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위드(SEAWEED)’는 제주에 본부가 있는 문화예술에 기반한 콘텐츠 생산자들의 글로벌 네트워크 플랫폼이다. 그 플랫폼은 한영판 별도 발행 잡지와 웹진, 때로는 예술가들의 네트워크파티 형식으로 구현된다.
▲카페에 진열된 <씨위드> 창간호 (좌) <씨위드> 창간 기념파티 (우)
영어로 해조류를 뜻하는 ‘씨위드’는 동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즐겨먹는 식재료다. 아직 미국과 유럽권에선 조금 낯설지만, 최근 일식의 보급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먹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은마치 과자 같은 스낵으로 인식해 먹기도 한다. 낯선 이들은 낯선대로 친숙한 이들은 친숙한 대로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을 대하는태도를 보여주는 매체를 만들겠다는 뜻을 담았다.
숨은 뜻으로는 유사한 발음인 ‘see with’, 혹은 ‘sea with’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함께 본다’, 혹은 ‘함께 하는 바다’라는 의미다. 같은 바다를 공유하는 비슷한 지리적 영역 안에서 무엇을 같이 보고 있는지에 대해 정리하는 콘텐츠를 생산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이나연씨가 있다. 제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7년, 뉴욕에서 떠돌다 제주로 돌아와 ‘씨위드’라는 놀이판을 벌인 이나연 편집장을 만나보았다.
먼저 제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5년 4월, 취업과 함께 제주로 돌아왔다. 뉴욕에서 제주로 바로 들어온 이주였다. 2014년 10월 개관한 아라리오뮤지엄 제주에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입사했다. 내 변호를 하자면, 대기업 헤드헌터나, 프리랜서로 기고하던 매체에서 좋은 직책으로 취업 제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제주에서 큐레이터 보조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타당한 선택이었다. 일단 뮤지엄을 세운 아라리오란 기업 자체는 미술계에선 일할 만한 직장이었다. CEO가 세계적인 콜렉터인 까닭에 뮤지엄에서 다루는 작가군과 작품이 실로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천안이라는 지방에 본사와 갤러리를 두고 성장한 만큼 문화적인, 특히 현대미술의 색이 짙은 기업이었다. 천안에 이어 제주라는 지방에 뮤지엄을 세울 만큼 지역을 중심으로 두고 일을 도모하는 데는 충분한 노하우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개념에 머물던 글로컬을 학습하고 체험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문화적으로 척박하던 내 고향 제주에서 우고 론디로네, 피에르 위그, 장환, 수보드 굽타 등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작가들을 혹은 작품들을 다루고 이해하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라리오뮤지엄 덕이었다. 늘 제주로 돌아올 틈을 노리던 중 아라리오뮤지엄의 설립이 내 귀국을 빨라지게 했고 제주로 돌아와 많은 관심과 도움을 받았다. 문화계에 젊은 기획자가 부재하던 터에 제주 출신의 젊은이가 신선했는지 많은 분들한테 과분한 애정을 받았다."
▲<씨위드> 사무실에서 만난 이나연 편집장.
잡지 <씨위드(SEAWEED)>에 대해 설명한다면?
"제주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남쪽에 뚝 떨어진 작은 섬이 아닌,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라는 타국과의 관계도에서 지형학적으로 용이한 문화적 거점이다. 섬은 한계가 아니라 어느 곳으로든 날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언어와 문화적 거리가 있을 뿐 물리적 거리는 가깝다.
문화콘텐츠 교류를 위한 한영판 별도 발행잡지와 웹진은 콘텐츠 생산지이자 국제적인 매체의 시작점이 되는 제주를 중심으로 인접 국가와 지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화 행사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향후 타 지역 및 타국가 간 협력을 바탕으로 한 문화프로젝트의 활성화를 도와줄 것이다. 질적 양적으로 풍성해지고 있는 제주의 문화콘텐츠와 동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수준 높은 문화행사를 편집해 소개함으로써, 제주의 문화적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제주 문화행사의 경쟁력을 높인다. 부분적으로 유럽과 미국의 콘텐츠를 노출시키면서, 자연스러운 글로컬의 모델을 만들어간다.
