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아이를 재울 때 부르는 자장가다. 제주인들은 이 민요를 ‘아기구덕 흥그는(흔드는) 소리’라고 한다. 아기구덕은 제주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아기를 그 속에 눕히고 흔들어 잠재우는 일종의 요람이다. 대나무를 쪼개 만드는 아기구덕은 60~70년대까지 만해도 최적의 육아 도구였다.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죽세공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가 있다.
그에게는 생계, 우리에게는 역사가 된
11살 소년의 결심
서귀포시 호근동에 사는 오영희 할아버지(78). 서귀포시 토평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을 전체가 죽세공예 단지로 조성되었고, 가족과 이웃 주민들로부터 아기구덕, 차롱, 해녀의 물질에 쓰는 태왁 등 7가지 죽세공예 만드는 것을 배웠다. 그의 나이 11살에 이르자 죽세공만이 유일한 생계수단임을 깨닫고 아버지로부터 본격적인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14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계는 더 힘들어져 어렵게 진학한 중학교를 석 달 만에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돈을 벌면 후에라도 학업은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집념으로 아기구덕, 차롱 등을 만드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제법 기술이 늘었다.
“어떵허당 보난(어떻게 하다보니) 어린 소년 때부터 재미 붙여 가멍(가면서) 돈벌이도 되여내
혼자 아기구덕이랑 차롱을 집안마루에서 아니면 올레길에서 만들어 왔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조금씩 변하더니, 이내 사람들의 삶도 달라졌다. 덩달아 아기 키우는 방법도 바뀌었다. 아기를 재울 때 손이나 발로 계속 흔들어야 해서 영 번거롭던 대나무 아기구덕 대신 쇠구덕이 나오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토평리의 죽세공단지 규모도 점차 줄어들었다. 유일한 생계수단이 위협받게 되자 오영희 할아버지는 20년간 살아온 마을을 떠나 외가인 서귀포시 호근동으로 터를 옮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할아버지는 호근동서 산다.
“내가 생을 마치면 아기구덕은 영원히 사라져 버림직 허여
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우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기구덕을 만든다. 때때로 많은 공예품 주문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오면 아내 김정선 할머니(80)의 조력을 받으며 집안 내 마루 공간이나 앞길에 난 올레길 모퉁이에서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인다.
아기구덕만큼은 제주도 내에서 할아버지의 솜씨를 따를 사람이 없다. 이틀이면 아기구덕 두 개는 거뜬히 만든다. 재료는 자신이 손수 제주도 내 구좌읍 송당리, 표선 성읍리 등 곳곳에 흩어져 있는 주요 대나무밭을 찾아 이른바 족대, 수리대라 불리는 대나무를 직접 채취한다. 재료가 없어 아기구덕을 못 만드는 일은 없다.
그렇게 만든 죽세공예품은 제주시내 동문시장의 중간 상인들에게 팔려나가는데, 할아버지는 시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옛날 제주사람처럼 아기를 키워보겠다고 아기구덕을 사는 모습이 그렇게 반갑다.
“경허주만(그렇지만) 내가 정성들여 직접 만든 아기구덕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팔려나가는 생각을 해보면 가슴이 뿌듯해져 마씸(뿌듯합니다).”
요즘 할아버지는 죽세공예가 본인의 대에서 끊길 것 같아 걱정이 많다. 못 배우고 자란 한이 자식들에게 이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저 공부만 열심히 시킨 탓에 자녀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엄두도 내지 않았고, 동네 경로당을 찾아 회원들에게 가르치려 해도 반응들이 탐탁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본인이 생을 마감하면 죽세공예 기능보유자는 물론 죽세공예품도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팔순 나이가 가까워 오난 이 기술을 ‘배워 보쿠다’(배워보겠다)허는 전수자가 나타나지 아니 허여내 언젠가 내가 생을 마치면
아기구덕 등은 영원히 사라져 버림직 허여 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우다(아니 올시다).”
