고, 이윽고 대전은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대전역의 철도가 처음 운행한 1904년, 경부철도와 호남철도의 정식 개통으로 마침내 도시다운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후기 충청도의 중심지였던 회덕 군청(1910년)과 공주에 있던 충남 도청이(1932년)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대전은 근현대 중심도시로의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대전역의 등장은 지역의 지리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지역 어르신들에게서 전해 들을 수 있는 ‘소제호’라는 아름다운 호수도 역 건립 과정에서 모습을 감췄다. 여의도 광장만큼 넓었다는 소재호는 우암사적공원으로 옮겨진 기국정이 있던 곳으로 연꽃이 한가득 피어있었으며, 그곳에 송시열의 옛집이 있었다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조선인들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던 곳이었기에 더욱 이곳을 메워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어르신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다소 급작스러운 대전역 개통의 뒷배경에는 러일전쟁과 더불어 일제의 수탈에 이용된 아픔이 서려 있다.
▲1905년 대전역을 만나다 전시
▲대전역에 내린 마지막 황제 순종 / 순종황제가 대전에 내린 칙유 [대한제국 관보] 1909.1.16. (대전시청)
전시된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 자료 사이에서 1909년 대한 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대전역을 방문했던 당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일제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적개심을 완화할 목적으로 순종을 서울, 대전, 부산을 거쳐 마산에 도착하는 남순행길에 오르게 한다. 그러나 일제의 계획은 오히려 백성들은 마음을 자극하여 일장기를 훼손하고 순종을 향해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순종이 백성들에게 남긴 말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1월 13일 대 황제 폐하께서 충청남도 회덕군 대전역에 잠시 머무니 도내 관리와 유생을 소견하실 때의 칙유는 다음과 같다. 부화를 제거하고 실용에 힘쓰고, 풍속과 교화를 바로잡고 편리하게 하여 나라와 근본을 공고히 하라” (대한 제국 관보 1909.1.16.)
▲근대 대전역사 [조선의 사정] 1922 (대전시청)
흘러온 세월을 품고 오늘날까지 우리 곁을 지킨 공간
대전역은 그 당시 일본 건축양식의 특징을 그대로 따라 축조되었는데, 목조 단층 구조로 서양 고전 양식과 일본 목조 양식이 결합된 것이 특징이다. 1915년 건축된 대구역사와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18년에 건축된 대전역사는 나란한 건축 시기만큼 그 모양새도 비슷하다. 일본 건축 양식대로 지어진 대전역은 6·25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남아있는 사진 자료를 통해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전역 동광장에 있는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현재영 보조기관사 동상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의 상흔은 대전역도 피해갈 수 없었다. 대전이 연합군에게 탈환된 1950년 9월 29일, 미군이 북한군 거점기지를 폭격하면서 역과 인근 지역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폐허가 되었다. 현재 대전역 동광장에는 김재현(1923~1952) 기관사의 동상이 있다. 전쟁 포로가 된 미군을 구출시키는 작전에 투입되었던 청년 기관사는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8발의 총탄을 맞고 28세의 나이로 순국해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대전 현충원에서는 김재현 기관사가 운영한 3-129호 증기기관차가 전시되어 있어 그때의 참혹한 상황과 누군가의 고귀한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대전발 0시 50분 / 대전 블루스
오래전부터 역이라는 공간은 대중의 삶 속에서 문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할 정도로 친숙한 장소 중 하나였다. 대전역 역시 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대전발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대전 블루스라는 가요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영화 ‘대전발 0시 50분’이 개봉된 후 가락국수는 대전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대전역에서 호남선을 타기 위해 기차선로 변경 작업을 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이 시간에 잠시 내려 가락국수를 먹는 손님들로 가락국수 가게에는 그야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간혹 추억의 사진 속에는 가락국수를 먹다가 기차를 놓치는 명장면이 있기도 하다.
▲부산행 서울행 무궁화호
대전이라는 도시를 성장시킨 시작점이자 근대역사와 추억을 간직한 대전역. 오늘도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이곳에는 대전 방문의 해인 2019년을 맞아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하리라 예상된다. 어느 여행자의 발길이 이곳에 새로이 와닿을 때 오랜 역사와 추억을 공유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대전역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기를 바라본다.
대전역이 품어 온 기억을 다시 마주하다.
대전역의 역사를 만나다.
인문쟁이 양재여
2019-02-25
▲대전역 광장 정면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라는 노래 가사처럼 다수의 지역을 방문할 때 거쳐 가는 대전은 그야말로 철도의 심장부라 할 만하다. 대전시민의 역사와 애환, 추억을 담고 오늘날까지 성장해온 대전역. 바로 이곳에서 대전시민의 추억과 지역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진행 중이다. 대전역의 탄생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는 전시 ‘1905년 대전역을 만나다’를 통해 1905년 당시의 대전역을 2019년도에 생생히 만나볼 수 있다.
