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큰딸이 카톡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생일을 축하해 준 마음씨는 고마웠지만, 이왕이면 손으로 직접 카드를 써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손글씨보다 스마트폰이 더 익숙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한 손으로 스마트폰 자판을 누르는 재빠른 손놀림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러한 IT 세상에서 거꾸로 아날로그를 찾는 이들이 있다. 캘리그라피(Calligraphy)를 통해 손글씨의 맛에 빠진 사람들이다.
경기도 성남시 율동공원에 자리한 책테마파크에서는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 책장 넘기는 소리 대신 은은한 묵향이 퍼진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무료 캘리그라피 강좌에서 먹물을 사용하는 덕분이다. 캘리그라피를 배우는 30명의 수강생은 젊은 세대부터 나이 지긋하신 분들까지 다양한 나이대로 이뤄져 있다. 유례없는 폭염이 계속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붓 하나씩을 들고 땀 흘리며 손 글씨 쓰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은 캘리그라피의 어떤 매력에 빠졌기에 이토록 열심인 것일까?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손으로 그린 문자’란 뜻으로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Calli’에 화풍, 서풍, 서법, 기록법이라는 의미를 지닌 ‘Graphy’가 합쳐진 말이다. 이는 ‘아름다운 서체’란 뜻의 그리스어 ‘Kalligraphia’에서 유래되었다. 요즘에는 영화나 드라마 제목에서 캘리그라피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포스터 디자인의 제목은 물론이고 ‘덕혜옹주를 아십니까?’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라는 영화 속 문구에도 캘리그라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기업로고, 간판, 홍보물, 개인 명함을 제작할 때도 캘리그라피가 인기다. 일반 필체와 필법을 따르는 서예와 달리 개인의 취향과 특성을 살려 쓰는 캘리그라피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글자체다. 나만의 개성을 중시하는 요즘 세태와 딱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수업에서 만난 정성희(58세)씨는 9개월째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있다. “처음에는 글씨를 너무 못써서 예쁘게 쓰고 싶은 마음에 강좌에 참여했는데, 요즘에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공원에 나와 친구도 만나고 글씨도 쓰니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면서 강좌가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캘리그라피에 푹 빠진 수강생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2시간을 훌쩍 넘길 때까지 글씨 삼매경에 빠진다. 특히 방학 시즌에는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특별강좌도 열리는데, 캘리그라피 작업이 집중력과 심리적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올 연말에는 책테마파크에서 캘리그라피 수강생들의 ‘X-Mas 카드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글씨만 쓰는 게 아니라 그림도 같이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아마도 받는 이가 누구든 그 정성에 감탄하지 않을까.
글씨에 감정을 담아내는 하나의 예술
율동공원 책테마파크(성남문화재단)에서는 한국 캘리그라피계의 선구자이자 수많은 영화 제목의 캘리그라피를 써온 유명헌 명장이 최 강사와 함께 수강생을 가르치고 있다. 일대일로 진행되는 도제식 교육을 통해 수강생의 붓을 같이 잡고 어떻게 붓을 그려야 글자체가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나오는지 섬세히 가르치는 모습을 보니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강생 각자의 취향과 특성에 맞는 지도를 해주기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향상된다. 수강생들이 자신만의 느낌을 글자체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놀랄 때가 있다”는 유 명장의 말에는 제자들을 향한 흐뭇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독한 악필인 나는 학창시절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가장 부러워했다. 노트에 글씨를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려 노트를 다 쓸 때쯤에는 종이가 몇 장밖에 남아 있지 않곤 했다. 중국 당나라 시대에는 관리를 뽑을 때 ‘신언서판(身言書判: 인물이 잘나고, 말을 잘하고, 글씨를 잘 쓰고, 사물의 판단을 잘해야 한다)’이라는 4가지 기준이 있었다는데, 만약 그때 태어났더라면 관료가 되는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을 터이다. 하지만 캘리그라피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해도 상관없다. 연필이나 볼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이가 기초부터 하나씩 새로 배워야 한다. 하루하루 열심히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 나만의 예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다.
우스갯소리로 개도 스마트폰을 한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늘날에는 주고받는 문자 속 이모티콘이 감정을 대신할 뿐이다. 이런 시대에 손으로 그리는 캘리그라피는 디지털 세상에서 감정을 담아내는 예술이 아닐까. 유례없는 폭염으로 치열했던 지난 여름을 뒤로하고, 이번 가을에는 책 대신 캘리그라피를 제대로 배워볼까 싶다.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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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라피의 세계, 글씨 쓰는 손맛에 빠져볼까?
인문쟁이 이재형
2018-09-04
며칠 전 큰딸이 카톡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생일을 축하해 준 마음씨는 고마웠지만, 이왕이면 손으로 직접 카드를 써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손글씨보다 스마트폰이 더 익숙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한 손으로 스마트폰 자판을 누르는 재빠른 손놀림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러한 IT 세상에서 거꾸로 아날로그를 찾는 이들이 있다. 캘리그라피(Calligraphy)를 통해 손글씨의 맛에 빠진 사람들이다.
▲ 경기도 성남시 율동공원의 책테마파크 전경 ©이재형
경기도 성남시 율동공원에 자리한 책테마파크에서는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 책장 넘기는 소리 대신 은은한 묵향이 퍼진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무료 캘리그라피 강좌에서 먹물을 사용하는 덕분이다. 캘리그라피를 배우는 30명의 수강생은 젊은 세대부터 나이 지긋하신 분들까지 다양한 나이대로 이뤄져 있다. 유례없는 폭염이 계속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붓 하나씩을 들고 땀 흘리며 손 글씨 쓰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은 캘리그라피의 어떤 매력에 빠졌기에 이토록 열심인 것일까?
