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 넘쳐나는 거리에서 중년을 훨씬 넘긴 어르신들이 좁은 골목길로 우르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뒤를 쫓아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다방이었다. 실내로 들어서니 미세하게 한약 냄새가 났고 천장에 달린 노란 조명은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며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기 드문 연탄난로와 수족관, 시선을 사로잡는 가지각색의 그림과 소품들은 흐르는 세월을 붙잡아 펼쳐 놓은 듯했다. 한쪽에 마련된 주방에서는 손님을 맞이하고 차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서로 다른 세대를 한데 품은 장소
경상도 말로 ‘길다’를 의미하는 ‘질다’에서 이름이 유래한 대구 진골목. 이곳에 위치한 미도다방은 보통의 다방과는 다른 특별한 구석이 있다. 지금까지 미도다방을 운영하고 계신 정인숙 사장님은 언제나 이곳에서 어르신들의 말벗이 되어드리고 있다.
“1982년 대구중앙치안센터 맞은편 부근에서 ‘도가니’라는 이름으로 다방을 시작했어요.
그때는 다방 이름이 두 개였는데, ‘밀턴 포트’라는 세련된 이름으로도 불렸어요.
이국적인 이름과 분위기 때문에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애초에 어르신들을 위한 다방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다음해에 이름을 ‘미도’로 바꾸었지요”
이름뿐만 아니라 위치도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1991년 현재의 진골목에 자리 잡은 이후 35년 동안은 바람대로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다방이 되었다. 이를 위해 잠시 나이 제한을 둔 적도 있었으나 대구시 관광상품인 근대골목투어코스에 포함되면서 지금은 다시금 젊은이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옛날과자전병과 웨하스가 수북이 담긴 쟁반을 가져다주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머리맡에 항상 놓여 있던 과자전병을 다시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어르신들이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묘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다는 것
이곳에 온 지 10여 분이 지났을까? 어느새 비어 있던 자리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혼자 차를 마시며 조용히 책을 읽거나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논의하는 사람들은 미도다방 안에서 서로 어울려 가며 각각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최근 다른 도시에 있는 다방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손님이 줄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거나 시대의 흐름에 맞게 운영방식을 바꿔 젊은이들이 찾는 다방으로 변모한 곳이 많았다. 하지만 미도다방은 조금 달랐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카페에서 보내는 일상이 자연스럽듯이 어르신들은 늘 그래왔듯 이곳에 들러 예전 모습 그대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지 때 먹으려고 끓인 팥죽인데 한번 드셔 보이소~!
입맛에 아니다 싶으면 설탕 조금 더 넣어서 드시고.”
처음 먹어보는 쌍화차에 정신이 팔려 열심히 홀짝이고 있는 나에게 사장님은 팥죽을 건네주셨다. 어느 인터뷰에서 사장님이 ‘어려웠던 어린 시절 조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다방을 운영한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 말씀처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따끈한 팥죽은 손님이 가득한 테이블마다 차례차례 다정한 마음을 담아 전해지고 있었다.
오늘도 우리는 그곳으로 향한다
“미도다방의 전성기 시절에는 신동집, 김춘수 등 유명 문인들이 이곳에서 배움을 전하기도 하고, 경북 출신 정치인들도 많이 찾았지요.
당시 대구 정계 소식을 알려면 ‘미도다방에 가야 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니.”