제주가 단순히 관광하며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콘텐츠를 기획, 수집하고 생산해내는 공간이 될 가능성을 보았다. 문화 제주의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인접 국가와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를 수용해 전달하는 한글, 영문 매체의 역할을 기대했다. 제주를 문화콘텐츠 생산의 허브로 만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홍보수단으로서 매체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또 제주에 다양한 문화행사와 문화공간이 만들어지는 데 비해 그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아카이브할 매체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파리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있고, 뉴욕엔 <브루클린 레일>이, 포틀랜드엔<킨포크>가 있다. 지금은 모두 거창한 브랜드가 됐지만, 이들 모두 하나의 지역에서 시작해 전세계 문화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문화트렌드를 주도해 나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매체의 콘텐츠가 먼저 소수 마니아의 인정을 받았고, 그 마니아층은 대중으로 확대됐으며, 대중의 안목은 세계적으로 확대됐다. 그리고 독자들은 역으로 매체가 탄생한 지역에 대해 관심을 돌리게 됐다. 어떤 문화적 토양이 이런 양질의 콘텐츠를 탄생시킬 여건을 만들어 냈을까? 이런 의문이 제주라는 섬을 두고 생기지 말란 법은 없다. 동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에서, 다양한 문화인구가 유입되는 분위기에 더해, 국제적인 문화매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장소라는 인상을 더하면 어떨까?"
▲<씨위드> 에코백 (좌) <씨위드> 2호 (우)
"제주 작가들과 동아시아 작가들이 서로 문화적 정보를 나누며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나가고, 실질적이고 친밀한 교류가 발생하길 기대한다. 그 중심에 씨위드(SEAWEED)라는 매체가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문화콘텐츠 중심지로서 제주도가 가진 가능성은?
"도시가 싫거나, 한량기질이 넘쳐 제주로 흘러들어온 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의 예술가적 에너지를 모아 놀이노동, 즉 플레이버(play+labor)의 판을 제주에서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일과 놀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활동이 결국 생산적인 일을 위한 포트폴리오가 되는 매체가 씨위드다. 제주의 능력있는 일꾼들에게 즐겁게 일할 기회를 주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 도처를 넘어 동아시아, 세계 전역에 흩어진 능력있는 문화 프리랜서들의 능력발표장으로서의 매체는 제주에서 발행되기에 적합해 보인다."
14년만에 돌아온 고향 제주의 변화를 어떻게 보고 있나?
"2013년 이후의 제주는 변혁의 중심에 있다.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화하기 힘든 격변을 치르는 중이다. 한 해에 몇 개의 아트페어나 페스티벌이 열리는 등 미술과 연관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쏟아지듯이 열렸다. 문화공간도 다양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아트센터로 재탄생한 구 제주대학병원 ‘이아’라든가, 산지천 공원에 문을 열게 된 ‘산지천갤러리’는 물론 ‘문화공간 양’, ‘아트스페이스 씨’ 등 전시공간이며 레지던스가 시작되거나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 기간이었다. 현재 제주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은 어림잡아도 50여 곳에 가깝다.
인프라가 구축되며 좌충우돌하는 기간에 제주는 문화적 활력이 넘쳤고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지역에서의 정착은 어렵지 않았다. 무려 첫 일터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영화를 보러다니던 탑동시네마에 생긴 미술관이었으니까.
탑동시네마가 1999년 개관할 당시 선물받았을 것이 분명한 커다란전신거울이 계단참에 그대로 있고, 이전에 쓰였던 타일이 과거의 쓸모를 추억하며 감각적으로 남겨져 있기도 했다. 비엔날레나 해외를 다니면서 보던 유명작가의 대형작품을 내 추억이 깃든 고향 공간에서 본다는 것은 글로컬이라는 개념의 시각화와 다름없기도 했다.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다만, 사업주의 취향과 콜렉션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사립미술관에서 스태프로 일한다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직장에 기대지 않더라도, 제주에는 이미 충분히 많은 일거리가 있어 보였다. 귀국 전에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제주에 일거리가 없으리라는 오해는 1년여 간 직접 살아보며 말끔히 해소됐다. 그래서 2016년 6월, 퇴사했다.