다행히 죽세공예가 오늘로 막을 내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할아버지만은 아니다. 서귀포시에서 죽세공예를 향토무형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향토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 전통공예 제작 과정을 영상과 활자로 기록하여 후대에 전승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체계적인 지원 방안도 구축하게 된다. 다행이다.
죽세공예를 잃지 않도록
과거가 미래로 보낸 사람
아기구덕은 제주인들이 만들어 낸 생활문화유산이다. 과거의 제주 여성들은 아기를 낳고도 몸조리할 여유도 없이 일터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나 밖에서나 아기를 눕혀둘 아기구덕이 꼭 필요했다. 필요에 의해 탄생한 물건인 만큼, 아기구덕은 제주의 생활환경에 꼭 맞는 실용성도 갖추고 있다. 한쪽 발로 구덕을 흔들며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이동할 때에는 아기를 눕힌 채 구덕을 등에 짊어질 수도 있다. 바닥에 내려두기에도 용이하다.
9남매 중 차남인 필자 역시 동생들을 아기구덕에 재워두고 부모님의 일을 도왔던 기억이 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보릿짚의 성긴 틈새로 공기가 드나들어 여름에는 아기의 땀을 씻어주고, 보릿짚 위에 기저귀를 펼쳐두고 아기를 눕히면 더없이 아늑했다. 그 속에서 아기들이 옹알대는 소리를 듣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던가! 상상만 하여도 미소가 흐른다.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일하는 할아버지의 아들은, 다가오는 2020년, 아기구덕, 차롱, 물구덕, 해녀태왁 등 아버지가 평생 만들어온 죽세공예품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그것은 자식 된 도리이기도 하지만, 마치 죽세공예를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팔십 평생을 죽세공예만으로 살아온 오영희라는 삶에 대한 헌정이다.
[제주] 아기구덕 하르방 마씸
죽세공 오영희 할아버지
정신종
2018-09-14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아기 잘도 잔다. 자는 것은 잠소리요, 노는 것은 놈소리라’
제주에서 아이를 재울 때 부르는 자장가다. 제주인들은 이 민요를 ‘아기구덕 흥그는(흔드는) 소리’라고 한다. 아기구덕은 제주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아기를 그 속에 눕히고 흔들어 잠재우는 일종의 요람이다. 대나무를 쪼개 만드는 아기구덕은 60~70년대까지 만해도 최적의 육아 도구였다.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죽세공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가 있다.
그에게는 생계, 우리에게는 역사가 된
11살 소년의 결심
서귀포시 호근동에 사는 오영희 할아버지(78). 서귀포시 토평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을 전체가 죽세공예 단지로 조성되었고, 가족과 이웃 주민들로부터 아기구덕, 차롱, 해녀의 물질에 쓰는 태왁 등 7가지 죽세공예 만드는 것을 배웠다. 그의 나이 11살에 이르자 죽세공만이 유일한 생계수단임을 깨닫고 아버지로부터 본격적인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14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계는 더 힘들어져 어렵게 진학한 중학교를 석 달 만에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돈을 벌면 후에라도 학업은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집념으로 아기구덕, 차롱 등을 만드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제법 기술이 늘었다.
“어떵허당 보난(어떻게 하다보니) 어린 소년 때부터 재미 붙여 가멍(가면서) 돈벌이도 되여내
혼자 아기구덕이랑 차롱을 집안마루에서 아니면 올레길에서 만들어 왔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조금씩 변하더니, 이내 사람들의 삶도 달라졌다. 덩달아 아기 키우는 방법도 바뀌었다. 아기를 재울 때 손이나 발로 계속 흔들어야 해서 영 번거롭던 대나무 아기구덕 대신 쇠구덕이 나오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토평리의 죽세공단지 규모도 점차 줄어들었다. 유일한 생계수단이 위협받게 되자 오영희 할아버지는 20년간 살아온 마을을 떠나 외가인 서귀포시 호근동으로 터를 옮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할아버지는 호근동서 산다.