미도다방은 변화하는 사회 흐름 속에서도 소통의 장소와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한때 11명이던 종업원은 3명으로 줄었지만, 하루 평균 300~400여 명의 손님이 꾸준히 찾고 있다고 하니 이곳의 미래는 앞으로도 밝아 보인다. 과거의 수많은 문인과 예술인, 정치인부터 다방을 즐겨 찾으시는 동네 어르신까지. 모두의 발길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미도다방으로 향한다.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 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 벌이를 하고 있다. "
[대구] 시민과 문화의 오랜 사랑방
대구 미도다방 정인숙 사장
이경민
2018-06-19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거리에서 중년을 훨씬 넘긴 어르신들이 좁은 골목길로 우르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뒤를 쫓아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다방이었다. 실내로 들어서니 미세하게 한약 냄새가 났고 천장에 달린 노란 조명은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며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기 드문 연탄난로와 수족관, 시선을 사로잡는 가지각색의 그림과 소품들은 흐르는 세월을 붙잡아 펼쳐 놓은 듯했다. 한쪽에 마련된 주방에서는 손님을 맞이하고 차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서로 다른 세대를 한데 품은 장소
경상도 말로 ‘길다’를 의미하는 ‘질다’에서 이름이 유래한 대구 진골목. 이곳에 위치한 미도다방은 보통의 다방과는 다른 특별한 구석이 있다. 지금까지 미도다방을 운영하고 계신 정인숙 사장님은 언제나 이곳에서 어르신들의 말벗이 되어드리고 있다.
“1982년 대구중앙치안센터 맞은편 부근에서 ‘도가니’라는 이름으로 다방을 시작했어요.
그때는 다방 이름이 두 개였는데, ‘밀턴 포트’라는 세련된 이름으로도 불렸어요.
이국적인 이름과 분위기 때문에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애초에 어르신들을 위한 다방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다음해에 이름을 ‘미도’로 바꾸었지요”
이름뿐만 아니라 위치도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1991년 현재의 진골목에 자리 잡은 이후 35년 동안은 바람대로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다방이 되었다. 이를 위해 잠시 나이 제한을 둔 적도 있었으나 대구시 관광상품인 근대골목투어코스에 포함되면서 지금은 다시금 젊은이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옛날과자전병과 웨하스가 수북이 담긴 쟁반을 가져다주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머리맡에 항상 놓여 있던 과자전병을 다시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어르신들이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묘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다는 것
이곳에 온 지 10여 분이 지났을까? 어느새 비어 있던 자리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혼자 차를 마시며 조용히 책을 읽거나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논의하는 사람들은 미도다방 안에서 서로 어울려 가며 각각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최근 다른 도시에 있는 다방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손님이 줄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거나 시대의 흐름에 맞게 운영방식을 바꿔 젊은이들이 찾는 다방으로 변모한 곳이 많았다. 하지만 미도다방은 조금 달랐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카페에서 보내는 일상이 자연스럽듯이 어르신들은 늘 그래왔듯 이곳에 들러 예전 모습 그대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지 때 먹으려고 끓인 팥죽인데 한번 드셔 보이소~!
입맛에 아니다 싶으면 설탕 조금 더 넣어서 드시고.”
처음 먹어보는 쌍화차에 정신이 팔려 열심히 홀짝이고 있는 나에게 사장님은 팥죽을 건네주셨다. 어느 인터뷰에서 사장님이 ‘어려웠던 어린 시절 조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다방을 운영한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 말씀처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따끈한 팥죽은 손님이 가득한 테이블마다 차례차례 다정한 마음을 담아 전해지고 있었다.
오늘도 우리는 그곳으로 향한다
“미도다방의 전성기 시절에는 신동집, 김춘수 등 유명 문인들이 이곳에서 배움을 전하기도 하고, 경북 출신 정치인들도 많이 찾았지요.
당시 대구 정계 소식을 알려면 ‘미도다방에 가야 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니.”
미도다방은 변화하는 사회 흐름 속에서도 소통의 장소와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한때 11명이던 종업원은 3명으로 줄었지만, 하루 평균 300~400여 명의 손님이 꾸준히 찾고 있다고 하니 이곳의 미래는 앞으로도 밝아 보인다. 과거의 수많은 문인과 예술인, 정치인부터 다방을 즐겨 찾으시는 동네 어르신까지. 모두의 발길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미도다방으로 향한다.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 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 벌이를 하고 있다. "
-전상열 시인, 미도다방 -
장소 정보
<아는동네> 객원 작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좀 더 특별하게 바라보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여행자 겸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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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최북단 섬 여행기
인문쟁이 김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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