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0주년을 맞은 제주4·3은 여전히 생생한 아픔이다. 제주사람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그 비극에 관여된 가족이나 이웃이 한 두 사람쯤 있기 마련이다. 동시를 쓰는 황금녀 시인에게도 4·3은 생생한 아픔이다. 함덕 바닷가에 살던 젊은 가장이었던 시인의 아버지는 4·3에 연루되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아홉 살 어린 소녀는 이웃들이 죽고 죽이는 광경과 흉흉한 소문을 보고 들으며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 제주어로 시를 쓰는 황금녀 시인(80)
아홉 살에 겪은 4·3, 아버지는 행방불명되고
황금녀 시인은 1939년 제주 함덕에서 2남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집 앞에 소래물이 있었고 근처에 큰 절이 대여섯 곳 있었다. 다들 터가 좋은 곳이라고 했다. 소래물에는 바다에서 캐온 해산물들을 씻는 데가 있어서 사람들은 미역을 캐오면 그곳에서 미역을 빨았다. 그리고 여자들이 목욕하는 곳과 남자들이 목욕하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 물이 좋아서 사람들이 *물구덕으로 져날랐다. * 물구덕: 제주 물항아리인 물허벅을 넣어 등에 질 때 쓰던 정방형의 대바구니를 부르는 말
황금녀 시인은 어렸을 때 동생들을 데리고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가 일하러 가시면 맏이라 동생들을 돌봐야 했는데 학교에는 가고 싶어서 동생 둘을 데리고 학교에 갔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당시만 해도 학교 바로 앞이 함덕바닷가였다. 그래서 모래사장에 동생 둘을 데려다 놓고 놀고 있으라 하고선 수업을 들었다. 수업 시간 중에도 동생들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서 쉬는 시간만 되면 한달음에 뛰어가보곤 했다. 그때마다 동생들은 다행히 그곳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잘 놀고 있었다. 그러면서 학교를 다녔다.
▲ 어린시절 동생들을 돌보며 학교에 다녔던 황금녀 시인
시인은 아홉 살 때 4·3을 겪었다. 그때 기억이 선명하다. 무서웠다. 어린 마음에 사람들끼리 왜 싸우고 죽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밤이면 무서워서 잠을 자지 못했다. 무장공비와 토벌대 사이에 벌어진 충돌 속에서 선량한 농민들이 많이 죽었다. 당시 ‘산사람’을 폭도라고 했는데, 밤이면 산에서 내려왔다. 그 사람들은 *'와샤와샤' 하면서 마을을 돌았다. 그래서 ‘와샤부대’라고도 했다. *'와샤와샤': '왔어왔어'를 뜻하는 제주어
"산사람들이 밤에 우리 집에 삐라를 뿌리고 갔다. 언제 몇 시까지 안 나오면 친척들까지 전멸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지서에 기와 올리는 일도 하고 마을 일도 보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잘 하셨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주목하였다.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쪽에 가담하지 않으려고 숨어계시기도 했다.
하지만 산사람들이 가족들을 전멸시키겠다고 협박을 하니까 '나 혼자 희생하겠다' 하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가보니 마을 청년들 열 몇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을 청년들에게 '밤에 귀순해서 내려가자'고 하셨다. 밤에 아버지와 마을 청년들은 손을 들고 경찰서로 내려가셨다.
경찰서에서는 자진해서 내려왔으니 사정을 많이 참작해 주겠다고 했다. 그때 제주에는 큰 배가 정기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배에 사람들을 다 태웠다. 그 배를 타고 아버지가 간 곳이 대전형무소였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우리에게 엽서를 보내셨다. 그런데 6·25전쟁이 일어나고 연합군이 인천을 탈환한 후부터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구장을 하셨던 그녀의 할아버지는 유학자이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영향이었던지 아버지도 글을 좋아하셨다. 아버지께서 대전형무소에 계실 때 보내신 엽서가 두세 장 있었는데, 지금은 다 분실하고 한 장만 남아 있다. "한문으로 쓰여 있어서 어린 우리는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다." 그 엽서는 지금 4·3평화공원에 기증되어 그곳에 있다. * 구장: 예전 행정단위인 구의 대표자로 현재의 이장과 흡사하다
4·3사건이 일어났을 때 맏딸인 그녀가 아홉 살이었으니, 아버지는 30대 초반으로 젊으셨을 때였다. 사업가로서 재능도 있고 여러 재주가 있으셨던 분이 4·3을 만나서 그렇게 희생당하셨다. 안타깝고 그립다. 몇 십 년이 흐른 후, 대전 어느 산중턱에 교회를 지으려고 땅을 팠는데 뼈가 엄청 많이 나왔다('골령골 학살'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 오래 사신 나이 많은 분을 시인이 찾아갔더니 전쟁 때 사람들을 몰살했던 장소라고 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경찰들이 대전형무소에 갇힌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이다. 북쪽에서 북한군들이 내려오면 수감자들이 북쪽으로 갈까봐 그랬을 것이다.