“내가 생을 마치면 아기구덕은 영원히 사라져 버림직 허여
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우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기구덕을 만든다. 때때로 많은 공예품 주문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오면 아내 김정선 할머니(80)의 조력을 받으며 집안 내 마루 공간이나 앞길에 난 올레길 모퉁이에서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인다.
아기구덕만큼은 제주도 내에서 할아버지의 솜씨를 따를 사람이 없다. 이틀이면 아기구덕 두 개는 거뜬히 만든다. 재료는 자신이 손수 제주도 내 구좌읍 송당리, 표선 성읍리 등 곳곳에 흩어져 있는 주요 대나무밭을 찾아 이른바 족대, 수리대라 불리는 대나무를 직접 채취한다. 재료가 없어 아기구덕을 못 만드는 일은 없다.
그렇게 만든 죽세공예품은 제주시내 동문시장의 중간 상인들에게 팔려나가는데, 할아버지는 시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옛날 제주사람처럼 아기를 키워보겠다고 아기구덕을 사는 모습이 그렇게 반갑다.
“경허주만(그렇지만) 내가 정성들여 직접 만든 아기구덕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팔려나가는 생각을 해보면 가슴이 뿌듯해져 마씸(뿌듯합니다).”
요즘 할아버지는 죽세공예가 본인의 대에서 끊길 것 같아 걱정이 많다. 못 배우고 자란 한이 자식들에게 이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저 공부만 열심히 시킨 탓에 자녀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엄두도 내지 않았고, 동네 경로당을 찾아 회원들에게 가르치려 해도 반응들이 탐탁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본인이 생을 마감하면 죽세공예 기능보유자는 물론 죽세공예품도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팔순 나이가 가까워 오난 이 기술을 ‘배워 보쿠다’(배워보겠다)허는 전수자가 나타나지 아니 허여내 언젠가 내가 생을 마치면
아기구덕 등은 영원히 사라져 버림직 허여 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우다(아니 올시다).”
다행히 죽세공예가 오늘로 막을 내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할아버지만은 아니다. 서귀포시에서 죽세공예를 향토무형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향토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 전통공예 제작 과정을 영상과 활자로 기록하여 후대에 전승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체계적인 지원 방안도 구축하게 된다. 다행이다.
죽세공예를 잃지 않도록
과거가 미래로 보낸 사람
아기구덕은 제주인들이 만들어 낸 생활문화유산이다. 과거의 제주 여성들은 아기를 낳고도 몸조리할 여유도 없이 일터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나 밖에서나 아기를 눕혀둘 아기구덕이 꼭 필요했다. 필요에 의해 탄생한 물건인 만큼, 아기구덕은 제주의 생활환경에 꼭 맞는 실용성도 갖추고 있다. 한쪽 발로 구덕을 흔들며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이동할 때에는 아기를 눕힌 채 구덕을 등에 짊어질 수도 있다. 바닥에 내려두기에도 용이하다.
9남매 중 차남인 필자 역시 동생들을 아기구덕에 재워두고 부모님의 일을 도왔던 기억이 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보릿짚의 성긴 틈새로 공기가 드나들어 여름에는 아기의 땀을 씻어주고, 보릿짚 위에 기저귀를 펼쳐두고 아기를 눕히면 더없이 아늑했다. 그 속에서 아기들이 옹알대는 소리를 듣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던가! 상상만 하여도 미소가 흐른다.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일하는 할아버지의 아들은, 다가오는 2020년, 아기구덕, 차롱, 물구덕, 해녀태왁 등 아버지가 평생 만들어온 죽세공예품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그것은 자식 된 도리이기도 하지만, 마치 죽세공예를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팔십 평생을 죽세공예만으로 살아온 오영희라는 삶에 대한 헌정이다.
한라일보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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