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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가만히 읽는 당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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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주뺄빼’, 줄 때 주고 뺄 때 빼고

by 대구 김주영 / 2018.04.02

 

 

그런 순간이 있다. 종이 속에 까만 점으로만 머물러 있던 문장이, 혹은 단어가 슬그머니 살아나 머리를 울리고 가슴을 치는 순간.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에서 지나친 시 한 구절이 두고두고 생각이 나는 순간. 감흥 없이 듣던 노래가사의 뜻이 갑자기 이해되는 순간. 공연이 끝난 텅 빈 무대 위에서 시원하면서도 동시에 섭섭한 감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는 순간. 유난히도 몸이 말을 듣지 않던 날 의미 없는 몸짓만 허공에 뿌리다 집에 돌아오는 길,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차창 밖으로 떠오르는 순간.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과 경험으로 깨달음을 얻으면서 살아간다. 고요한 물가에 찌를 던지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얻기도 하고, 바쁘게 일을 하다가,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목 놓아 울다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얻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제각각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가지만,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타인의 삶에서 떠오른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와 어딘가 닮아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참 다르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턴을 배우던 날, 끝이 없는 블랙홀


거울 속 선생님을 따라 몸을 돌려보지만 이내 원심력을 잃고 위태위태하게 쓰러져가는 팽이처럼 휘청휘청한다. 앞을 보다가 몸을 돌려 옆과 뒤를 본 뒤 다시 앞을 보는 것. 풀어쓰니 참 간단한 것 같은데도 막상 직접 해보니 이리 뒤뚱 저리 뒤뚱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이다. 무작정 많이 돌아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싶어 몇 번 도니 하늘이 빙빙 돌고 어느새 손은 바닥으로 향한다. 울렁거리는 속은 덤이다. 어지러우면 어떡하느냐고 물으니 그럼 반대로 돌면 된단다. 

 

팽이

▲  팽이처럼 쌩쌩 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3번만 돌아도 어질어질하더니 그 한계가 4번이 되고 5번이 되었다. 많이 돌다보니 그새 익숙해진 모양인지 처음보다 휘청거리지도 않고 앞도 곧잘 바라본다. 오른쪽으로 돌다가 어지러우면 다시 왼쪽으로 돌기를 반복하니 마치 인간팽이가 된 것 같다. 울렁거리는 속도 이제는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팔 모양까지 신경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 참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곧잘 돌기도 하고, 모양도 많이 다듬었는데 어딘가 불안하고 쓰러질 것만 같다. 턴을 쉽게 돌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모양이 망가진다. 오른쪽이 그나마 좀 괜찮아지는가 싶으면 왼쪽이 안 된다. 왼쪽으로 도는 걸 몇 번 연습하고 나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처음 상태로 무한리셋이다. 와- 이것 참 끝이 없는 블랙홀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


하루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내가 턴 도는 것을 몇 번 보시더니 “바보야, 힘을 빼고 돌아야지-.” 하신다. 힘을 빼면 예쁜 모양이 다 망가질 텐데- 하는 생각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선생님께서 덧붙이셨다. “힘을 줘야하는 곳은 중심이야. 중심에 힘을 두면 다른 곳은 저절로 돌아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아랫배에 힘을 줘봅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 /  아랫배에 힘을 줘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무작정 힘을 빼고 턴을 돌아보았다. 힘을 빼니 몸에 맥아리가 없어져 흐물흐물 늘어진다. 도는 걸 멈추고 내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발끝? 가슴? 다리? 이렇게도 돌아보고 저렇게도 돌아보던 중 정말 뜬금없게도 머릿속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가 떠올랐다. 도대체 왜 그 순간 평소에는 생각나지도 않던 나체의 그림 속 고대 그리스인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림을 생각하며 아랫배에 힘을 주어 돌아보았다. 휘청휘청하기는 해도 한 바퀴가 나도 모르는 새 휙 돌아간다. “오- 된다, 된다, 된다!!!!!” 감격스러운 마음에 연습실을 방방 뛰어다녔다. 턴이 뭐라고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줘야할 곳은 주고 빼야할 곳은 빼고