퇴사 후 스코틀랜드 글랜피딕 국제레지던스에 참가하게 된 작가 남편을 따라 두달여 간 스코틀랜드에 다녀왔다. 미국, 영국, 호주, 중국, 인도 등 9개국의 참가작가들이 3개월간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한적한 시골에 머물며 작가들끼리의 교류는 물론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글랙피딕’이라는 스카치위스키 양양조장이 모여 있는 일대야말로 글로컬의 구현 같았다. 계곡의 맑은 물에 의지해 스코틀랜드에서도 한참 외곽의 시골지역에서 만들어진 위스키는 이제 전세계에 팔려나간다. 이제 이 세계적인 위스키는 세계의 아티스트들을 불러모아 그 지역에서 영감을 받고 작품을 제작하기를 기대했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들끼리의 네트워크는 ‘글렌피딕’이라는 이름하에 활발히 이뤄졌다. 그 나라에서는 유명한 작가들이기에 각 나라의 미술관련 종사자가 작가들을 만나기 위해 방문했고, 그 시골 안에서 하나의 아트씬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스코틀랜드 더프타운이라는 시골마을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같은 해 9월 초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더프타운과 비교했을 때 제주는 큰 도시였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더프타운은더프타운대로 제주는 제주대로 지역적 특성을 활용한 문화활동을 하면 되는 거였다."
지역적이며 세계적인 아트씬을 만드는 데
성공한 모델이나 참고할 만한 모델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글로벌예술 프로젝트와 전시, 기관을 후원하는 비영리조직인 루마파운데이션의 대표 마야 호프만(Maya Hoffmann)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2013년부터 시작한 루마아를 건립에 관한 질문들이 많았다. 2018년인 올해에 완공 예정인 루마아를 프로젝트는 프랑스 아를 지역에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건물을 짓는 것을 포함, 150밀리언유로(200억원 가량)의 비용을 들일 예정이었다. 반 고흐가 머물렀던 곳 정도로 유명한, 남프랑스의 휴양도시인 아를 지역 전체를 예술도시로 탈바꿈시킬 거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장본인이 바로 마야 호프만이다.
작은 도시를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내비치는 프로젝트를 이끄는 그에게 작금의 젊은 기획자나 작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세계적이기 전에지역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반향을 노려야겠죠. 당신의 시간을 살고, 담력을 가지세요.(Be local before you become global, but aim for global resonance. Live with your time and be courageous.)"
▲<씨위드> 사무실에서 만난 이나연 편집장.
씨위드(SEAWEED)를 함께 만드는 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빈약한 경험과 자본으로 지역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엔 사실 한계가 있다. 하지만 나 같은 개인이 여럿이 된다면 얘기는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요즘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있지 않은가. 내가 제주에서 책을 내거나 전시를 하면, 미국, 일본, 유럽의 친구들이 같은 정보를 공유한다. 그 친구들의 활동이 내게도 실시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범위의 정도를 떠나 해외 커넥션을 유지한 개인들이 제주로 더 돌아와 준다면 한번 신나게 놀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2017년 전 세계에 흩어진 제주의 선후배와 동기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만난 아티스트와 평론가, 큐레이터 친구들을 끌어모아 지면에 소환했다. 물리적으로 제주에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글과 그림으로 제주에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매체가 바로 <씨위드>다.
1호, 2호를 지나며, 이 실험은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씨위드>를 매개삼아 다른 지역 이곳 저곳에서 ‘안/못 돌아오고 버티는’ 후배와 동기들을 계속 불러볼 생각이다. 제주에 지내면서 세계를 조망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가끔 밖으로 놀러나가 다시 제주를 생각해보는 일이 어찌나 신기하고 신나는지 그들과 공유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궁극적 목적은 그들을 제주에 눌러 앉히는 것. 그렇게 그들의 친구들과 나의 친구들을 다시 엮어, 제주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신나게 놀아보는 일이 내가 꿈꾸는 글로컬이다."
'모든 삶은 기록한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모토로 '기억의책'을 만드는 주식회사 꿈틀의 편집장.
* <주식회사 꿈틀>은 제주에서 시작된 출판사이며 사회적기업으로, ‘기억의책’을 만들고 있다. '기억의책'은 평범한 어르신들의 삶의 기억과 사진을 모아 만든 간략한 자서전이며, 2017년까지 가족 또는 지자체 의뢰로 110여 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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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플레이버(play+labor)의 판을 제주에서
<씨위드(SEAWEED)> 편집장 이나연
박범준
2018-05-25
‘씨위드(SEAWEED)’는 제주에 본부가 있는 문화예술에 기반한 콘텐츠 생산자들의 글로벌 네트워크 플랫폼이다. 그 플랫폼은 한영판 별도 발행 잡지와 웹진, 때로는 예술가들의 네트워크파티 형식으로 구현된다.
