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거실 책장에는 삼촌과 고모들이 즐겨 읽던 책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나는 지루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층층이 쌓여 있던 책을 골라 읽어보곤 했다. 누렇게 변한 종이 특유의 냄새가 정겨웠고 한글과 한문이 섞인 채 세로로 쓰인 글들은 그 내용은 모르더라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오래된 책을 찾아 읽던 기억은 요즘 서점에서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지금도 길을 걷다가 종이 냄새에 이끌려 책방으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헌책방 골목의 세월은 가고
대구에는 헌책방이 모여 군락을 이룬 곳이 세 군데 있다. 대구시청 주변, 남산동 남문시장 주변, 대구역 사거리 지하도 주변이다. 대구 헌책방 골목은 서울의 청계천, 부산의 보수동, 광주의 동구 계림동보다 10여 년 앞서 형성되었다. 종이가 귀하고 인쇄 기술도 미비했던 그 당시만 하더라도 책 한 권을 사서 대물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형편이 어려웠던 대부분 가정에서 중고 책을 구매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대구시청 주변 도로 양옆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서 있던 150여 개의 헌책방은 80년대 후반 들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복사와 인쇄가 보편화되고 대형서점이 들어서면서 헌책에 대한 수요도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 북적이던 헌책방 거리에는 차츰 적막이 흐르고 있다
헌책방을 운영해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 영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감소했으며 한때는 전성기를 누렸던 골목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책방이 목도한 63년
이른 아침 방문했기에 어지럽게 정리된 일반적인 헌책방을 예상했다. 그러나 경쾌한 클래식 음악과 보기 좋게 말끔히 정리된 책들, 분위기에 맞는 소품들이 놓인 모습을 보고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일반서점과 다를 바 없으니 더 볼지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 소리가 들려 들어가 보니 김기철 대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공간에 나름의 순서와 규칙으로 책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고, 주인장이 손수 써 내려간 도서 위치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 김대표는 놀라운 이야기를 건넸다.
"이 헌책방이 63년이나 같은 자리에 있었어요."
▲ 63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월계서점
그러고보니 양옆으로 나란히 놓인 책장의 윗부분에 나무판자를 놓아 안정감 있게 균형을 맞추고 시리즈로 묶인 책들을 가지런히 진열해둔 센스가 보통이 아니다.
"위, 아래, 좌, 우 모두 시선이 닿게 만들어 각자가 원하는 책을 좀 더 쉽고 편하게 찾을 수 있도록 구성한 거예요."
좁고 길게 구성된 공간은 마치 터널 속을 걸으며 숨겨진 보물을 찾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들은 63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말해준다.
▲ 서가 사이 나무판자를 놓아 연속간행물을 진열해두었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지키는 사람
"커피 한 잔 하실래예? 건빵도 같이 먹으면 맛있습니더."
월계서점을 이어받아 3년째 운영 중인 김기철 대표는 낯선 이에게 거리낌 없이 차를 내어 주었다. 각종 소품을 활용하여 공간에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은 모두 김대표의 솜씨다. 헌책방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즘 찾은 이들이 많은지 물었다.
"단골손님이 많은 월계서점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죠. 지명이 아니었다면 헌책방 골목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골목도 변하고 헌책방도 많이 사라졌어요. 10년이나 먼저 형성되었지만,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과 다른 결과를 보이는 것이 아쉽죠."
▲ 대를 이어 월계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기철 대표
"생계를 목적으로 돈을 벌려는 수단이 아닌 헌책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하는 겁니다."
신상품이 최고의 대우를 받는 요즘 시대에 중고품이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헌책의 경우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는데도 불구하고 매년 최신 정보가 담긴 새 책이 발행되는 상황이다 보니 사람들이 찾질 않는다. 더군다나 전자책의 등장으로 많은 전문가가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월계서점을 포함한 대구의 헌책방들이 소멸하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는 시대의 변화와는 별개로 그들이 헌책을 대하는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몇몇 손님들이 자신들이 찾고 있는 책이 이곳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김대표에게 말을 건넨 틈을 타 책을 골랐다.
▲ 손님들은 희귀한 서적을 찾아 헌책방을 드나든다
책을 나눈다는 것
"근현대사에 관심 있어요? 근현대사는 OOO 작가가 쓴 게 최고인데.
제가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니 원하는 책이 있으시면 제가 다 구해드릴 수 있어요."
책방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책을 찾아주던 이는 다름 아닌 월계서점을 자주 드나드는 단골이었다. 사장이 손님에게, 손님이 또 다른 손님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고 경계를 허무는 일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헌책방의 가장 큰 이점 중 하나는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책들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인데, 귀한 책을 다루는 만큼 손님도 귀하게 대하는 마음이 가슴 깊이 뿌듯하게 전해졌다.