▲ 수강생들이 캘리그라피를 쓰기 위해 먹향을 준비하고 있다 ©이재형
▲ 캘리그라피 매력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 ©이재형
내 손으로 아름답게 그린 나만의 문자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손으로 그린 문자’란 뜻으로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Calli’에 화풍, 서풍, 서법, 기록법이라는 의미를 지닌 ‘Graphy’가 합쳐진 말이다. 이는 ‘아름다운 서체’란 뜻의 그리스어 ‘Kalligraphia’에서 유래되었다. 요즘에는 영화나 드라마 제목에서 캘리그라피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포스터 디자인의 제목은 물론이고 ‘덕혜옹주를 아십니까?’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라는 영화 속 문구에도 캘리그라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기업로고, 간판, 홍보물, 개인 명함을 제작할 때도 캘리그라피가 인기다. 일반 필체와 필법을 따르는 서예와 달리 개인의 취향과 특성을 살려 쓰는 캘리그라피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글자체다. 나만의 개성을 중시하는 요즘 세태와 딱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 캘리그라피 손맛에 흠뻑 빠진 수강생 ©이재형
수업에서 만난 정성희(58세)씨는 9개월째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있다. “처음에는 글씨를 너무 못써서 예쁘게 쓰고 싶은 마음에 강좌에 참여했는데, 요즘에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공원에 나와 친구도 만나고 글씨도 쓰니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면서 강좌가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캘리그라피에 푹 빠진 수강생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2시간을 훌쩍 넘길 때까지 글씨 삼매경에 빠진다. 특히 방학 시즌에는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특별강좌도 열리는데, 캘리그라피 작업이 집중력과 심리적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9개월째 캘리그라피에 빠져든 정성희씨 ©이재형
5년째 캘리그라피를 지도하고 있는 최일주 강사는 재능 기부차원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시간을 수업에 할애하고 있다. 성남시 캘리그라피협회 회장이기도 한 최 강사는 원래 도예가다. 그녀 역시 캘리그라피의 매력에 빠져 캘리그라피 전문가가 되었다.
“수강생들에게 캘리그라피를 가르치면서 저 역시 배우고 있어요. 특히 수강생들이 카드나 편지 등 실생활에서 캘리그라피를 활용하는 것을 보면 정말 기쁘죠.”
▲ 성남시 캘리그라피협회 회장인 최일주 강사 ©이재형
올 연말에는 책테마파크에서 캘리그라피 수강생들의 ‘X-Mas 카드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글씨만 쓰는 게 아니라 그림도 같이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아마도 받는 이가 누구든 그 정성에 감탄하지 않을까.
글씨에 감정을 담아내는 하나의 예술
율동공원 책테마파크(성남문화재단)에서는 한국 캘리그라피계의 선구자이자 수많은 영화 제목의 캘리그라피를 써온 유명헌 명장이 최 강사와 함께 수강생을 가르치고 있다. 일대일로 진행되는 도제식 교육을 통해 수강생의 붓을 같이 잡고 어떻게 붓을 그려야 글자체가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나오는지 섬세히 가르치는 모습을 보니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강생 각자의 취향과 특성에 맞는 지도를 해주기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향상된다. 수강생들이 자신만의 느낌을 글자체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놀랄 때가 있다”는 유 명장의 말에는 제자들을 향한 흐뭇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캘리그라피 명장 유명헌씨가 수강생을 지도하고 있다 ©이재형
▲ 유명헌씨가 캘리그라피로 쓴 인문360 ©이재형
지독한 악필인 나는 학창시절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가장 부러워했다. 노트에 글씨를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려 노트를 다 쓸 때쯤에는 종이가 몇 장밖에 남아 있지 않곤 했다. 중국 당나라 시대에는 관리를 뽑을 때 ‘신언서판(身言書判: 인물이 잘나고, 말을 잘하고, 글씨를 잘 쓰고, 사물의 판단을 잘해야 한다)’이라는 4가지 기준이 있었다는데, 만약 그때 태어났더라면 관료가 되는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을 터이다. 하지만 캘리그라피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해도 상관없다. 연필이나 볼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이가 기초부터 하나씩 새로 배워야 한다. 하루하루 열심히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 나만의 예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다.
▲ 캘리그라피는 감정을 담아내는 예술이다 ©이재형
우스갯소리로 개도 스마트폰을 한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늘날에는 주고받는 문자 속 이모티콘이 감정을 대신할 뿐이다. 이런 시대에 손으로 그리는 캘리그라피는 디지털 세상에서 감정을 담아내는 예술이 아닐까. 유례없는 폭염으로 치열했던 지난 여름을 뒤로하고, 이번 가을에는 책 대신 캘리그라피를 제대로 배워볼까 싶다.
사진=이재형
* 공간 소개 및 관련 링크
<책테마파크 캘리그라피 강좌>
장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문정로 145(율동) 책테마파크
수업시간 : 매주 토요일(오전 10시~12시)
분기 1회 수강생 모집. 수업 정원 30명
문의 ☎ 031 708-3588
관련링크 : 홈페이지 http://www.snart.or.kr/web/cms/?MENUMST_ID=21541
카페 https://cafe.naver.com/bookthemepark
장소 정보
2018, 2019 [인문쟁이 4,5기]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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