▲카페에 진열된 <씨위드> 창간호 (좌) <씨위드> 창간 기념파티 (우)
영어로 해조류를 뜻하는 ‘씨위드’는 동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즐겨먹는 식재료다. 아직 미국과 유럽권에선 조금 낯설지만, 최근 일식의 보급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먹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은마치 과자 같은 스낵으로 인식해 먹기도 한다. 낯선 이들은 낯선대로 친숙한 이들은 친숙한 대로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을 대하는태도를 보여주는 매체를 만들겠다는 뜻을 담았다.
숨은 뜻으로는 유사한 발음인 ‘see with’, 혹은 ‘sea with’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함께 본다’, 혹은 ‘함께 하는 바다’라는 의미다. 같은 바다를 공유하는 비슷한 지리적 영역 안에서 무엇을 같이 보고 있는지에 대해 정리하는 콘텐츠를 생산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이나연씨가 있다. 제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7년, 뉴욕에서 떠돌다 제주로 돌아와 ‘씨위드’라는 놀이판을 벌인 이나연 편집장을 만나보았다.
먼저 제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5년 4월, 취업과 함께 제주로 돌아왔다. 뉴욕에서 제주로 바로 들어온 이주였다. 2014년 10월 개관한 아라리오뮤지엄 제주에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입사했다. 내 변호를 하자면, 대기업 헤드헌터나, 프리랜서로 기고하던 매체에서 좋은 직책으로 취업 제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제주에서 큐레이터 보조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타당한 선택이었다. 일단 뮤지엄을 세운 아라리오란 기업 자체는 미술계에선 일할 만한 직장이었다. CEO가 세계적인 콜렉터인 까닭에 뮤지엄에서 다루는 작가군과 작품이 실로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천안이라는 지방에 본사와 갤러리를 두고 성장한 만큼 문화적인, 특히 현대미술의 색이 짙은 기업이었다. 천안에 이어 제주라는 지방에 뮤지엄을 세울 만큼 지역을 중심으로 두고 일을 도모하는 데는 충분한 노하우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개념에 머물던 글로컬을 학습하고 체험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문화적으로 척박하던 내 고향 제주에서 우고 론디로네, 피에르 위그, 장환, 수보드 굽타 등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작가들을 혹은 작품들을 다루고 이해하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라리오뮤지엄 덕이었다. 늘 제주로 돌아올 틈을 노리던 중 아라리오뮤지엄의 설립이 내 귀국을 빨라지게 했고 제주로 돌아와 많은 관심과 도움을 받았다. 문화계에 젊은 기획자가 부재하던 터에 제주 출신의 젊은이가 신선했는지 많은 분들한테 과분한 애정을 받았다."
▲<씨위드> 사무실에서 만난 이나연 편집장.
잡지 <씨위드(SEAWEED)>에 대해 설명한다면?
"제주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남쪽에 뚝 떨어진 작은 섬이 아닌,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라는 타국과의 관계도에서 지형학적으로 용이한 문화적 거점이다. 섬은 한계가 아니라 어느 곳으로든 날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언어와 문화적 거리가 있을 뿐 물리적 거리는 가깝다.
문화콘텐츠 교류를 위한 한영판 별도 발행잡지와 웹진은 콘텐츠 생산지이자 국제적인 매체의 시작점이 되는 제주를 중심으로 인접 국가와 지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화 행사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향후 타 지역 및 타국가 간 협력을 바탕으로 한 문화프로젝트의 활성화를 도와줄 것이다. 질적 양적으로 풍성해지고 있는 제주의 문화콘텐츠와 동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수준 높은 문화행사를 편집해 소개함으로써, 제주의 문화적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제주 문화행사의 경쟁력을 높인다. 부분적으로 유럽과 미국의 콘텐츠를 노출시키면서, 자연스러운 글로컬의 모델을 만들어간다.
