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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

테마로 읽는 이주의 양식

그리스의 끝 마니

펠로폰네소스 남부 여행기

2020.01.10



봄날의 책 세계 산문선 그리스의 끝 마니 펠레폰네소스 남부 여행기 패트릭 리 퍼머 강경이 옮김 봄날의 책

패트릭 리 퍼머 지음 / 강경이 옮김




"시골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내일이 오면 우리는 라코니아 만의 맨 위에 있는 기티오로 출발한다. 평평한 옥상 전체에 두툼하게 깔아놓은 갓 탈곡한 곡식 위에 대여섯 개의 담요를 깔고 포도주에 기분 좋게 취해 달빛 아래 누워 있자니 마니를 떠나는 게 아쉬웠다. 폐허가 된 탑들이 사방에 서 있었다. 비탈 아래 조금 떨어진 곳으로 흐르는 시냇가의 나무들 사이에서 나이팅게일이 울었다. 그 소리에 모든 것이 훨씬 더 청아하고 덧없고 슬프게 느껴졌다. 한쪽 면을 베어 먹힌 달의 모습으로 보아 이미 보름이 지났지만 달은 여전히 무척 환해서 하늘 귀퉁이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알 수 없는 별 몇 개만 보였다. 시인 사포가 말했듯 달이 꽉 차 온 세상을 비출 때 별들은 몸을 숨긴다. 며칠 후면 모든 유명한 별자리와 수많은 다른 별들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변함없는 모습의 하늘을 가로질러 여름 혜성이 길고 변덕스러운 호를 그리며 떨어질 것이다. 늘 밖에서 잠을 자다 보니 이제 하늘을 천천히 가로질러 행진하는 별들의 모습도 익숙해지고 말았다."


_ 『그리스의 끝 마니  460p






여행이란 삶이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을 열망하는 것 

‘크레타의 게릴라 대장’, 패트릭 리 퍼머


그리스는 모든 곳이 흥미진진하고 어디에나 이야깃거리가 깃들어 있다. 어느 바위건 개울이건 전투나 신화, 기적, 이름 모를 어느 농부의 이야기, 미신이 얽히지 않은 곳이 없다. 여행자가 내걷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기억할 만한 기이한 이야기와 사건이 무성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그 넓고 깊은 그리스를 일필휘지로 묘사하기는 퍼머에게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아니, 불가능했으리라. 하여, ‘마니’라는 황량하고 쓸쓸한 도시로 우회한다. 퍼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댄다. “그리스에 대한 여행기를 제대로 쓰려면 어느 한 곳을 정해 할 수 있는 한 깊숙이 침투해야 한다. …… 그 편이 독자들도 ……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그리스의 훨씬 넓은 지평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이다. 그러니 퍼머에게 마니는 하데스의 입구가 아니라 그리스의 너른 지평으로 인도하는 입구인 셈이다.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 그는 “통신이 조악하고 외진 곳에 사는 탓에 환경과 역사의 오랜 관계가 그다지 훼손되지 않은 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자취를 감추기 전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쓴다.


마니는 이런 곳이다. 유럽의 최남단 심장부의 마니는 그리스에서 가장 동떨어지고 황량하며 고립된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우뚝 솟은 타이게토스 산맥으로 나머지 그리스와 단절되어 있고,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에 둘러싸인 마니는 과거로부터의 오랜 전통이 일상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곧 고대 세상과 20세기가 공존하는 곳. 마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산악지대는 마니인들의 조상인 스파르타인들이 스파르타 몰락 이후 피신한 곳이다. 분명 이곳은 깎아지른 듯 가파르고 황량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수 세기 동안 다른 지역의 삶으로부터 단절된 마니에는 과거의 유물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예외가 풍부하다.


한편 퍼머에게 낯선 이름들은 아주 각별하다. 그의 글은 무엇보다 낯선 이름을 쫓는 설렘,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묘미를 전해준다. 그의 비범한 문체는 특히 ‘그리스’라는 주제와 잘 맞는다. 그의 산문에서 펼쳐지는 화려함과 아름다운 굴곡은 그리스의 매혹적인 바위투성이 풍경과 특히 잘 어울린다. 그 누구도 한 장소와 그곳에 사는 사람에 이토록 해박한 지식과 감수성으로 반응하지 못할 것이다. 무릇, 좋은 글이란 낯선 이름,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에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해 가장 비범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낯선 것을 가장 새로운 것으로 창조해내는 마술.


담쟁이처럼 퍼머의 문장은 뻗어간다. 집요한 생명력을 지닌, 이파리가 무성한 덩굴처럼 화려한 문장이 산맥을 넘고 협곡을 건너 외딴 마을과 폐허를 돌아 신화와 종교, 역사, 예술, 구비설화, 환상을 넘나들며 내달린다. 웬만하면 멈출 만도 한데 그는 멈추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면 펜을 내려놓을 곳에서 퍼머의 펜은 집요하게 전진한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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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리 퍼머
패트릭 리 퍼머
패트릭 리 퍼머(Patrick Leigh Fermor)

‘패디’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영국의 전쟁영웅이자, 독특한 문체와 깊이 있는 관찰이 돋보이는 20세기 최고의 여행작가 중 한 사람이다. 18살이던 1933년 네덜란드의 훅판홀란트에서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까지 이르는 유럽 종단 도보여행을 감행했고, 훗날 <선물 받은 시간>(1977)과 <숲과 강 사이로>(1986), <막힌 길>(2013)을 출간하여 찬사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왕실근위대에 입대했고 특수작전집행부 소속의 연락장교로 그리스와 크레타 전선에 파견되어 독일군 군정장관을 납치하는 성과를 올렸다. 대영제국 4등 훈장과 수훈장을 받았다. 평생의 후원자이자 동료였던 사진작가 조앤 레이너와 만난 지 24년 만에 결혼해 그리스 마니의 올리브 숲에 정착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살았다. W. H. 스미스 문학상과 토마스 쿡 여행도서상, 더프 쿠퍼 기념상 등 많은 상을 받았으며, 문학적 성과와 영국-그리스 관계에 끼친 공로로 2004년에 대영제국의 기사작위를 받았다.
이미지 출처_ⓒ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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