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모이는 마을이라는 이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북적이던 탄광촌이 지금은 30가구 56명 내외만 사는 작은 마을로 변해있다기에 호기심도 일었다.
마을보다 유명한 사람
하지만 지역적 특색 못지않게, 모운동이 인상적인 건 다름 아닌 김흥식 이장의 유명세 때문이다.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모두 떠나보낸 오늘날의 모운동을 다녀온 적지도 많지도 않은 대부분 사람은 하나 같이 김흥식 씨를 만났던 이야기를 꺼냈다. 심지어 모운동에 대해 이리저리 알아보던 차에, 그의 연락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원래 마을의 이장이 그런 존재였던가? 그렇게 김흥식 이장과 연락이 닿았다.첫 만남도 갑작스러웠다. 영월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지금 마을에 방문할 것임을 알릴 겸, 모운동으로 가는 버스도 물을 겸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김흥식 이장은 '도착했어요? 거 있어요. 내가 지금 갈 테니!'라며 마중을 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꽤 먼 거리에서 빗길을 달려온 그는 묘하게 본인과 닮아 보이는 지프차에 손님을 태웠다.
▲ 마을을 찾는 이를 직접 마중할 정도로 모운동에 대한 애정이 깊은 김흥식 이장
탄광 마을의 사람책
차에 타자마자 그의 입에서 모운동의 역사가 술술 풀려나왔다. 김흥식 이장은 특히 모운동이 걸어온 길과 정확히 일치하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즐거워했다. 전축이 동난 이유와 같이 재밌는 옛 일화들을 이야기할 때면 그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1960년대, 70년대에 모운동은 정말 큰 도시였지. 상주 인원이 만 명이나 되었으니 말이야. 그 당시 초등학교에만 850명이 있어서 교실이 모자랐어.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학교에 갈 정도였지. 큰 병원, 이발소, 세탁소, 다방, 당구장, 짜장면집, 냉면집, 사진관, 빵집, 막걸릿집에 극장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없는 게 없던 시절이야."
▲ 모운초등학교 제11회 졸업식 사진
모운동의 전성시대
모운동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주요 탄광촌이었다. 수많은 종업원(당시 탄광 광부들을 지칭하던 말)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홀로, 또는 가족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탄광들을 운영하던 옥동광업소의 성장과 함께 모운동도 자연스럽게 그 규모를 확장했다. 산 중턱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보니, 집을 지을 땅이 많지 않아 말 그대로 가능한 모든 공간에는 집들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그 거주민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가 또한 빼곡한 주택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차지하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밀집도에 얽힌 이야기들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보니 마을 길이든 어디든 남녀가 만나도 연애할 만한 사적인 공간이 없는 거야. 그래서 연인들은 모운동 마을 아래쪽 넓적한 바위에서 몰래몰래 만났다고. 보는 눈 가득한 마을을 살짝 벗어나, 바위 밑에 숨어서 정분을 나눈 게지.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연인이 누군가에게 들킨 뒤로는 지금까지 그 바위를 연애바위라 부른다고."
▲ 김흥식 이장 부부 내외가 직접 그린 벽화
화려했던 시절은 저물어가고
"1989년 4월 30일에 모든 탄광이 폐광되고 주민 대부분이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지. 하지만 나는 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들어왔고, 모든 걸 지켜보며 정붙여온 모운동을 떠날 수 없었어." 모운동은 마치 풍선이 부풀 듯 그 영향력을 키우다가, 폐광과 함께 바람이 빠지면서 지금은 그저 30가구, 두 학급 정도의 주민만 남은 작은 마을이 되었다. 엄연히 존재했던 화려한 시절은 이제 그 시절을 함께하지 않았던 이들의 눈으로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주민들은 폐광과 함께 생업을 잃을 처지에 놓이자 하나둘 정든 모운동을 떠나기 시작했다. 토박이인 김흥식 이장이라 하여 어찌 고민이 없었겠는가. 아내와 함께 영월 시내에 집을 알아보러 다니며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떠난다고 딱히 분명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쉽게 고향 마을을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아내에게 어르신들을 모시며 마을을 가꿔보자고 얘기했고, 지금까지도 모운동을 지키고 있다.
▲ 김흥식 이장 부부 내외가 직접 그린 벽화
마을의 미래를 밝히는 이장 부부
그렇게 그는 마을에 남아 나무와 꽃을 심고, 길을 다듬으며 떠나가는 마을이 아닌 찾아오는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 모운동은 동화마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대상을 받았다. 마을을 되살리기 위한 모든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려 26년 동안 모운동의 이장 자리를 지켜왔다.“박정희 대통령도 18년 동안 독재하다가 총을 맞았는데, 난 무려 26년째 이장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언제 총 맞을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동네 사람들이 부르면 ‘네’하고 달려가고 있지.”수도가 고장 나도, 난방 설비가 고장 나도, 아주 사소한 일이 발생해도 묵묵히 일하는 그의 말 속에는 여전히 겸손이 담겨있다.
▲ 이장 부부의 일상이 담긴 집 앞마당
그는 시작부터 끝까지 가능한 많은 모운동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노력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마을 가꾸기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마을 광장을 둘러보던 그가 불현듯 피아니스트 이루마가 그려진 벽화로 다가가서는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겠는가. "이 작품이 완성되려면 여기에 이렇게 의자가 하나 있어야지!" 말보다도 천진한 미소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의 세심한 돌봄 덕분에 오늘도 모운동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닿는다.
[영월] 탄광촌의 이야기를 갈무리하여 전하는 남자
영월 모운동 김흥식 이장
박도영
2018-06-05
구름이 모이는 마을이라는 이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북적이던 탄광촌이 지금은 30가구 56명 내외만 사는 작은 마을로 변해있다기에 호기심도 일었다.