[대구] 헌책을 향한 사명감으로
대구 월계서점 대표 김기철
이경민
2018-06-12
어린 시절 거실 책장에는 삼촌과 고모들이 즐겨 읽던 책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나는 지루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층층이 쌓여 있던 책을 골라 읽어보곤 했다. 누렇게 변한 종이 특유의 냄새가 정겨웠고 한글과 한문이 섞인 채 세로로 쓰인 글들은 그 내용은 모르더라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오래된 책을 찾아 읽던 기억은 요즘 서점에서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지금도 길을 걷다가 종이 냄새에 이끌려 책방으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헌책방 골목의 세월은 가고
대구에는 헌책방이 모여 군락을 이룬 곳이 세 군데 있다. 대구시청 주변, 남산동 남문시장 주변, 대구역 사거리 지하도 주변이다. 대구 헌책방 골목은 서울의 청계천, 부산의 보수동, 광주의 동구 계림동보다 10여 년 앞서 형성되었다. 종이가 귀하고 인쇄 기술도 미비했던 그 당시만 하더라도 책 한 권을 사서 대물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형편이 어려웠던 대부분 가정에서 중고 책을 구매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대구시청 주변 도로 양옆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서 있던 150여 개의 헌책방은 80년대 후반 들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복사와 인쇄가 보편화되고 대형서점이 들어서면서 헌책에 대한 수요도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 북적이던 헌책방 거리에는 차츰 적막이 흐르고 있다
헌책방을 운영해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 영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감소했으며 한때는 전성기를 누렸던 골목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책방이 목도한 63년
이른 아침 방문했기에 어지럽게 정리된 일반적인 헌책방을 예상했다. 그러나 경쾌한 클래식 음악과 보기 좋게 말끔히 정리된 책들, 분위기에 맞는 소품들이 놓인 모습을 보고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일반서점과 다를 바 없으니 더 볼지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 소리가 들려 들어가 보니 김기철 대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공간에 나름의 순서와 규칙으로 책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고, 주인장이 손수 써 내려간 도서 위치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 김대표는 놀라운 이야기를 건넸다.
"이 헌책방이 63년이나 같은 자리에 있었어요."
▲ 63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월계서점
그러고보니 양옆으로 나란히 놓인 책장의 윗부분에 나무판자를 놓아 안정감 있게 균형을 맞추고 시리즈로 묶인 책들을 가지런히 진열해둔 센스가 보통이 아니다.
"위, 아래, 좌, 우 모두 시선이 닿게 만들어 각자가 원하는 책을 좀 더 쉽고 편하게 찾을 수 있도록 구성한 거예요."
좁고 길게 구성된 공간은 마치 터널 속을 걸으며 숨겨진 보물을 찾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들은 63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말해준다.
▲ 서가 사이 나무판자를 놓아 연속간행물을 진열해두었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지키는 사람
"커피 한 잔 하실래예? 건빵도 같이 먹으면 맛있습니더."
월계서점을 이어받아 3년째 운영 중인 김기철 대표는 낯선 이에게 거리낌 없이 차를 내어 주었다. 각종 소품을 활용하여 공간에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은 모두 김대표의 솜씨다. 헌책방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즘 찾은 이들이 많은지 물었다.
"단골손님이 많은 월계서점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죠. 지명이 아니었다면 헌책방 골목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골목도 변하고 헌책방도 많이 사라졌어요. 10년이나 먼저 형성되었지만,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과 다른 결과를 보이는 것이 아쉽죠."
▲ 대를 이어 월계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기철 대표
"생계를 목적으로 돈을 벌려는 수단이 아닌 헌책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하는 겁니다."
신상품이 최고의 대우를 받는 요즘 시대에 중고품이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헌책의 경우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는데도 불구하고 매년 최신 정보가 담긴 새 책이 발행되는 상황이다 보니 사람들이 찾질 않는다. 더군다나 전자책의 등장으로 많은 전문가가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월계서점을 포함한 대구의 헌책방들이 소멸하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는 시대의 변화와는 별개로 그들이 헌책을 대하는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몇몇 손님들이 자신들이 찾고 있는 책이 이곳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김대표에게 말을 건넨 틈을 타 책을 골랐다.
▲ 손님들은 희귀한 서적을 찾아 헌책방을 드나든다
책을 나눈다는 것
"근현대사에 관심 있어요? 근현대사는 OOO 작가가 쓴 게 최고인데.
제가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니 원하는 책이 있으시면 제가 다 구해드릴 수 있어요."
책방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책을 찾아주던 이는 다름 아닌 월계서점을 자주 드나드는 단골이었다. 사장이 손님에게, 손님이 또 다른 손님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고 경계를 허무는 일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헌책방의 가장 큰 이점 중 하나는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책들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인데, 귀한 책을 다루는 만큼 손님도 귀하게 대하는 마음이 가슴 깊이 뿌듯하게 전해졌다.
장소 정보
<아는동네> 객원 작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좀 더 특별하게 바라보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여행자 겸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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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없는 속초를 걷다.
인문쟁이 김지영
서해 최북단 섬 여행기
인문쟁이 김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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