시인의 여동생은 혹시라도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함으로 그곳을 왔다갔다 했다. 그 현장을 찍은 비디오를 보니까 우물에 자물쇠를 채워놓은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발굴한 뼈를 화장해서 가져왔는데, 편지봉투의 2/3 정도 양이 되었다. 그것을 4·3평화공원 비석 아래에 묻었다. 그 뼈들이 너무 많아서 아직도 정리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유족들이 모임을 가지고 있다.
남편과 오빠, 조카를 잃고 살아냈던 어머니
아버지가 산에 올라가시고 난 뒤 어머니가 막내 동생을 낳으셨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는 막내 동생을 한 번도 못 보셨다. 어머니가 동생을 낳고 누워 있는데, 토벌대가 와서 남편은 어디 있냐며 아버지를 찾았다. 어머니가 모른다고 하니까 토벌대 사람들이 갓난애를 떼놓고 어머니를 잡아갔다.
▲ 고모, 남동생들과 함께(우측 여자아이가 황금녀 할머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창고가 있었는데, 그 창고 안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와서 취조를 당하고 있었다. 그때는 분유도 없을 때라 젖을 먹일 어머니가 없으면 갓난애는 굶을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젖동냥을 할 만한 데도 없었다. 갓난애가 배가 고파서 울면 할머니도 같이 우셨다. 하루는 갓난애가 하도 울어서 할머니가 갓난애를 안고 어머니가 취조 받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셨다.
할머니가 창고 앞에서 갓난애를 안고 울고 있으니까 한 군인이 나와서는 할머니를 어머니가 계신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가 갓난애를 안고 젖을 물렸지만 젖은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 갇혀서 갓난아이를 그리워 하다가 배고파서 우는 갓난애에게 젖도 주지 못하고 돌려보낸 어머니 심정이 어떠셨을지…."
다행히 어머니는 희생을 면하셨지만 4·3사건으로 아버지와 외삼촌, 사촌오빠 등 많은 친척들이 희생되었다. 엄마가 밭일을 하실 때면 어린 남동생 둘을 그녀가 업고 키웠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까' 하는 생각에 서글펐다.
"아직도 지서가 불에 타는 장면이나 밤중에 동네 방앗간에서 들리던 여자 울음소리가 생생히 기억난다. 당시 동네에 말을 이용해 방아를 돌리는 방앗간이 몇 개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보리 같은 곡식을 갈러 오곤 했다. 소래물 옆에도 방앗간이 있었다. 그런데 4·3때 산사람인지 군인인지 그곳에 여자를 끌고 가서 몹쓸 짓을 저지른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때는 어렸을 때라 여자 울음소리만 생생하게 기억할 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지는 알지 못했다.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동네에서 벌어진 끔찍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너무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 우리는 왜 그런 것들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까."
시인의 어머니는 남편과 오빠, 조카를 잃었다.
"어머니가 그 모든 것을 어찌 감당하고 사셨을까 싶다. 어른이 되면 어머니의 마음을 글로 써서 위로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만 그러신 게 아니라 당시 희생당한 분이 3만여 명이었으니 그런 슬픔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참담한 고통을 겪으셨던 어머니와 친척, 이웃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그 일들을 기록하고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시집 <베롱한 싀상>을 세상에 내놓았다.
"만약 내가 기록해 놓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그때 그분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외할머니 가슴이 어떠했겠는지, 그때 얼마나 비참했었는지 같은 것 말이다."
'베롱한 싀상'은 깜깜한 밤이 점차 밝아지는 여명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4·3사건에 대해서 입도 못 열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은 진실이 밝혀져 나라에서 4·3평화공원을 만들고 4월 3일을 국가 추념일로 지정했다. 그만큼 세상이 밝아졌다는 뜻을 담았다.
