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하나가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짧고도 긴 일생을 통틀어 쌓은 경험으로 응축시킨 자신만의 정수, 지혜를 남기는 일은 정말 가치가 높다. 그 대상이 아주 '평범한' 노인이라 할지라도. 증명과 실험을 통해 잘 정리된 백과사전의 한 줄보다 어쩌면 더.
▲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에 모인 마을동화팀
매년 여름, 경상북도 칠곡군에는 전국에서 팀을 이룬 대학생들이 '인문학 콘텐츠 제작'이라는 진지한 임무를 갖고 모인다. 올해는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자신의 친필로 쓴 책자 제작,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동화작업, 마을의 역사와 주민의 삶을 기록하는 구술사 작업, 마을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한 마을 CF, 도자기공예와 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조형물 제작 활동으로 나뉘어 각 다섯 개 마을에서 6박 7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중 필자가 글쓰기 부분 강사로 참여한 '마을 동화 작업'의 시간을 나누고자 한다.
▲ 첫번째 인터뷰를 나누는 할머니 그리고 참가자
경험이 전무한 학생들은 간단한 강의를 통해 인터뷰와 녹취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파악한다. 그리고 짝이 된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가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어 그 자신조차 되새길 여유 없이 잊고 살던 당신만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그 오래된 것을 꺼내는 작업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매우 특별한 경험이 된다. 내가 이런 아이었고, 딸, 아들이었고, 꿈이 있는 소년소녀였고, 내 이야기를 들으러 와준 젊은이들이던 때가 있었고,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을 궁금해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까지. 할 이야기가 없다며 망설이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느새 설레는 아이의 얼굴을 하고 끊임없이 기억을 쏟아낸다.
동화책 완성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접근했던 우리들은 또 어떠한가. 점차 길고 진한 그들에 인생에 빠져들고 이해하게 되고 이입이 되면서 어느새 손을 잡아드리고 눈물을 흘린다.
▲ 녹취작업
두어 차례의 진심 어린 인터뷰는 긴 녹취 작업을 통해 몇 장의 종이로 남는다. 이 녹취 작업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투리, 어조, 의태어 등 그들만의 언어적 지문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이 동화의 이야기 구성이나 인물 묘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녹취록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개요를 잡아간다.
특별한 소재나 사건을 찾지 못해 도무지 갈피를 못 잡던 학생들은 긴 녹취록을 반복해서 살피고 간추리고 주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작은 것도 큰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유유히 흘러온 그 삶 자체가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간다. 특별할 것 없다 생각했던 할머니의 취미, '사군자'에 주목한 몇몇 친구들은 할머니가 가장 멋지게 그려내는 '매화'의 씨앗과 꽃, 그 사이의 시간을 통해 할머니의 굴곡진 삶을 따뜻하게 그려냈다. 또한 일생에 별일이 없어 심심하기만 했다는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에서는 할머니의 욕심 없고 맑은 성정을 읽어내며 '000할머니! 만족왕 되다!'라는 이야기를 찾아드렸다.
▲ 녹취를 통해 나온 개요도
이야기 개요를 찾아낸 후, 간단한 미술수업을 통해 각 재료별 특징과 질감을 익힌 학생들은 스스로 동화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완성될 동화책을 자세히 상상한 더미북을 완성하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를 마무리한다. 원본 그림과 원고, 더미북을 토대로 출판 작업을 진행하는 대로 멋진 동화책이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 동화책을 구성할 그림원본1,2 / 동화책 더미북
이러한 과정 사이사이 참가자들은 몇 번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가 함께 마을을 거닐고 밥을 먹고 그림일기도 그리며 그들의 손녀, 손자가 된다. 이쯤 되면 참가자들은 모든 것에 흠뻑 빠져 이제는 완성이라는 목표가 아닌 자신들에게 삶을 들려준 당신의 평범한 이야기는 사실 이리도 예쁘고 특별하다는 걸 보여주고픈 목표에 마음을 두게 된다.
6박 7일의 시간, 네 명이 모인 한 팀이 두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각각 하나의 이야기, 결과적으로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쓰고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거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샌가 할머니 할아버지에 목표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 할머니와 이미 손자가 되어버린 참가자 / 어르신을 위한 마을잔치
그렇게 모든 일정 중 하루를 남기고 책을 구성할 문장과 그림을 완성한 참가자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마을 잔치를 열었다. 어르신들 곁에 찰싹 붙어 울고 웃으며 짧지만 길었던 6박 7일의 시간을 정리했다. 누구에게 그토록 길고 깊은 이야기를 해봤을까. 어떤 누구의 길고 깊은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봤을까. 생각해보면 들려준 이에게도 들어준 이에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련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방지민은 앞뒤 다 버리면 이름이 신비한 동네 수성에 사는 대구 시민. 얕고 사사로운 재미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책방 '슬기로운낙타'의 사장이자 종업원이다.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살기 위해 뭐든 지망생의 마음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서머싯 몸의 소설 주인공
스트릭랜드와 래리를 인생 대선배로 품고 있다. 작지만 힘을 실어줄 가치가 있는 의미들에게 확성기를 대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인문쟁이가 되었다.
jimin11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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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경험으로 더해지는 책 만들기
칠곡, 인문학활동마을의 '마을동화제작'
인문쟁이 방지민
2016-08-30
'노인 하나가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짧고도 긴 일생을 통틀어 쌓은 경험으로 응축시킨 자신만의 정수, 지혜를 남기는 일은 정말 가치가 높다. 그 대상이 아주 '평범한' 노인이라 할지라도. 증명과 실험을 통해 잘 정리된 백과사전의 한 줄보다 어쩌면 더.