마을보다 유명한 사람
하지만 지역적 특색 못지않게, 모운동이 인상적인 건 다름 아닌 김흥식 이장의 유명세 때문이다.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모두 떠나보낸 오늘날의 모운동을 다녀온 적지도 많지도 않은 대부분 사람은 하나 같이 김흥식 씨를 만났던 이야기를 꺼냈다. 심지어 모운동에 대해 이리저리 알아보던 차에, 그의 연락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원래 마을의 이장이 그런 존재였던가? 그렇게 김흥식 이장과 연락이 닿았다.첫 만남도 갑작스러웠다. 영월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지금 마을에 방문할 것임을 알릴 겸, 모운동으로 가는 버스도 물을 겸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김흥식 이장은 '도착했어요? 거 있어요. 내가 지금 갈 테니!'라며 마중을 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꽤 먼 거리에서 빗길을 달려온 그는 묘하게 본인과 닮아 보이는 지프차에 손님을 태웠다.
▲ 마을을 찾는 이를 직접 마중할 정도로 모운동에 대한 애정이 깊은 김흥식 이장
탄광 마을의 사람책
차에 타자마자 그의 입에서 모운동의 역사가 술술 풀려나왔다. 김흥식 이장은 특히 모운동이 걸어온 길과 정확히 일치하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즐거워했다. 전축이 동난 이유와 같이 재밌는 옛 일화들을 이야기할 때면 그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1960년대, 70년대에 모운동은 정말 큰 도시였지. 상주 인원이 만 명이나 되었으니 말이야. 그 당시 초등학교에만 850명이 있어서 교실이 모자랐어.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학교에 갈 정도였지. 큰 병원, 이발소, 세탁소, 다방, 당구장, 짜장면집, 냉면집, 사진관, 빵집, 막걸릿집에 극장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없는 게 없던 시절이야."
▲ 모운초등학교 제11회 졸업식 사진
모운동의 전성시대
모운동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주요 탄광촌이었다. 수많은 종업원(당시 탄광 광부들을 지칭하던 말)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홀로, 또는 가족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탄광들을 운영하던 옥동광업소의 성장과 함께 모운동도 자연스럽게 그 규모를 확장했다. 산 중턱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보니, 집을 지을 땅이 많지 않아 말 그대로 가능한 모든 공간에는 집들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그 거주민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가 또한 빼곡한 주택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차지하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밀집도에 얽힌 이야기들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보니 마을 길이든 어디든 남녀가 만나도 연애할 만한 사적인 공간이 없는 거야. 그래서 연인들은 모운동 마을 아래쪽 넓적한 바위에서 몰래몰래 만났다고. 보는 눈 가득한 마을을 살짝 벗어나, 바위 밑에 숨어서 정분을 나눈 게지.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연인이 누군가에게 들킨 뒤로는 지금까지 그 바위를 연애바위라 부른다고."
▲ 김흥식 이장 부부 내외가 직접 그린 벽화
화려했던 시절은 저물어가고
"1989년 4월 30일에 모든 탄광이 폐광되고 주민 대부분이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지. 하지만 나는 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들어왔고, 모든 걸 지켜보며 정붙여온 모운동을 떠날 수 없었어." 모운동은 마치 풍선이 부풀 듯 그 영향력을 키우다가, 폐광과 함께 바람이 빠지면서 지금은 그저 30가구, 두 학급 정도의 주민만 남은 작은 마을이 되었다. 엄연히 존재했던 화려한 시절은 이제 그 시절을 함께하지 않았던 이들의 눈으로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주민들은 폐광과 함께 생업을 잃을 처지에 놓이자 하나둘 정든 모운동을 떠나기 시작했다. 토박이인 김흥식 이장이라 하여 어찌 고민이 없었겠는가. 아내와 함께 영월 시내에 집을 알아보러 다니며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떠난다고 딱히 분명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쉽게 고향 마을을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아내에게 어르신들을 모시며 마을을 가꿔보자고 얘기했고, 지금까지도 모운동을 지키고 있다.
▲ 김흥식 이장 부부 내외가 직접 그린 벽화
마을의 미래를 밝히는 이장 부부
그렇게 그는 마을에 남아 나무와 꽃을 심고, 길을 다듬으며 떠나가는 마을이 아닌 찾아오는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 모운동은 동화마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대상을 받았다. 마을을 되살리기 위한 모든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려 26년 동안 모운동의 이장 자리를 지켜왔다.“박정희 대통령도 18년 동안 독재하다가 총을 맞았는데, 난 무려 26년째 이장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언제 총 맞을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동네 사람들이 부르면 ‘네’하고 달려가고 있지.”수도가 고장 나도, 난방 설비가 고장 나도, 아주 사소한 일이 발생해도 묵묵히 일하는 그의 말 속에는 여전히 겸손이 담겨있다.
▲ 이장 부부의 일상이 담긴 집 앞마당
그는 시작부터 끝까지 가능한 많은 모운동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노력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마을 가꾸기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마을 광장을 둘러보던 그가 불현듯 피아니스트 이루마가 그려진 벽화로 다가가서는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겠는가. "이 작품이 완성되려면 여기에 이렇게 의자가 하나 있어야지!" 말보다도 천진한 미소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의 세심한 돌봄 덕분에 오늘도 모운동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닿는다.
▲ 본인이 그린 마을 벽화 앞에서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 김흥식 이장
아는동네 객원작가, 돈을 위해서만 글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글로 먹고 살 수 있길 꿈꾸는 프리랜서 작가. 근근이 교정을 보고 글 쓰는 일을 한다. 사람과 여행을 담은 책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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