▲2004년 대전역광장 (대전시청)
▲1905년 대전역을 만나다 전시
도시의 변천사와 함께해온 대전역
조선의 대유학자 송시열의 남간정사, 동춘당 등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증명하듯 조선 시대 충청지방을 대표하는 도시는 회덕(현재 대전시 대덕구)이었다. 대전은 삼대 하천으로 둘러싸여 비가 많이 오면 침수되는 일이 잦았고,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지형으로 조선 시대까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살던 도시가 아니었다.
대전역은 일본 철도공사 종사자들이 대전역 주변에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다. 역 건설과 동시에 이곳에는 근대화의 움직임이 움텄고, 이윽고 대전은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대전역의 철도가 처음 운행한 1904년, 경부철도와 호남철도의 정식 개통으로 마침내 도시다운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후기 충청도의 중심지였던 회덕 군청(1910년)과 공주에 있던 충남 도청이(1932년)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대전은 근현대 중심도시로의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대전역의 등장은 지역의 지리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지역 어르신들에게서 전해 들을 수 있는 ‘소제호’라는 아름다운 호수도 역 건립 과정에서 모습을 감췄다. 여의도 광장만큼 넓었다는 소재호는 우암사적공원으로 옮겨진 기국정이 있던 곳으로 연꽃이 한가득 피어있었으며, 그곳에 송시열의 옛집이 있었다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조선인들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던 곳이었기에 더욱 이곳을 메워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어르신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다소 급작스러운 대전역 개통의 뒷배경에는 러일전쟁과 더불어 일제의 수탈에 이용된 아픔이 서려 있다.
▲1905년 대전역을 만나다 전시
▲대전역에 내린 마지막 황제 순종 / 순종황제가 대전에 내린 칙유 [대한제국 관보] 1909.1.16. (대전시청)
전시된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 자료 사이에서 1909년 대한 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대전역을 방문했던 당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일제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적개심을 완화할 목적으로 순종을 서울, 대전, 부산을 거쳐 마산에 도착하는 남순행길에 오르게 한다. 그러나 일제의 계획은 오히려 백성들은 마음을 자극하여 일장기를 훼손하고 순종을 향해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순종이 백성들에게 남긴 말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1월 13일 대 황제 폐하께서 충청남도 회덕군 대전역에 잠시 머무니 도내 관리와 유생을 소견하실 때의 칙유는 다음과 같다.
부화를 제거하고 실용에 힘쓰고, 풍속과 교화를 바로잡고 편리하게 하여 나라와 근본을 공고히 하라”
(대한 제국 관보 1909.1.16.)
▲근대 대전역사 [조선의 사정] 1922 (대전시청)
흘러온 세월을 품고 오늘날까지 우리 곁을 지킨 공간
대전역은 그 당시 일본 건축양식의 특징을 그대로 따라 축조되었는데, 목조 단층 구조로 서양 고전 양식과 일본 목조 양식이 결합된 것이 특징이다. 1915년 건축된 대구역사와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18년에 건축된 대전역사는 나란한 건축 시기만큼 그 모양새도 비슷하다. 일본 건축 양식대로 지어진 대전역은 6·25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남아있는 사진 자료를 통해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전역 동광장에 있는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현재영 보조기관사 동상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의 상흔은 대전역도 피해갈 수 없었다. 대전이 연합군에게 탈환된 1950년 9월 29일, 미군이 북한군 거점기지를 폭격하면서 역과 인근 지역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폐허가 되었다. 현재 대전역 동광장에는 김재현(1923~1952) 기관사의 동상이 있다. 전쟁 포로가 된 미군을 구출시키는 작전에 투입되었던 청년 기관사는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8발의 총탄을 맞고 28세의 나이로 순국해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대전 현충원에서는 김재현 기관사가 운영한 3-129호 증기기관차가 전시되어 있어 그때의 참혹한 상황과 누군가의 고귀한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대전발 0시 50분 / 대전 블루스
오래전부터 역이라는 공간은 대중의 삶 속에서 문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할 정도로 친숙한 장소 중 하나였다. 대전역 역시 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대전발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대전 블루스라는 가요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영화 ‘대전발 0시 50분’이 개봉된 후 가락국수는 대전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대전역에서 호남선을 타기 위해 기차선로 변경 작업을 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이 시간에 잠시 내려 가락국수를 먹는 손님들로 가락국수 가게에는 그야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간혹 추억의 사진 속에는 가락국수를 먹다가 기차를 놓치는 명장면이 있기도 하다.
▲부산행 서울행 무궁화호
대전이라는 도시를 성장시킨 시작점이자 근대역사와 추억을 간직한 대전역. 오늘도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이곳에는 대전 방문의 해인 2019년을 맞아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하리라 예상된다. 어느 여행자의 발길이 이곳에 새로이 와닿을 때 오랜 역사와 추억을 공유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대전역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기를 바라본다.
장소 정보
2019 [인문쟁이 4기, 5기]
대전의 골목 골목을 거닐고 대전의 잊혀져가는 곳을 기록하고 대전의 축억을 기록하는 대전을 사랑하는 아주매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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