▲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에 모인 마을동화팀
매년 여름, 경상북도 칠곡군에는 전국에서 팀을 이룬 대학생들이 '인문학 콘텐츠 제작'이라는 진지한 임무를 갖고 모인다. 올해는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자신의 친필로 쓴 책자 제작,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동화작업, 마을의 역사와 주민의 삶을 기록하는 구술사 작업, 마을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한 마을 CF, 도자기공예와 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조형물 제작 활동으로 나뉘어 각 다섯 개 마을에서 6박 7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중 필자가 글쓰기 부분 강사로 참여한 '마을 동화 작업'의 시간을 나누고자 한다.
▲ 첫번째 인터뷰를 나누는 할머니 그리고 참가자
경험이 전무한 학생들은 간단한 강의를 통해 인터뷰와 녹취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파악한다. 그리고 짝이 된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가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어 그 자신조차 되새길 여유 없이 잊고 살던 당신만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그 오래된 것을 꺼내는 작업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매우 특별한 경험이 된다. 내가 이런 아이었고, 딸, 아들이었고, 꿈이 있는 소년소녀였고, 내 이야기를 들으러 와준 젊은이들이던 때가 있었고,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을 궁금해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까지. 할 이야기가 없다며 망설이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느새 설레는 아이의 얼굴을 하고 끊임없이 기억을 쏟아낸다.
동화책 완성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접근했던 우리들은 또 어떠한가. 점차 길고 진한 그들에 인생에 빠져들고 이해하게 되고 이입이 되면서 어느새 손을 잡아드리고 눈물을 흘린다.
▲ 녹취작업
두어 차례의 진심 어린 인터뷰는 긴 녹취 작업을 통해 몇 장의 종이로 남는다. 이 녹취 작업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투리, 어조, 의태어 등 그들만의 언어적 지문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이 동화의 이야기 구성이나 인물 묘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녹취록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개요를 잡아간다.
특별한 소재나 사건을 찾지 못해 도무지 갈피를 못 잡던 학생들은 긴 녹취록을 반복해서 살피고 간추리고 주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작은 것도 큰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유유히 흘러온 그 삶 자체가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간다. 특별할 것 없다 생각했던 할머니의 취미, '사군자'에 주목한 몇몇 친구들은 할머니가 가장 멋지게 그려내는 '매화'의 씨앗과 꽃, 그 사이의 시간을 통해 할머니의 굴곡진 삶을 따뜻하게 그려냈다. 또한 일생에 별일이 없어 심심하기만 했다는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에서는 할머니의 욕심 없고 맑은 성정을 읽어내며 '000할머니! 만족왕 되다!'라는 이야기를 찾아드렸다.
▲ 녹취를 통해 나온 개요도
이야기 개요를 찾아낸 후, 간단한 미술수업을 통해 각 재료별 특징과 질감을 익힌 학생들은 스스로 동화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완성될 동화책을 자세히 상상한 더미북을 완성하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를 마무리한다. 원본 그림과 원고, 더미북을 토대로 출판 작업을 진행하는 대로 멋진 동화책이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 동화책을 구성할 그림원본1,2 / 동화책 더미북
이러한 과정 사이사이 참가자들은 몇 번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가 함께 마을을 거닐고 밥을 먹고 그림일기도 그리며 그들의 손녀, 손자가 된다. 이쯤 되면 참가자들은 모든 것에 흠뻑 빠져 이제는 완성이라는 목표가 아닌 자신들에게 삶을 들려준 당신의 평범한 이야기는 사실 이리도 예쁘고 특별하다는 걸 보여주고픈 목표에 마음을 두게 된다.
6박 7일의 시간, 네 명이 모인 한 팀이 두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각각 하나의 이야기, 결과적으로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쓰고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거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샌가 할머니 할아버지에 목표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 할머니와 이미 손자가 되어버린 참가자 / 어르신을 위한 마을잔치
그렇게 모든 일정 중 하루를 남기고 책을 구성할 문장과 그림을 완성한 참가자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마을 잔치를 열었다. 어르신들 곁에 찰싹 붙어 울고 웃으며 짧지만 길었던 6박 7일의 시간을 정리했다. 누구에게 그토록 길고 깊은 이야기를 해봤을까. 어떤 누구의 길고 깊은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봤을까. 생각해보면 들려준 이에게도 들어준 이에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련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사진=방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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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쟁이 2기]
방지민은 앞뒤 다 버리면 이름이 신비한 동네 수성에 사는 대구 시민. 얕고 사사로운 재미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책방 '슬기로운낙타'의 사장이자 종업원이다.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살기 위해 뭐든 지망생의 마음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서머싯 몸의 소설 주인공 스트릭랜드와 래리를 인생 대선배로 품고 있다. 작지만 힘을 실어줄 가치가 있는 의미들에게 확성기를 대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인문쟁이가 되었다. jimin1137@naver.com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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