<베롱한 싀상> 외에도 <이제 호쏠 싀상 베끳더레 나가보카>, <둥근 달이 청멩케 넘어감서고>, <고른베기> 등 십여 권의 시집을 통해 4․3의 아픔과 진실을 알리는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인은 어린이들에게 제주어의 소중함과 제주의 옛 정취를 일깨운 공로로 2016년 종려나무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제주어 보전활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자랑스러운 제주인상을 수상했다.
'베롱한 싀상' 향한 간절함으로 쓰는 시
4·3사건 때 시인의 외삼촌은 마을 이장이었다. 하루는 경찰이 마을 사람들더러 연설을 들으러 관대모살밭으로 나오라고 했다. 관대모살밭은 넓은 모래밭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곳으로 나갔더니 경찰들은 모래 구덩이 여덟 개를 파놓고 그 앞에 청년 한 사람씩을 세워놓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 외삼촌은 저 청년들을 살려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친구하고 둘이서 앞으로 뛰어가서 사정을 했다. "이번만 살려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그쪽에서는 알았다고 말하고는 외삼촌과 친구에게 서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청년들을 다 쏴 죽였다. 그날 외삼촌과 그 친구 분도 죽고 말았다. 나중에 나라에서 외삼촌과 그 친구 분을 의사자(義死者)로 지정하고 비석을 함덕 마을회관 마당에 세워주었다.
그 외삼촌한테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외삼촌의 아들도 지금 제주국제공항 자리인 *정뜨르비행장에서 죽고 말았다. 그녀의 외숙모는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으신 것이다. 외숙모 곁에는 한 돌도 되지 않은 손자 하나와 역시 남편을 잃은 며느리만 남았다. *정뜨르비행장: 일제 강점기 당시 제주국제공항 부지에 건설된 일본군 시설. '정뜨르'는 우물이 있는 넓은 들이란 뜻으로 당시 지역 주민들이 비행장 부지를 ‘정뜨르’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외가에 가면 먼 골목에서부터 처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외숙모가 애기구덕을 흔들면서 그 한을 푸시는 소리였다. 그때 쟁쟁쟁 애기구덕을 흔들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시집 <베롱한 싀상> 마지막에 실린 '애기 재우는 소리'는 이때의 기억을 담아서 써낸 것이다. 여기에는 옛날에 제주 사람들이 애기구덕을 흔들면서 불렀던 노래 구절도 들어가 있다.
애기 재우는 소리
죄 엇이도 죽을 수가 이섯구나 무자년 그 봄엔 ㅎ·ㅎ·다 울지 말라 느가 울민 나 가심에 불ㅅ·ㅁㅁ암저 느 가심이 나 가심이여 늘랑 날 직산ㅎ·곡 날랑 늘 직산ㅎ·곡 두린 손지 키와사 ㅎ·느네 자랑자랑 왕이자랑 왕ㄱ·ㅌ이 귀헌 우리 애기 잘도 잔다 금을 주민 너를 사멍 은을 주민 너를 사랴 애기구덕 흥글어가멍 이 가심에 불이나 끼와지곡 우리 메느린 ㅎ·다ㅎ·다 울지말라 어멍 젯꼭지가 연드러웡 젯맛이 좋으민 어멍 ㅁ·심이 좋은 날이로구나 ㅎ·곡 어멍 젯꼭지가 굳엉 젯맛이 엇이민 우리 어멍 ㅁ·심에 거시린 일이 싯구나 ㅎ·멍 애기가 패와지질 못ㅎ·느네 자랑자랑 왕이자랑 왕ㄱ·ㅌ이 귀헌 우리 애기 잘도 잔다
오롯이 제주어로 시를 쓰는 그녀는 "우리의 고어(古語)이자 제주 사람들의 모어(母語)인 제주어를 '우리들의 언어'로 살려내고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간절함을 품고 있다.
'모든 삶은 기록한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모토로 '기억의책'을 만드는 주식회사 꿈틀의 편집장.