처음 춤을 배울 때는 마냥 그 화려함이 좋았다. 화려한 동작들과 멋진 제스처들을 동경했고, 나도 그렇게 화려한 춤을 추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음악은 계속 흘러가는데 그 안에 화려한 걸, 그것도 너무 많이 담으려고 하다 보니 지저분하고 갈 곳 잃은 동작들은 두서없이 흩어져버렸다. 빨리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성급해지고 조바심이 났지만 애석하게도 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턴이 제일 심각했다. 가장 화려해보였기에 누구보다도 더 많이, 그리고 빨리 돌고 싶었다. 하지만 욕심을 내면 낼수록 균형이 무너졌다. 잘 안되니까 더 조바심이 나고, 조바심이 나니까 더 힘을 주고, 엉뚱한 곳에 힘을 주니까 더 무너지고.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모래알처럼 흩어지기만 하던 동작들

▲ 모래알처럼 흩어지기만 하던 동작들


하나를 알면 둘을 알게 되고, 둘을 알면 셋을 알게 된다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덕분에 중심을 알고 나니까 그제야 비로소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중심이 잡혀있으니 기준이 생기고, 기준을 통해 몸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원리를 깨닫고 나니까 어디에 힘을 주고, 어디에 힘을 빼야할지를 저절로 알 수가 있었다. 힘을 줘야할 곳에는 주고 빼야할 곳에는 빼니까 중심이 바로 서고 균형이 맞춰졌다. 내친김에 껴야할 데 끼고 빠져야할 데는 빠지라는 신조어 ‘낄낄빠빠’를 벤치마킹해서 나만의 신조어도 만들었다. 줄 때 주고 뺄 때 빼라고 해서 ‘줄주뺄빼’다.


‘줄주뺄빼’와의 재회


나는 모든 것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공부도 잘하고 싶고, 춤도 잘 추고 싶고, 독서도 많이 하고 싶고, 글도 많이 쓰고 싶었다. 24시간을 48시간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다이어리 속 일정은 점점 늘어갔지만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 봐도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독서모임에서 읽어야 할 책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연습실에 가야 할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그마저도 연습실에 가야한다는 생각에 제대로 집중해서 책을 읽지도 못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매일 글을 하나씩 쓰자던 다짐은 어느새 침대 밑으로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에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 어떤 것에도 힘을 주지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왜 나는 '줄주뺄빼'가 안되는 걸까먼길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줄주뺄빼’

▲  왜 나는 '줄주뺄빼'가 안되는 걸까 / 먼길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줄주뺄빼’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춤뿐만 아니라 내 욕심들도 ‘줄주뺄빼’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줄주뺄빼’가 적힌 종이를 꼬깃꼬깃 접어 구석 어딘가에 던져버렸다. 연습실에서 연속으로 턴을 성공하던 어느 날, 그 종이를 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종이를 펴니 언제 쭈그러져 있었냐는 듯 ‘줄주뺄빼’가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고맙고 반가운 재회다.



턴을 도는 내 모습을 보며


그런 순간이 있다. 생판 모르는 TV 속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맞아- 나도 저랬었지’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울고 있는 친구를 달래주며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쏟아진 순간. 영화관을 나서면서 들었던 수만 가지의 생각을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한 영화평을 읽게 된 순간. ‘공감’ 두 글자에 따뜻한 연대감을 느낀 순간.


당신은 턴을 도는 나의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랫배에 힘을 주고 턴을 돌아봤을까, 아니면 ‘줄주뺄빼가 뭐람?’ 하며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을까. 그러다 문득 당신이 빼야할 힘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는 않았을까. 가만히 펜을 들어 당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줄주뺄빼’ 네 글자를 적어보지는 않았을까.

인문쟁이 줄주뺄빼 인체 비례도
김지영
인문쟁이 김주영
[인문쟁이 3기]


김주영은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라,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구토박이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스트릿댄서이기에, 스스로를 ‘춤추는 문학인’으로 정의한다. ‘BMW’(Bus, Metro, Walking)를 애용하는 뚜벅이 대구시민이다. 책과 신문, 언어와 문자, 이성과 감성, 인문학과 춤 그 모든 것을 사랑한다. 인생의 목표를 취업에서 행복으로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인문쟁이로서의 나와 우리의 목소리가 당신에게 전해져 작은 울림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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