제주가 단순히 관광하며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콘텐츠를 기획, 수집하고 생산해내는 공간이 될 가능성을 보았다. 문화 제주의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인접 국가와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를 수용해 전달하는 한글, 영문 매체의 역할을 기대했다. 제주를 문화콘텐츠 생산의 허브로 만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홍보수단으로서 매체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또 제주에 다양한 문화행사와 문화공간이 만들어지는 데 비해 그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아카이브할 매체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파리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있고, 뉴욕엔 <브루클린 레일>이, 포틀랜드엔<킨포크>가 있다. 지금은 모두 거창한 브랜드가 됐지만, 이들 모두 하나의 지역에서 시작해 전세계 문화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문화트렌드를 주도해 나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매체의 콘텐츠가 먼저 소수 마니아의 인정을 받았고, 그 마니아층은 대중으로 확대됐으며, 대중의 안목은 세계적으로 확대됐다. 그리고 독자들은 역으로 매체가 탄생한 지역에 대해 관심을 돌리게 됐다. 어떤 문화적 토양이 이런 양질의 콘텐츠를 탄생시킬 여건을 만들어 냈을까? 이런 의문이 제주라는 섬을 두고 생기지 말란 법은 없다. 동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에서, 다양한 문화인구가 유입되는 분위기에 더해, 국제적인 문화매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장소라는 인상을 더하면 어떨까?"
▲<씨위드> 에코백 (좌) <씨위드> 2호 (우)
"제주 작가들과 동아시아 작가들이 서로 문화적 정보를 나누며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나가고, 실질적이고 친밀한 교류가 발생하길 기대한다. 그 중심에 씨위드(SEAWEED)라는 매체가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문화콘텐츠 중심지로서 제주도가 가진 가능성은?
"도시가 싫거나, 한량기질이 넘쳐 제주로 흘러들어온 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의 예술가적 에너지를 모아 놀이노동, 즉 플레이버(play+labor)의 판을 제주에서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일과 놀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활동이 결국 생산적인 일을 위한 포트폴리오가 되는 매체가 씨위드다. 제주의 능력있는 일꾼들에게 즐겁게 일할 기회를 주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 도처를 넘어 동아시아, 세계 전역에 흩어진 능력있는 문화 프리랜서들의 능력발표장으로서의 매체는 제주에서 발행되기에 적합해 보인다."
14년만에 돌아온 고향 제주의 변화를 어떻게 보고 있나?
"2013년 이후의 제주는 변혁의 중심에 있다.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화하기 힘든 격변을 치르는 중이다. 한 해에 몇 개의 아트페어나 페스티벌이 열리는 등 미술과 연관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쏟아지듯이 열렸다. 문화공간도 다양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아트센터로 재탄생한 구 제주대학병원 ‘이아’라든가, 산지천 공원에 문을 열게 된 ‘산지천갤러리’는 물론 ‘문화공간 양’, ‘아트스페이스 씨’ 등 전시공간이며 레지던스가 시작되거나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 기간이었다. 현재 제주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은 어림잡아도 50여 곳에 가깝다.
인프라가 구축되며 좌충우돌하는 기간에 제주는 문화적 활력이 넘쳤고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지역에서의 정착은 어렵지 않았다. 무려 첫 일터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영화를 보러다니던 탑동시네마에 생긴 미술관이었으니까.
탑동시네마가 1999년 개관할 당시 선물받았을 것이 분명한 커다란전신거울이 계단참에 그대로 있고, 이전에 쓰였던 타일이 과거의 쓸모를 추억하며 감각적으로 남겨져 있기도 했다. 비엔날레나 해외를 다니면서 보던 유명작가의 대형작품을 내 추억이 깃든 고향 공간에서 본다는 것은 글로컬이라는 개념의 시각화와 다름없기도 했다.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다만, 사업주의 취향과 콜렉션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사립미술관에서 스태프로 일한다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직장에 기대지 않더라도, 제주에는 이미 충분히 많은 일거리가 있어 보였다. 귀국 전에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제주에 일거리가 없으리라는 오해는 1년여 간 직접 살아보며 말끔히 해소됐다. 그래서 2016년 6월, 퇴사했다.