* <주식회사 꿈틀>은 제주에서 시작된 출판사이며 사회적기업으로, ‘기억의책’을 만들고 있다. '기억의책'은 평범한 어르신들의 삶의 기억과 사진을 모아 만든 간략한 자서전이며, 2017년까지 가족 또는 지자체 의뢰로 110여 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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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의 아픔, 오롯이 제주말로 어루만지다
제주어 시인 황금녀
박범준
2018-04-02
2018년 70주년을 맞은 제주4·3은 여전히 생생한 아픔이다. 제주사람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그 비극에 관여된 가족이나 이웃이 한 두 사람쯤 있기 마련이다. 동시를 쓰는 황금녀 시인에게도 4·3은 생생한 아픔이다. 함덕 바닷가에 살던 젊은 가장이었던 시인의 아버지는 4·3에 연루되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아홉 살 어린 소녀는 이웃들이 죽고 죽이는 광경과 흉흉한 소문을 보고 들으며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 제주어로 시를 쓰는 황금녀 시인(80)
아홉 살에 겪은 4·3, 아버지는 행방불명되고
황금녀 시인은 1939년 제주 함덕에서 2남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집 앞에 소래물이 있었고 근처에 큰 절이 대여섯 곳 있었다. 다들 터가 좋은 곳이라고 했다. 소래물에는 바다에서 캐온 해산물들을 씻는 데가 있어서 사람들은 미역을 캐오면 그곳에서 미역을 빨았다. 그리고 여자들이 목욕하는 곳과 남자들이 목욕하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 물이 좋아서 사람들이 *물구덕으로 져날랐다.
* 물구덕: 제주 물항아리인 물허벅을 넣어 등에 질 때 쓰던 정방형의 대바구니를 부르는 말
황금녀 시인은 어렸을 때 동생들을 데리고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가 일하러 가시면 맏이라 동생들을 돌봐야 했는데 학교에는 가고 싶어서 동생 둘을 데리고 학교에 갔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당시만 해도 학교 바로 앞이 함덕바닷가였다. 그래서 모래사장에 동생 둘을 데려다 놓고 놀고 있으라 하고선 수업을 들었다. 수업 시간 중에도 동생들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서 쉬는 시간만 되면 한달음에 뛰어가보곤 했다. 그때마다 동생들은 다행히 그곳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잘 놀고 있었다. 그러면서 학교를 다녔다.
▲ 어린시절 동생들을 돌보며 학교에 다녔던 황금녀 시인
시인은 아홉 살 때 4·3을 겪었다. 그때 기억이 선명하다. 무서웠다. 어린 마음에 사람들끼리 왜 싸우고 죽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밤이면 무서워서 잠을 자지 못했다. 무장공비와 토벌대 사이에 벌어진 충돌 속에서 선량한 농민들이 많이 죽었다. 당시 ‘산사람’을 폭도라고 했는데, 밤이면 산에서 내려왔다. 그 사람들은 *'와샤와샤' 하면서 마을을 돌았다. 그래서 ‘와샤부대’라고도 했다.
*'와샤와샤': '왔어왔어'를 뜻하는 제주어
"산사람들이 밤에 우리 집에 삐라를 뿌리고 갔다. 언제 몇 시까지 안 나오면 친척들까지 전멸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지서에 기와 올리는 일도 하고 마을 일도 보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잘 하셨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주목하였다.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쪽에 가담하지 않으려고 숨어계시기도 했다.
하지만 산사람들이 가족들을 전멸시키겠다고 협박을 하니까 '나 혼자 희생하겠다' 하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가보니 마을 청년들 열 몇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을 청년들에게 '밤에 귀순해서 내려가자'고 하셨다. 밤에 아버지와 마을 청년들은 손을 들고 경찰서로 내려가셨다.
경찰서에서는 자진해서 내려왔으니 사정을 많이 참작해 주겠다고 했다. 그때 제주에는 큰 배가 정기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배에 사람들을 다 태웠다. 그 배를 타고 아버지가 간 곳이 대전형무소였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우리에게 엽서를 보내셨다. 그런데 6·25전쟁이 일어나고 연합군이 인천을 탈환한 후부터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구장을 하셨던 그녀의 할아버지는 유학자이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영향이었던지 아버지도 글을 좋아하셨다. 아버지께서 대전형무소에 계실 때 보내신 엽서가 두세 장 있었는데, 지금은 다 분실하고 한 장만 남아 있다. "한문으로 쓰여 있어서 어린 우리는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다." 그 엽서는 지금 4·3평화공원에 기증되어 그곳에 있다.
* 구장: 예전 행정단위인 구의 대표자로 현재의 이장과 흡사하다
4·3사건이 일어났을 때 맏딸인 그녀가 아홉 살이었으니, 아버지는 30대 초반으로 젊으셨을 때였다. 사업가로서 재능도 있고 여러 재주가 있으셨던 분이 4·3을 만나서 그렇게 희생당하셨다. 안타깝고 그립다. 몇 십 년이 흐른 후, 대전 어느 산중턱에 교회를 지으려고 땅을 팠는데 뼈가 엄청 많이 나왔다('골령골 학살'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 오래 사신 나이 많은 분을 시인이 찾아갔더니 전쟁 때 사람들을 몰살했던 장소라고 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경찰들이 대전형무소에 갇힌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이다. 북쪽에서 북한군들이 내려오면 수감자들이 북쪽으로 갈까봐 그랬을 것이다.
시인의 여동생은 혹시라도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함으로 그곳을 왔다갔다 했다. 그 현장을 찍은 비디오를 보니까 우물에 자물쇠를 채워놓은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발굴한 뼈를 화장해서 가져왔는데, 편지봉투의 2/3 정도 양이 되었다. 그것을 4·3평화공원 비석 아래에 묻었다. 그 뼈들이 너무 많아서 아직도 정리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유족들이 모임을 가지고 있다.
남편과 오빠, 조카를 잃고 살아냈던 어머니
아버지가 산에 올라가시고 난 뒤 어머니가 막내 동생을 낳으셨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는 막내 동생을 한 번도 못 보셨다. 어머니가 동생을 낳고 누워 있는데, 토벌대가 와서 남편은 어디 있냐며 아버지를 찾았다. 어머니가 모른다고 하니까 토벌대 사람들이 갓난애를 떼놓고 어머니를 잡아갔다.
▲ 고모, 남동생들과 함께(우측 여자아이가 황금녀 할머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창고가 있었는데, 그 창고 안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와서 취조를 당하고 있었다. 그때는 분유도 없을 때라 젖을 먹일 어머니가 없으면 갓난애는 굶을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젖동냥을 할 만한 데도 없었다. 갓난애가 배가 고파서 울면 할머니도 같이 우셨다. 하루는 갓난애가 하도 울어서 할머니가 갓난애를 안고 어머니가 취조 받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셨다.
할머니가 창고 앞에서 갓난애를 안고 울고 있으니까 한 군인이 나와서는 할머니를 어머니가 계신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가 갓난애를 안고 젖을 물렸지만 젖은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 갇혀서 갓난아이를 그리워 하다가 배고파서 우는 갓난애에게 젖도 주지 못하고 돌려보낸 어머니 심정이 어떠셨을지…."
다행히 어머니는 희생을 면하셨지만 4·3사건으로 아버지와 외삼촌, 사촌오빠 등 많은 친척들이 희생되었다. 엄마가 밭일을 하실 때면 어린 남동생 둘을 그녀가 업고 키웠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까' 하는 생각에 서글펐다.
"아직도 지서가 불에 타는 장면이나 밤중에 동네 방앗간에서 들리던 여자 울음소리가 생생히 기억난다. 당시 동네에 말을 이용해 방아를 돌리는 방앗간이 몇 개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보리 같은 곡식을 갈러 오곤 했다. 소래물 옆에도 방앗간이 있었다. 그런데 4·3때 산사람인지 군인인지 그곳에 여자를 끌고 가서 몹쓸 짓을 저지른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때는 어렸을 때라 여자 울음소리만 생생하게 기억할 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지는 알지 못했다.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동네에서 벌어진 끔찍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너무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 우리는 왜 그런 것들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까."
시인의 어머니는 남편과 오빠, 조카를 잃었다.
"어머니가 그 모든 것을 어찌 감당하고 사셨을까 싶다. 어른이 되면 어머니의 마음을 글로 써서 위로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만 그러신 게 아니라 당시 희생당한 분이 3만여 명이었으니 그런 슬픔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참담한 고통을 겪으셨던 어머니와 친척, 이웃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그 일들을 기록하고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시집 <베롱한 싀상>을 세상에 내놓았다.
▲ '제주어로 노래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황금녀 시인의 첫 제주어 시집 <베롱한 싀상> 출처: 도서출판 각 http://www.gakbook.com/
"만약 내가 기록해 놓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그때 그분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외할머니 가슴이 어떠했겠는지, 그때 얼마나 비참했었는지 같은 것 말이다."
'베롱한 싀상'은 깜깜한 밤이 점차 밝아지는 여명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4·3사건에 대해서 입도 못 열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은 진실이 밝혀져 나라에서 4·3평화공원을 만들고 4월 3일을 국가 추념일로 지정했다. 그만큼 세상이 밝아졌다는 뜻을 담았다.