퇴사 후 스코틀랜드 글랜피딕 국제레지던스에 참가하게 된 작가 남편을 따라 두달여 간 스코틀랜드에 다녀왔다. 미국, 영국, 호주, 중국, 인도 등 9개국의 참가작가들이 3개월간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한적한 시골에 머물며 작가들끼리의 교류는 물론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글랙피딕’이라는 스카치위스키 양양조장이 모여 있는 일대야말로 글로컬의 구현 같았다. 계곡의 맑은 물에 의지해 스코틀랜드에서도 한참 외곽의 시골지역에서 만들어진 위스키는 이제 전세계에 팔려나간다. 이제 이 세계적인 위스키는 세계의 아티스트들을 불러모아 그 지역에서 영감을 받고 작품을 제작하기를 기대했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들끼리의 네트워크는 ‘글렌피딕’이라는 이름하에 활발히 이뤄졌다. 그 나라에서는 유명한 작가들이기에 각 나라의 미술관련 종사자가 작가들을 만나기 위해 방문했고, 그 시골 안에서 하나의 아트씬이 만들어졌다."
▲뉴욕에서 딜론앤리 갤러리 디렉터 다이애나 리가 찍어 보내온 인증샷. <씨위드> 놀이의 일환이다.
"그렇게 스코틀랜드 더프타운이라는 시골마을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같은 해 9월 초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더프타운과 비교했을 때 제주는 큰 도시였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더프타운은더프타운대로 제주는 제주대로 지역적 특성을 활용한 문화활동을 하면 되는 거였다."
지역적이며 세계적인 아트씬을 만드는 데
성공한 모델이나 참고할 만한 모델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글로벌예술 프로젝트와 전시, 기관을 후원하는 비영리조직인 루마파운데이션의 대표 마야 호프만(Maya Hoffmann)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2013년부터 시작한 루마아를 건립에 관한 질문들이 많았다. 2018년인 올해에 완공 예정인 루마아를 프로젝트는 프랑스 아를 지역에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건물을 짓는 것을 포함, 150밀리언유로(200억원 가량)의 비용을 들일 예정이었다. 반 고흐가 머물렀던 곳 정도로 유명한, 남프랑스의 휴양도시인 아를 지역 전체를 예술도시로 탈바꿈시킬 거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장본인이 바로 마야 호프만이다.
작은 도시를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내비치는 프로젝트를 이끄는 그에게 작금의 젊은 기획자나 작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세계적이기 전에지역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반향을 노려야겠죠. 당신의 시간을 살고, 담력을 가지세요.(Be local before you become global, but aim for global resonance. Live with your time and be courageous.)"
▲<씨위드> 사무실에서 만난 이나연 편집장.
씨위드(SEAWEED)를 함께 만드는 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빈약한 경험과 자본으로 지역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엔 사실 한계가 있다. 하지만 나 같은 개인이 여럿이 된다면 얘기는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요즘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있지 않은가. 내가 제주에서 책을 내거나 전시를 하면, 미국, 일본, 유럽의 친구들이 같은 정보를 공유한다. 그 친구들의 활동이 내게도 실시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범위의 정도를 떠나 해외 커넥션을 유지한 개인들이 제주로 더 돌아와 준다면 한번 신나게 놀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2017년 전 세계에 흩어진 제주의 선후배와 동기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만난 아티스트와 평론가, 큐레이터 친구들을 끌어모아 지면에 소환했다. 물리적으로 제주에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글과 그림으로 제주에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매체가 바로 <씨위드>다.
1호, 2호를 지나며, 이 실험은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씨위드>를 매개삼아 다른 지역 이곳 저곳에서 ‘안/못 돌아오고 버티는’ 후배와 동기들을 계속 불러볼 생각이다. 제주에 지내면서 세계를 조망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가끔 밖으로 놀러나가 다시 제주를 생각해보는 일이 어찌나 신기하고 신나는지 그들과 공유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궁극적 목적은 그들을 제주에 눌러 앉히는 것. 그렇게 그들의 친구들과 나의 친구들을 다시 엮어, 제주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신나게 놀아보는 일이 내가 꿈꾸는 글로컬이다."
'모든 삶은 기록한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모토로 '기억의책'을 만드는 주식회사 꿈틀의 편집장.
* <주식회사 꿈틀>은 제주에서 시작된 출판사이며 사회적기업으로, ‘기억의책’을 만들고 있다.
'기억의책'은 평범한 어르신들의 삶의 기억과 사진을 모아 만든 간략한 자서전이며, 2017년까지 가족 또는 지자체 의뢰로 110여 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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