<베롱한 싀상> 외에도 <이제 호쏠 싀상 베끳더레 나가보카>, <둥근 달이 청멩케 넘어감서고>, <고른베기> 등 십여 권의 시집을 통해 4․3의 아픔과 진실을 알리는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인은 어린이들에게 제주어의 소중함과 제주의 옛 정취를 일깨운 공로로 2016년 종려나무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제주어 보전활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자랑스러운 제주인상을 수상했다.
'베롱한 싀상' 향한 간절함으로 쓰는 시
4·3사건 때 시인의 외삼촌은 마을 이장이었다. 하루는 경찰이 마을 사람들더러 연설을 들으러 관대모살밭으로 나오라고 했다. 관대모살밭은 넓은 모래밭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곳으로 나갔더니 경찰들은 모래 구덩이 여덟 개를 파놓고 그 앞에 청년 한 사람씩을 세워놓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 외삼촌은 저 청년들을 살려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친구하고 둘이서 앞으로 뛰어가서 사정을 했다. "이번만 살려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그쪽에서는 알았다고 말하고는 외삼촌과 친구에게 서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청년들을 다 쏴 죽였다. 그날 외삼촌과 그 친구 분도 죽고 말았다. 나중에 나라에서 외삼촌과 그 친구 분을 의사자(義死者)로 지정하고 비석을 함덕 마을회관 마당에 세워주었다.
그 외삼촌한테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외삼촌의 아들도 지금 제주국제공항 자리인 *정뜨르비행장에서 죽고 말았다. 그녀의 외숙모는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으신 것이다. 외숙모 곁에는 한 돌도 되지 않은 손자 하나와 역시 남편을 잃은 며느리만 남았다.
*정뜨르비행장: 일제 강점기 당시 제주국제공항 부지에 건설된 일본군 시설. '정뜨르'는 우물이 있는 넓은 들이란 뜻으로 당시 지역 주민들이 비행장 부지를 ‘정뜨르’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외가에 가면 먼 골목에서부터 처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외숙모가 애기구덕을 흔들면서 그 한을 푸시는 소리였다. 그때 쟁쟁쟁 애기구덕을 흔들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시집 <베롱한 싀상> 마지막에 실린 '애기 재우는 소리'는 이때의 기억을 담아서 써낸 것이다. 여기에는 옛날에 제주 사람들이 애기구덕을 흔들면서 불렀던 노래 구절도 들어가 있다.
애기 재우는 소리
죄 엇이도 죽을 수가 이섯구나
무자년 그 봄엔
ㅎ·ㅎ·다 울지 말라
느가 울민
나 가심에 불ㅅ·ㅁㅁ암저
느 가심이 나 가심이여
늘랑 날 직산ㅎ·곡
날랑 늘 직산ㅎ·곡
두린 손지 키와사 ㅎ·느네
자랑자랑 왕이자랑
왕ㄱ·ㅌ이 귀헌 우리 애기 잘도 잔다
금을 주민 너를 사멍
은을 주민 너를 사랴
애기구덕 흥글어가멍
이 가심에 불이나 끼와지곡
우리 메느린 ㅎ·다ㅎ·다 울지말라
어멍 젯꼭지가 연드러웡 젯맛이 좋으민
어멍 ㅁ·심이 좋은 날이로구나 ㅎ·곡
어멍 젯꼭지가 굳엉 젯맛이 엇이민
우리 어멍 ㅁ·심에
거시린 일이 싯구나 ㅎ·멍
애기가 패와지질 못ㅎ·느네
자랑자랑 왕이자랑
왕ㄱ·ㅌ이 귀헌 우리 애기 잘도 잔다
오롯이 제주어로 시를 쓰는 그녀는 "우리의 고어(古語)이자 제주 사람들의 모어(母語)인 제주어를 '우리들의 언어'로 살려내고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간절함을 품고 있다.
'모든 삶은 기록한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모토로 '기억의책'을 만드는 주식회사 꿈틀의 편집장.
* <주식회사 꿈틀>은 제주에서 시작된 출판사이며 사회적기업으로, ‘기억의책’을 만들고 있다.
'기억의책'은 평범한 어르신들의 삶의 기억과 사진을 모아 만든 간략한 자서전이며, 2017년까지 가족 또는 지자체 의뢰로 110여 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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